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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란지방의 반식민지화

浮萍草 2014. 10. 22. 10:50
    Persischer Meister. 波斯的 主人(冠軍.優勝者).파사적 주인(관군.우승자).페르시아 왕실.천장에 그려진 여성의 복장을 보면 과거 우리 민족의 옷차림과 비스하다.
    © 편집부
    13. 페르시아(이란) 지방의 반식민지화 무르 등 몽골계통의 지배자들이 물러간 후 이란 지방에서는 몇개의 왕조가 교체되었다. 유럽지방 식민주의자들의 침략정책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서기 18세기 말엽부터 영국섬과 러시아의 탐욕스러운 땅따먹기 경쟁의 대상으로 도마위에 오른 페르시아 지방은 유럽 지방의 야만적인 세력이 밀려오기 전에는 그런대로 오랜 문명사회다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기 1833년에 영국섬의 여행가 프레이저(James Fraser)는, "페르시아 농민들이'비록 학정에 시달리기는 하지만'(?)그래도 그들의 주택은 깨끗하고 안락하며 음식은 훌륭한 밀가루 빵과 약간의 발효우유와 치즈를 들고 때로는 과일과 고기요리와 스프를 먹는다. 옷은 조잡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입고 있고 손님을 맞을 때는 대부분 응접실에 펠트양탄자를 깐다."고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했다. 마치 산업혁명광란이 본궤도에 올랐던 당시의 영국섬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숱한 프롤레타리아들이 악취나는 더러운 숙소의 문간에 주저앉아서 시커먼 공장폐수와 스모그를 희망없이 쳐다보고 있었던 사실은'학정'에 시달린 결과가 아닌 듯한 보고였는데 페르시아의 민중이 영국섬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점만은 증명한 셈이 되었다. 이처럼 풍요한 지역이 야수적 식민주의자들에게 백여년간 수탈당한 후에 페르시아 지방의 민중은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로 떨어져 갔다. 영국섬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세력권인 중앙아시아와 인도지방사이에 끼어 있던 페르시아 지방을 일종의 완충지대로 이용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두 야만국들의 수탈대상에서 페르시아가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는 항상 페르시아에 대해서만은 영국섬보다 더 큰 야욕을 보여왔다. 러시아 제국주의의 목표는 페르시아의 샤(Sha :즉,왕정)체제를 유지시키면서 페르시아를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산업혁명광란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볼 때 러시아는 영국섬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하위 자본주의 국가였는데 페르시아의 경제는 러시아에 종속되다시피 함으로써 일련의 국제적 수탈체계가 이루어졌다. 페르시아로서는 영국섬보다 제국주의 러시아와의 무역이 더 많았는데 두 나라 사이의 형식을 갖춘 무역행위는 페르시아의 풍요한 자원을 가차없이 빼앗아 가는 역할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페르시아 중앙정부는 서기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심각해진 재정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매관매직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그에 따라서 거금을 주고 관직을 얻은 자는 자신의 투자이익을 최대한으로 늘리려고 농민대중의 세금을 인상하였고 농민대중은 탐관오리들과 고리대금업자인 지주들 에게 시달려서 토지를 잃고 유랑민화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페르시아의 농민과 수공업자들은 완전히 파탄지경에 빠졌으나 일부 매판적인 페르시아 상인들은 러시아·영국섬 등의 자본가들을 위한 대리역할을 해줌으로써 부자가 되어 갔다. 그러한 모든 말세적 현상은 영국섬 및 러시아왕국의 은행들에 의한 페르시아 금융시장 지배 외국인에게 특혜를 부여한 통상조약 국내 엘리트들의 부동산 투자행위 급증, 그에 따른 외국인들의 상공업독점 등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또한 그와 같은 경제적 종속화에 따른 모든 부조리는'경제개발'과'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졌던 점이 오스만투르크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는데,그로 인한 농업의 피폐상 또한 극심한 것이었다. 서기 1905년경에는 농민들이 일부러 밭을 놀리는 태업현상이 두드러지기까지 했는데 그 이유는, "농민들 마음대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평생 일해 봐야 그 결실은 총독과 세금징수원이 다 가져가고 농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즉, 그러니 무엇때문에 자신이 먹을 것 이상을 농사지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외국의 자본주의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국가의 농업이 걸어가는 공통적인 현상의 하나였다. 같은 무렵인 서기 1905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은 페르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극악한 카자르(Qajar)왕조는 죄인의 발바닥에 말처럼 징을 박는 등 초강경 공포정치로 혁명을 탄압했으나 테헤란에서는 국민의 총파업이 일어났고 왕은 결국 민중의 위력에 눌려서 형식적으로나마 의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민중은 매판적인 정부를 믿을 수 없었으므로 쏘비에트를 본딴 안조만(Anjoman)이라는 민중적 대의기구를 결성하여 모든 도시에 독자적인 민중의회를 만들었다. 즉, 일종의 꼼뮨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익이 페르시아의 민중혁명으로 인하여 줄어들 것을 염려한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반혁명 세력을 적극 지원하는 한 편, 서기 1907년 8월 에는 제멋대로 영국과 함께 페르시아 분할협상을 했다. 협상문서의 전문(前文)에는 분명히,"페르시아의 영토보전과 독립을 존중한다." 는 매우 희망적인 조항이 들어 있었으며 영국섬에서 파견된 외교관들도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그 점을 누누히 강조했으므로 순진한 페르시아인들은'의회주의 정치의 모국'인 영국섬이 페르시아인들의 민주주의 열망을 지지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가 그러하듯이,'페르시아의 영토보전과 독립'은 습관화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북부지방은 러시아 침략자들이 장악했고,남부지방은 영국섬 해적들이 장악했으며,중부지방만은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남겨지게 되었다. 서기 1911년에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반혁명 쿠데타로 페르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영사관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러시아의 바쿠에 있는 감옥에 쳐박혀졌고 그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페르시아는 제국주의 강도국들에 의한 수탈에 내던져졌다. 특히 페르시아의 풍부한 석유자원이 제국주의국가들의 구미를 돋구면서 이란 지방은 완전히 제국주의자들의 잔치마당이 되고 말았다. 그후 매판적인 팔레비 왕조의 악랄한 비밀경찰정치에 시달리던 이란의 민중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슬람지도자 호메이니옹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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