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20 독립운동가 이승훈(上)

浮萍草 2014. 11. 30. 11:51
    30대에 10조원 벌어 독립운동에 투입
    1. 한국인 최초로 자기 시체를 학습용으로 기증한 이승훈
    남강 이승훈
    국인으로 세계 1, 2위 거부인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이 전 재산의 거의 모두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할 때 우리는 한국에도 저런 부자가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부자 아니 더 위대한 부자가 있었다. 바로 남강 이승훈이었다. 1864년에 평북 정주에서 가난한 농민 이석주(본관: 여주)의 2남으로 태어난 이승훈은 생후 10개월에 어머니가 운명하고 10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고아가 되었다. 이승훈은 어리광을 부릴 10세의 어린 나이에 유기(놋 그릇)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30 대 중반에는 조선의 최고 거부가 되었다. 거부가 된 후 독립운동가가 되어 일제의 형무소에서 9년간 옥살이를 한 그는 시인 김억과 김소월, 화가 이중섭,철학자 함석헌,의사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주기철 목사,한경직 목사,김홍일 장군(광복군 참모장,한국육군 중장) 등을 배출한 오산학교를 설립한 민족 교육자였다. 그는 죽기 전 한국인 최초로 자기 시체를 해부한 후 뼈는 철제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 생체학 공부에 사용해달라고 유언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해부만 되고 뼈 철제 표본은 만들지 못했다. 2. 10세 부터 상점 사환일로 신용 얻고 15세에 행상으로 창업
    이승훈은 10세에 고아가 되어 다니던 서당을 그만 두고 먹고 살기 위해 당시 거주하던 평북 정주 근처의 큰 유기 상점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10세의 이승훈은 주인의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청소며 정돈 등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하여 칭찬을 많이 받았다. 특히 주인의 더러운 가래침과 오줌이 범벅 되어 가득한 요강을 밥그릇보다 더 정성들여 깨끗하게 씻는 등 위생과 청결에 만전을 기해 주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다. 그는 4년 뒤인 14세에 수금원 및 외무원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고 그의 성실성과 근면 정직성 등이 널리 알려져 중매로 15세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자립을 위하여 유기상점을 퇴직하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놋수저 행상으로 창업을 하였다. 15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평안도와 황해도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10년 동안 놋수저를 팔아 돈을 벌었다. 그는 돈만 번 것이 아니고 이 곳 저 곳 다니면서 나라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외국세력들이 조선에 들어와 무슨 행패를 부리는지 등의 풍문을 들어 국력이 약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을 실감하였다. 또한 양반과 천민,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평등하게 서로 도우면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나중에 독립운동하면서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김구,노백린 등 황해도 출신 독립 운동가들과 가까웠던 것도 소년 행상 시절에 황해도를 많이 다니며 위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3. 24세에 유기공장 설립하고 서구 경영 앞서는 경영 패러다임으로 대성공
    이승훈은 24세이던 1887년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큰돈을 벌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장을 설립해 유기를 제조하고 직접 유통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행상을 그만 두고 고향 평북 정주 근처에 유기공장과 상점을 설립해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3-4년 다닌 것 이외에는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없었으나 5년간 유기상의 점원 생활과 10년 가까운 떠돌이 행상의 다양한 경험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질과 인품이 뛰어났다. 당시 19세기 말 조선의 공장은 대장간 수준으로 작업 환경이 말도 못할 정도로 지저분하고 열악했다. 그 당시 공장들은 아래표의 내용과 같은 환경이었고 지금도 한국에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업체가 많다. 특히 조직의 물품을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기초로 유기공장의 환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자 생산성과 품질이 극적으로 향상되어 주변 경쟁자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았다. 그가 바꾼 환경을 아래와 같이 도표로 그려보니 완전 21세기 현대 기업경영 시스템이었다. 이승훈 경영 시스템은 1887년 당시 조선은 물론 미국 및 유럽 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20세기가 되어서야 미국에서 프레드릭 테일러의 경영과학 기법 등이 나오면서 작업환경과 근무자들의 행동과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겨우 서당 공부 3-4년 밖에 하지 못한 고아 출신인 24세의 이승훈이 서구 경영인들의 패러다임을 30년 이상 앞섰으니 정말 위대한 경영자였다.

