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과학 이야기

24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는 진짜 이유

浮萍草 2014. 10. 28. 10:53
    벨 과학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이번에도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올해는 특히 세계적인 학술정보 서비스사인 톰슨로이터의 수상 예상자 명단에 2명의 우리 과학자가 포함되어 더욱 기대가 높았지만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아직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고 문화·스포츠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우리 과학자들이 무능하거나 사회적으로 주어진 책무를 소홀히 했던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동안 우리 과학기술계는 기술 개발 분야에서 다른 나라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기술 개발을 통한 경제 성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벨상이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노벨상의 영역인 기초과학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기초과학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카사키 이사무(왼쪽 위), 나카무라 쇼지, 아마노 히로시(왼쪽 아래).

    ㆍ노벨상 강국이 된 일본
    이제 일본은 명실상부한 노벨상 강국이다. 19명의 과학상 수상자를 포함하여 2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은 미국(353명),영국(114명),독일(102명),프랑스(67명),스웨덴(30명),러시아(28명),스위스(26명), 캐나다(23명)에 이어 오스트리아와 함께 세계 9위를 차지하고 있다. 1949년 입자물리학자였던 유카와 히데키가 최초의 물리학상을 받은 이후 1994년까지 8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노벨상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전도성 고분자를 개발한 시라카와 히데키가 화학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2008년에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모두 수상했다. 지금까지 10명의 물리학상,7명의 화학상,2명의 생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약진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노벨상 강국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일본 과학자들의 뛰어난 재능과 적극적인 노력 덕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의 교육과 연구개발 정책도 노벨상 수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알려진 도쿄대학과 교토대학만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 아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 문을 연 7개의 제국대학 중 5개 대학이 수상자를 배출했다. 올해 물리학상을 수상한 나카무라 쇼지는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시코쿠의 도쿠시마 대학을 졸업했다. 그뿐이 아니다. 2002년에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는 기기제조사인 시마즈의 평범한 연구원이었고 올해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는 직원 200명 규모의 시골 중소 기업인 니치아화학공업의 직원이었다. 일본의 과학자 양성과 활용 기반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그 폭이 넓다는 뜻이다.
    ㆍ일본과 노벨상의 인연
    1922년 일본을 방문해서 환영을 받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일본이 노벨상 강국이 된 진짜 배경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일본이 기초과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19세기 말은 서양에서도 현대 과학이 싹트고 있을 때였다. 영국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것이 1859년이었고 루이 파스퇴르가 박테리아의 존재를 밝혀낸 것이 1861년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추구하던 일본은 그런 유럽에 유능한 젊은 학생들을 보내 현대 과학의 출발을 함께 했던 셈이다. 실제로 일본과 노벨상의 인연은 노벨상이 처음 수여된 1901년부터 시작됐다. 최초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밀 폰 베링과 함께 디프테리아균을 연구했던 시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 가 유력한 수상 후보자였다. 그 후로 매독 치료제인 사르바르산을 개발한 하타 사하치로,신경생리학자인 가토 겐이치,일본의 슈바이쳐로 알려진 노구치 히데요도 모두 유력한 생리의학상 후보였다. 원자 구조의 모형을 제시했던 나가오카 한타로도 유력한 물리학상 후보였고 비타민을 연구했던 스즈키 우메타로도 화학상 후보였다. 노벨위원회 공개 자료에 따르면 1963년까지 공식적으로 수상 후보자로 거론된 일본 과학자는 무려 163명에 이른다.
    대만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 리위안저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했던 천수이벤 총통이 임기 후 부정부패로 체포되는 모습.

    ㆍ노벨상의 불편한 진실
    노벨 과학상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벨 과학상 수상자만 나오면 우리 사회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조심스러운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우리 사회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청소년들은 과학에 대해 열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오늘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매년 10월이면 여의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도 평화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청소년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라고 사정이 크게 다를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과학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교육을 받은 문과 출신 청소년들이 60퍼센트를 훌쩍 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벨 과학상이 득(得)이 아니라 독(毒)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만의 경우가 그렇다. 대만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중에 198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리위안저(李遠哲)가 대만으로 귀국했을 때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경직된 사회였던 대만에서 리위안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총통 선거에서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부터 사정은 더욱 나빠져 버렸다. 리위안저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영향은 대만의 기초과학 분야 전체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 쏠림 현상이 심각하고 정치가 모든 것을 빨아들여 버리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진정한 과학 영웅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벨 과학상을 받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과학이 혼란스러운 정치에 휘둘리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Premium Chosun        이덕환 서강대 교수 duckhwan@sogang.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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