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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보문사

浮萍草 2014. 11. 23. 12:22
    마애관음상부터 떠오르는 3대 관음성지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22분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천연석굴에 봉안하면서 시작된 석모도 기도성지
     붉은 태양빛이 서쪽하늘부터 물들기 시작해 
    마애불을 비추면 배를 올리는 이의 경외감도 최고조…
    서쪽하늘부터 물들기 시작할 때 쯤 그 풍광을 함께 그려넣지 못해 못내 아쉽다. 윗부분이 마치 차양처럼 튀어 나온 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눈썹바위라 부른다.
    를 타야 갈 수 있는 절이 우리나라에 또 없지 않겠지만 내게 강화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를 향한 길은 남다르다. 오래 전 석모도로 터전을 옮긴 친구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보문사는 늘 함께였다. 외포리 항구에서 석모도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예의 갈매기들의 과자쟁탈전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했고 3년 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도 변함이 없다. 같은 속도로 인생이란 강을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석모도는 조금씩 변화가 있는 모양새다. 해안으로는 시원스럽게 도로가 뚫렸고 숙박시설들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석모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바다 위에 건설 중이었다. 이제 수도권의 엄청난 인파의 물결이 섬으로 흘러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에 괜스레 서운함마저 드는 까닭은 왜일까. 어찌 되었든 크지 않은 섬을 둘러보는 여행은 어느 곳부터 돌아봐도 좋다. 다만 섬 한가운데 위치한 낙가산에 자리한 보문사는 오후 무렵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 멀리 서해안을 물들이는 낙조 때문이다. 특히 이 낙조를 여유롭게 보기 위해선 하룻밤을 묵어가는 것이 좋다. 뭍으로 가는 마지막 배편 때문이다. 그래서 석모도의 친구가 더 없이 반가운 것일까! 늦은 오후 보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경사가 끝나는 곳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느티나무는 힘겹게 경내로 올라선 순례객들을 위한 부처님의 배려인 듯 시원한 그늘이 넉넉하기만 하다. 너무 열심히 올라왔는지 열기가 제법 달아올라 점퍼를 벗고 숨을 고른다. 느티나무 뒤로 700살이 넘었다는 근사한 향나무가 보문사의 석실을 지키고 섰다. 석실에는 보문사의 창건설화가 담겨 있다. 649년(진덕여왕3년)에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22구를 바다에서 건져 올려 천연석굴 안에 봉안함으로써 절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역시 보문사하면 양양의 낙산사,남해의 보리암과 함께 3대 관음성지로 손꼽게 만드는 마애관음상부터 떠올리게 된다. 벗은 점퍼를 입을 새도 없이 이내 극락보전 옆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높은 계단의 끝에 마애불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 이화응 스님과 보문사의 주지 배선주 스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정성껏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광은 더 없이 아름다운데 더불어 장엄한 낙조도 빼 놓을 수 없다. 붉은 태양빛이 서쪽하늘부터 물들기 시작해 마애불을 비추면,배를 올리는 이의 경외감도 최고조에 이른다. 그렇게 어두워진 하루는 친구집의 마당에 피어올린 모닥불과 함께 그간의 회포를 풀며 끝난다. 하루라는 의미가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나들이 길이다. 다음 날 친구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을 향해 떠난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한창 건설 중인 다리를 보며 차를 멈춰 선다. 교각만 놓인 다리공사는 시시각각 섬으로 뻗어 오는 개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쉬움 같다. 이제 배를 타는 즐거움부터 간식을 갖고 싸우던 갈매기들과도 작별이겠지 그 때의 석양이 지금처럼 오롯이 섬에서 바라보는 느낌과 같을까. 낙조만 보고 서울로 돌아가려는 급한 마음도 생겨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모닥불을 지피던 밤은 온전할까 싶다. 못내 추억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상판 없는 다리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 불교신문 Vol 3055 ☜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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