    4. 정직을 기초로 빠른 환경 변화 이용해 유통업으로 돈 벌어
    이승훈의 인생관은 어려서부터 어떠한 경우에도 정직하고 약속을 꼭 지키는 신용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거짓말은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당시 평안도 제일 거부는 철산군의 오삭주였는데 오삭주가 자금 융통하러 온 많은 상인들 앞에서 조상 묘소에 화려한 장식 석물을 세운 것을 자랑하자 20 대의 이승훈이 “그것이 무슨 자랑할 말씀입니까?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합니다” 하자 상인들이 “젊은 놈이 감히 그 어른 앞에서 까불어, 이승훈 너 이제 돈 빌리는 것은 끝이야”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사흘 후 오삭주는 이승훈을 불러“자네의 말이 맞아 자네는 훌륭한 청년이야 꼭 성공할 것이야”하면서 이승훈이 원하는 자금을 전액 다 융자해 주었다. 이승훈은 이러한 강직한 성품과 신용으로 평북 정주에 본점을 평양에 지점을 두고 서울과 인천에 물건을 납품하러 왕래하면서 외국에서 인천항과 남포항으로 석유와 양약이 수입되고 철도가 부설되고 있으며 전신이 가설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세상이 빨리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유통도 빨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재빨리 운송업을 시작하여 큰돈을 벌었다. 19세기 말에 20대 청년 이승훈은 21세기에 사는 우리보다 환경변화를 더 빨리 깨닫고 변화에 앞서 나간 것이다. 5. 청일 전쟁으로 잿더미 된 사업장에서 신용으로 큰 돈 빌려 재도전해
    이승훈은 유기제조 및 유통과 운송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1894년 동학 혁명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청국과 일본이 조선 땅에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승훈의 공장이 있던 평북 정주에 양국 군대들이 덮쳐 그의 사업장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동안 천신만고 끝에 쌓아 올린 것들이 다른 나라들의 전쟁으로 완전히 날아 가 버린 것이다. 하소연 할 데도 없었고 통곡을 해도 소용없었다. 약소국의 뼈아프고 이가 갈리는 서러움이었다. 화려하던 평양 거리도 완전이 초토화 되어 거지가 즐비하고 도적 패거리들이 사방에서 날 뛰어 사람 살만한 곳이 전혀 못 되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새롭게 다시 일어났다. 이승훈은 파괴된 공장과 상점에서 쓸 만한 기구와 장비들을 찾아내어 일일이 잔존가치를 다 계산하여 새롭게 장부를 만들었다. 그는 새 장부를 들고 철산의 거부 오삭주를 다시 찾았다. 찾은 이유는 남은 부채를 갚는 계획 보고와 새로운 사업을 위한 자금 융통 요청이었다. 다른 공장주들은 전란으로 망해 부채를 갚을 수 없다고 모두 다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31세의 청년 사업가 이승훈만이 부채를 갚을 계획서를 잔존가치 장부와 함께 갖고 왔으니 부자 오삭주는 완전히 감동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삭주는 이승훈의 남은 부채를 모두 탕감해주고 새로운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전액 빌려주었다. 아래는 청일전쟁 시 일본 육군의 전투 모습과 일본 군인과 청국 군인에게 짓밟히는 조선인의 모습이다.

    6. 평양을 본점, 남포를 지점으로 무역과 유통업으로 10 조원 벌어
    이승훈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평양에 본점을 항구도시인 남포에 지점을 두고 서울과 인천으로 유통업과 운송업을 다시 하면서 무역을 시작했다. 19세기말인 당시에 외국에서 조선으로 석유와 양약 등이 수입되었는데 이승훈은 총판대리점을 맡아 전국에 유통시키고 국내 물품인 종이 도자기, 면포 등 모든 일용 잡화의 전국 유통권도 확보했다. 이승훈 상점을 거치지 않는 물품은 조선 땅에 거의 없었다. 몇 년 뒤 이승훈의 사업재산은 70 만 냥이 넘었는데 당시 소 한필의 값이 한 냥이었으니 소 70만 필의 가치였다. 지금으로 하면 아무리 적게 평가해도 10조원 이상의 가치였다. 이승훈은 30대에 조선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조선 정부에서 그에게 강제로 참봉 벼슬을 주고 기부금조로 벼슬 값을 뺏어 갈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도 돈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이승훈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사업에 재도전하여 성공한 경영철학을 아래의 그림과 같이 요약하였다.
    이승훈의 경영철학

    이승훈의 경영 성공요인들은 지금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120년 전 성리학과 사농공상의 계급의식에 빠져 있던 폐쇄된 조선 사회에서 위와 같은 경영철학은 상 상할 수도 없었다. 그의 경영철학은 약육강식의 서양 경영철학을 앞서 가는 뉴 패러다임이었고 지금도 그의 경영철학대로 경영하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이승훈은 평양에서 외국 선교사들을 만났고 그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은 물론,개화에 대하여도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승훈은 경영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난하고 똑똑한 아이들을 선교사가 하는 학교 등에 보내 공부도 시켰다. 그는 1905년 러·일 전쟁 후 황해도 안악 연등사에 은둔하면서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을 만나 나라 걱정을 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육을 일으켜야 한다는 마음을 같이 했다. 뒤에 언급하지만 1911년 안명근과 이승훈은 독립군 무관학교 건립 자금 모집으로 함께 체포된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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