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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신군부 정권과 전경련(下)

浮萍草 2014. 10. 28. 12:28
    재벌 총수들이 신군부 눈치보고 전경련 정책결정을 미루자 정주영 회장 왈
    런 사태에 이어서 1980년 8월 27일 신군부의 중심인물인 전두환씨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이로부터 정 회장이 새로이 회장직 3연임을 마치는 1987년 6년동안 전경련은 전두환 정부와 경제,정치,사회 각 분야에 걸쳐 끊임없이 일었던 파고 속에서 수시로 갈등과 
    조화가 교차하는 시기를 함께 걷게 된다.
    제5공화국 치하에서 전경련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정 회장의 강한 의지와 뚝심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정부의 경제 정책방향이나 정부의 규제, 세제,금융과 관련된 사안들은 다 같이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과 당위성을 내세우나 그 배경과 접근 방법이나 실천에 있어서는 
    정부,경제계,정치권,노동계,사회언론의 입장과 견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특히 권위주의 정부 통제 하에서는 민간경제계를 대변하여 자유경제체제와 시장경제를 주창해야 하는 전경련의 목소리는 제약을 받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따라서 전경련이 어떤 경제 정책 건의나 조사 자료를 언론 등에 공표하려면 특히 정부 당국이나 정치권의 예상되는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안건들은 사전에 전경련의 최고 중진 모임인 회장단 회의에 부의되어 그 취지나 타당성이 검토된 다음 최종 결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5공 초기에는 전경련 회장단에 속하는 대기업 총수들은 여러 면에서 정부 권력층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신군부 정권 초기에는 그들의 눈에 나서 대기업에 속하는 회사가 정부의 조처로 하루 아침에 몰락하거나 타 기업에 흡수되어 버리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여서 조심
    하는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따라서 회장단 회의에 부의된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는 국내 재벌그룹의 대표들은 극히 발언을 조심하거나 입장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정 회장은“아,여러분은 이런 결정을 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정부의 눈에 날까봐 그러는군요. 
    그러나 이번 사안은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말썽이 생길 경우 여러분은 모두 반대했는데 나 정주영이 혼자 우겨서 결정했다고 하십시다.” 
    이렇듯 전경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신군부 정권 치하에서의 이러한 환경에서도 전경련은 정부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각종 규제 완화와 인허가업무의 축소,정비,경제 발전과 성장저해 요인 개선을 위한 건의, 
    세제 개선,금융관계법 개정과 같은 중요한 사업들을 부단히 추진하였다. 
    한국 경제계가 처한 현안에 대한 연구와 전경련의 주장 논리를 보다 견실히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국경제연구원을 출범시켰다. 
    전경련은 새로운 산업사회 도래에 대비한 파이오니어적 사업들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를 발족시켰는데 이는 이후 한국의 벤처캐피탈 시대의 문을 연 효시가 되었다. 
    1983년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정보화 사회에 부응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민간협의체로 한국정보산업협의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경련이 유전공학연구조합 설립을 주도한 것은 향후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내다 본 사업이었다.
    1982년 7월17일 재계 원로들이 1박2일간 김해, 울산지역 공장 등의 산업시찰에 나섰다.
    산업시찰단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김용완 전경련 명예회장,
    송인상 동양나이론 회장,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 30여명의 재벌총수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DB

    특히 이 시기에 전경련은 한국 역사의 빛나는 한 장을 장식한 88서울 올림픽 유치성공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위상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드높였을 뿐 아니라 코리아 브랜드 가치를 단번에 몇 단계 올려놓은 한국의 위대한 쾌거이다, 긴장감이 팽배한 남북군사 대치와 테러위협,경쟁국 일본에 비해 턱없이 열세인 국제사회 영향력,부족한 시설 인프라와 경험, 이에 더하여 과거 유치했던 1970년 아시안 게임을 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반납함으로서 국제 체육계에 남겼던 오점,당시 한국 정부의 인권 시비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은 엄청난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 못지않은 내부적 난관은 우선 한국 정부 자체는 물론 체육계를 포함하는 사회 각계 어디에도 한국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믿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유치 경쟁에 나서는 것은 처음부터 내놓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체면치레 절차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막상 88 서울 올림픽 유치의 주체가 되는 서울시의 당시 시장이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관 개관식 때 현지에 오지도 않았던 것은 이러한 정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거의 ‘망신 대역’으로 유치위원장을 떠맡게 된 정주영 전경련 회장만은 예외였다. 그는 온통 불가능의 구름으로 덮인 하늘 한 귀퉁이에 보이는 작은 한줄기 가능성의 빛을 보고 그 특유의 집념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전경련은 1970년대부터 영국,독일,불란서,스위스 등 주요 각국의 경제계 중진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표적 경제단체들과 국별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협력위원회들은 그들과 한국 간의 투자,무역,기술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이들 국가의 중진 인사들 간의 인적 교류를 통하여 긴밀한 유대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아오며 국제활동 경험과 국제사회에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던 고 유창순 롯데그룹 회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이 합세하여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88서울 올림픽 유치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는 경제단체인 전경련이 경제영역을 초월하여 올림픽 유치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연 같아 보이는 한 시기의 역사의 한 과정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에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그 때 만약 신군부의 의지대로 전경련의 회장이 바뀌고 고유의 정체성이 변질되었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연 전경련이 주도한 역사적 88올림픽 유치가 가능했을까 하는 것을 되짚어 볼만한 일이다. 한편으로 그 간에도 신군부는 전경련에 행사하려했던 영향력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아직도 정부는 전경련 회장직이 대통령 결재를 득해야만 하는 사항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인데 전경련은 앞으로도 절대 이러한 압력에 굴해서는 안됩니다.” 1987년 정 회장이 마지막 임기를 앞두고 새로운 회장을 선출하는 총회 개최 직전 사무국 임원회를 소집해서 한 말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전경련은 창회 이후 과거 50여 년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순수 민간주도 경제단체로 담당했던 이제까지의 역할을 넘어 급변하고 있는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소명에 부응하여 한국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 가치와 위상 정립을 위한 과제와 도전을 앞에 두고 있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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