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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신군부 정권과 전경련(上)

浮萍草 2014. 10. 23. 12:12
    신군부가 정주영 때문에 50세 넘긴 전경련 직원들의 병역을 조사한 사연
    
    1979년 한국 사회를 충격과 혼돈에 빠지게 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은 다시 전두환,노태우 등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12·12 사태로 이어졌다.
    이들이 장악한 계엄사령부가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해가 바뀌었으나 한국 사회는 반정부 시위로 걷잡을 수 없는 극도의 혼란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해 5월 17일에는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정부의 강경대응에 아랑곳없이 5월18일에는 비극적인 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신군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국정 전반에 걸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의 격동적 변화에 실질적으로 한국의 유일한 자율적 민간경제단체인 전경련은 자주적 정체성을 고수하는 데 있어서 창회 이래 가장 큰 도전과 시련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신군부는 정치 사회적으로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힘을 과시하는 무리수를 강행했다. 
    그 일환으로'사회정화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우선 240여 명의 고급 공무원을 자의적 기준을 정하여 숙정하였을 뿐 아니라 비정부 단체까지 일종의 강제 쿼터로 인원수를
     정하여 숙정을 강요하였다.
    전경련 사무국도 이러한 압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급기야는 경제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공업 분야에 대한 투자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는 말이 투자조정이지 사실상 강제로 민간 기업을 공사화하거나 통폐합하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무리수를 계속 펼쳐 나갔다. 
    주요기업 그룹의 계열사 166개 기업들을 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시책을 발표하였다. 
    국제경쟁력 강화나 자유시장 논리를 근거로 한 재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군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한 대기업 회장은 느닷없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울먹이며 자기 그룹의 모든 기업을 정부에 헌납하고 기회를 준다면 전문경영인으로 남겠다
    는 발표를 하여 경제계는 물론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경련의 저항은 신군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정주영 회장은 경영자총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한 업계간담회에서“한국이 사회주의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 책임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을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전경련 신임 회장단을 청와대로 불러 접견하고 있다./조선일보DB

    . 이와 같은 전경련의 저항에 전두환 정부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차기 전경련 총회에 앞서 전경련 회장 추대 과정에 개입하여 신군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주영 회장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인사로 교체하려 한 것이다. 신군부 정부는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4단체 중 대한상의,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장을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그들의 의지대로 교체를 끝낸 상태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정부 일각,그리고 다른 경제단체 주위에서 심지어 전경련의 무용론과 경제단체 통폐합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주요 경제 단체장 교체뿐만 아니라 언론의 강제 통폐합을 비롯하여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힘의 과시와 통제력 기반 강화에 집착하는 신군부와 민간 주도 자율단체임을 내세우고 버티는 전경련과의 팽팽한 긴장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국내외 여론과 특히 국제 경제계를 의식하여 정주영 회장을 임기 중에 끌어내리지는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마침 정회장의 전경련 회장 2차 연임 임기가 끝나는 1981년 2월 20차 전경련 정기총회가 다가왔다. 신군부에게 껄끄럽기 그지없는 정주영 회장을 자기들 의지대로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었다. 그들은 그들과 원만한 협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을 내정해 놓고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사안이 우선 본인 자신의 직접적 거취문제이고 그다음 앞으로 전경련이 대정부 관련 사업을 펼쳐 나가는데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2월 총회가 있는 날 아침 정 회장은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놓고 그날 있을 전경련 총회에서 전경련 회장직 연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전한 다음 전경련 총회장으로 향했다. 한편 신군부 정부 측에서도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정 회장의 교체 과정을 확인하기 위하여 관련 경제부처의 관리 두 명을 전경련 총회에 임석시키는 초유의 조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의 신임 회장 추대 회순에 따라서 드디어 정 회장이 연임을 고사하는 발언을 끝냈다. 새 회장에 추대되는 인사가 거명되고 관례대로 추대에 동의하는 박수절차가 끝나면 새로운 회장으로 교체되는 찰나였다. 이때 평소 소신피력에 강직하기로 널리 알려진 롯데그룹을 대표하는 고 유창순 회장이 긴급 의사진행 발언에 나섰다. “나도 전경련 회장직을 꼭 정주영 회장이 계속 맡아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순수민간 자율경제단체인 전경련의 회장직과 관련한 작금의 배경과 과정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경련이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게 되면 민간경제계를 대변하는 자율단체로서 전경련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전경련 회장에 추대되느냐 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문제는 그 과정입니다.”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은 순간,이윽고 돌변한 분위기 속에서 동의의 박수가 회의장을 휩쓸었다. 대안은 만장일치로 다시 정 회장이었다. 서슬이 퍼랬던 당시 분위기를 볼 때 일종의 ‘반란’이었다. 국내외 언론에 공표된 이러한 기정사실을 신군부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감당할 역풍의 부담이 너무 컸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민간 자율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낸 전경련 역사의 한 장이 마무리 되었다. 당혹감과 분노를 어쩔 수 없었던 정부 측에서는 엉뚱하게 전경련 사무국 임원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회장 추대과정의 이변상황을 그들이 물밑에서 연출한 것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꼬투리를 잡을 소재가 궁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이미 50~60대를 넘긴 사무국 임원들의 병역미필 여부를 뒤지는 일이었지만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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