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재벌가 인사이드

8 '재계 3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회장님은?

浮萍草 2014. 8. 6. 14:36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
    1980년대 후반,재벌가를 취재할 때 일이다. ‘재벌가의 3김을 아시냐’는 물음이었다. ‘7공자’ 얘기나‘황태자 클럽’ 등은 들어봤는데 ‘3김’ 얘기는 금시초문이라 흥미로웠다. 취재를 하면서 드러난 사연은 젊은 나이에 기업을 물려받고 현재 30대 재벌에 속해 있는 잘나가는 김씨 성을 가진 총수들이었다. 쌍용의 김석원 회장, 한화의 김승연 회장, 삼미의 김현철 회장을 일컬어 재벌가의 3김으로 부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들 기업 총수들은 주목받는 2세 경영인이었다. 쌍용의 김석원 회장은 재계 6위에 랭크될 정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고 김승연 회장 역시 화약그룹 에서 레저·유통 그룹으로 변신 그룹의 외형이 한창 뻗어나고 있을 때였다. 김현철 회장은 어떤가. 프로야구 초창기‘삼미슈퍼스타즈’를 만든 구단주로서 특수강 분야의 1인자로 그룹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선친이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그룹 대권을 20대와 30대 초반에 물려받아 계열사를 늘리는 등 한창 양적 팽창을 가하고 있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한화의 김승연 회장만 그룹을 온존하게 경영하고 있고 다른 2김은 실패한 경영인으로 낙인 찍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특히 삼미의 김현철 회장은 현재 중미의 도미니카로 이민, 선교사로 제 2인생을 살고 있다. 삼미특수강이나 서울시내 랜드마크빌딩이었던 ‘삼일빌딩’은 모두 주인이 바뀐채 옛 영화만 말해 주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 때 특수강 분야 최고의 기업으로 소문난 삼미특수강이 부도나고 포스코로 넘어 갔을 때 창원공장을 취재 했었다. 이때 현장 근로자의 얘기는 2세 경영인의 현주소를 그대로 웅변했다. 선대 회장은 기계 벨트 소리만 들어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로 알아차렸지만 신임 회장은 그 원인을 파악 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결국 현지 책임자에 의존했고 심지어 공장 방문조차 꺼렸다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슈퍼스타즈’를 창단할 정도로 삼미그룹은 한때 주요 재벌이었다. 창업자인 김두식회장은 목재사업으로 돈을 벌어 철강 해운 같은 제조와 운수업에 뛰어들어 그룹 사세를 키우고 있었다.
    서울의 명물인 삼일빌딩도 이 때 김 회장이 세운 건물이다. 그러나 김 회장이 일찍(1980년) 타계하고 29세인 장남 현철씨가 그룹 경영을 맡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는 것 처럼 비쳐졌다. 2차 오일쇼크 등으로 위기가 닥쳤다. 다행히 삼미는 특수강 특수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신임 회장은 부친보다 볼륨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 어김없이 해외 진출도 시도했다. 미국의 알택과 캐나다의 아틀라스 특수강공장을 인수하는 등 세계 제1의 특수강 회사를 만들겠다고 청사진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인수한 해외 공장에서 발생했다. 북미 공장이 4년 연속 적자로 그룹까지 휘청거릴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동생인 현배씨에게 1995년 국내 경영권을 물려주고 자신은 캐나다 현지법인의 대표를 맡아 경영을 정상화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삼미 그룹은 97년 3월 주 채권은행의 대출 연장 기피로 부도를 맞고 그룹이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김현철 회장은 십수년이 흐른뒤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불찰을 고백한 적이 있다. 부친이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후견인이 없었고 세계 1위 기업을 만들겠다는 야심만 있었지 이를 뒷받침할 시스템은 구축되지 않았다는 자기 성찰이었다. 김현철 회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다. 한국 사정보다 오히려 외국 사정에 더 정통한 편이다. 동생과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었다. 패망한 2세 경영인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김석원 쌍용그룹 전회장
    쌍용의 김석원 회장은 무리한 집착으로 기업을 패망으로 이끈 경영주라고 평할 수 있다. 1975년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의 타계로 만 30세에 거대한‘쌍용호’를 이끌게 된 그는 1990년대 중반만해도 재계 랭킹 6위에 오를 정도로 성공한 2세 경영인이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더불어 재계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특히 김 회장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때인 70년대에 리조트 사업을 구상, 오늘의 용평리조트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시멘트 정유 제지 증권 건설 등 다른 주요 업종들도 순탄하게 돌아갔다. 김 회장은 이에 자신을 얻어 과감하게 자동차 분야에 뛰어들었다. 1986년 1조원의 부채를 안는 조건으로 동아자동차를 인수,그룹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무쏘’와 ‘코란도’로 대변되는 SUV 시장에서의 인기도 꽤 높았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소규모 자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초기에 투자돼야 하고 또 이를 판매할 시장도 갖춰져야만 성공하는 산업이다. 이때 삼성그룹은 반도체로 벌어들인 막강한 자금을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신규 자동차 공장을 짓는 것보다 기존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려고 백방의 노력을 했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고 했으나 ‘국민기업’이라는 논리로 막혔고 다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96년 말 이건희 회장과 김석원 회장의 담판까지 벌였으나 무산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이 두 총수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재계에 소문나 있었다. 삼성은 그 뒤 신규 진출로 방향을 바꿔 부산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고 막 가동에 들어갈 때 IMF를 맞아 자동차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1997년에 들어서면서 쌍용도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자동차를 대우자동차로 넘겼으나 그룹은 휘청거리고 말았다. 지금도 재계에선 김 회장이 자동차사업을 빨리 접었거나 삼성으로 넘겼으면 그룹의 해체라는 비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뒤 김회장은 모든 계열사에서 손을 떼고 야인 생활을 하고 있다. 몇번의 검찰 소환과 구속 등으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몇년전에는 둘째 아들이 자살하는 비운도 있었다. 총수의 잘못된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앞서 두 김씨에 비해 한화 김승연 회장은 사업을 내실있게 꾸려가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1981년 창업주인 부친 김종희 회장의 타계로 29세 나이로 그룹 총수가 된 그는 다른 2세 총수와 달리 많은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창업공신들과 나이 차가 많아 이들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걸음걸이를 다듬는 등 숱한 얘깃거리를 낳았다. 형제간 갈등과 ‘지나친’ 자식사랑 등으로 수형 생활을 3번이나 하는 고초도 겪었다. 그러나 그룹은 물려받을 때 보다 20배 이상 키우는 저력을 보였다. 한화 그룹의 퇴직한 CEO는 필자에게“그룹내에서 김 회장만큼 회사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없다” 면서“그러한 자신감과 식견이 그룹을 잘 이끄는 것 아닌가”라고 진단했다. 화약 그룹에서 화학,레저와 보험 등 인수한 분야도 착실하게 착근,현재‘한화호’는 이상없이 돌아가고 있다. 최근엔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사회봉사명령을 이행하는 등 김 회장은 조용히 경영복귀를 저울질 하고 있다.
    Premium Chosun        홍성추 재벌평론가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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