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재벌가 인사이드

9 처자식이 너무 많아 자기도 헷갈렸던 K 재벌회장

浮萍草 2014. 8. 13. 09:52
    난 1994년 10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창업주 C총회장의 빈소를 필자가 문상 겸 취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관·재계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평소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경제계 거물들이 문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부인이 단정한 소복을 입고 문상을 시작했다. 
    예닐곱살 난 남자아이를 데리고 온 이 여인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이때 상주들이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목격됐다.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오자 상주와 그룹 비서실장이 나와 그 여인을 별도로 만났다. 
    돌아가신 회장과 무슨 관계냐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울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그 여인을 데리고 나가 오늘은 상중이니 나중에 조용히 찾아뵙겠다고하고 돌려보낸 뒤 장례식장은 평온해졌다.
    몇 달뒤 그 여인은 타계한 회장의 ‘숨겨진 여인’ 행세를 하며 돈을 요구한 사기범으로 입건되었다. 
    이 광경을 필자는 직접 목격했다. 
    당시 비서실장 Y씨는 필자에게 그 여인이 “현금 10억원을 주면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숨어 사는 것은 물론 친자확인 소송과 같은 일도 없을 것”이라면서 돈만 요구
    했다고 말했다. 
    총회장의 나이를 볼 때 어린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도 했다. 
    특히 운전기사도 그 여인이 사는 동네에 총회장이 자주 가지 않았다는 얘기에 의심을 품어 경찰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재벌 총수들이나 돈많은 사람의 장례시작에 상복을 입고 문상을 가 망자(亡者)와 연관이 있는 것 처럼 행세하고 돈을 뜯어내는 전문 사기꾼으로 밝혀져 
    사건은 마무리 됐다. 
    20~30년 전 재벌가의 풍경 한토막이다.
    사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업을 번창시킨 창업 1세대 중 후처나 은처(隱妻)를 거느리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본처말고 다른 곳에서 자식을 낳아 호적에 입적시킨 예는 수없이 많다. 
    당시 재벌가에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지난 1985년 동아건설 창업주인 최준문 회장이 돌아가실 때 수발을 든 사람은 사실혼 관계인 은처였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었던 최 회장은 마지막에 수발을 든 부인에게 부동산과 일정 금액을 주면서 서울에는 오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타계한 일화가 있다. 
    아들도 하나 있었으나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그 여인은 부산에 정착한 것으로 뒤에 밝혀진 적이 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을 둘러싼 이복 자매들이 재산 분할 소송을 벌일 때 직접 취재했었다.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인 J사가 10여년전 지리한 가족들간 송사를 벌인 적이 있다. 이 송사의 원인도 결국은 회장이 남겨둔 서자 문제였다. 회장 유언장에 회사는 장남으로 승계하도록 하고 나머지 재산들은 형평에 맞게 분배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때 선대 회장이 은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장남에게 그에게도 재산의 일정부분을 주도록 명시해 뒀다. 이를 본 가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재계에서도 신사로 소문난 회장에게 은처와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재산까지 일부 주라는 얘기에 발끈한 것이다. 그러나 장남인 L 회장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일정부분을 넘겨주었다. 이에 다른 가족들이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어쩌면 ‘씨앗’ 싸움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돼 망신살을 당한 경우다. 당시 L 회장은 필자에게“어쩌면 그들도 우리 식구이고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실행한 것 뿐인데 다른 가족들이 소송까지 한 것은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L 회장의 배려로 그 모자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의 일은 하지 않아 조용히 넘어갔다. 창업 회장들은 후처나 은처를 만드는 것을 당연한 추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죄의식이 없음은 물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나 자식들에대한 배려 등으로 불만을 나타내지 않도록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불문율로 지키는 일이 후처나 은처의 자식은 모기업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들에겐 충분한 보상을 해주고 모기업과는 전혀 다른 업종을 창업하게 하든가 아니면 공부를 시켜 학계나 예술계로 나서게 했다. 다만 본부인과 이혼하고 정식 부인이 된 뒤 낳은 아이들은 대접이 달랐다. 후처의 입김이 세면 모기업이나 알짜 기업을 물려받은 경우도 꽤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 잘나갔던 H그룹의 장남인 K 회장은 모기업은 물려 받았으나 알짜 기업은 이복동생에게 넘어가 결국 그룹이 패망한 사례가 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다른 케이스로 봐야 한다. 외도로 애를 낳으면 아주 어렸을 때 본가로 데려와 본처가 키웠기 때문에 동복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복들이지만 자식들에게 똑같이 경영수업을 시키고 기업 분할도 해주었다. 우성그룹 창업주인 최승진 회장도 선친인 최주호 회장의 후처 소생으로 전처 아들들과 전혀 다른 업종을 창업 성공했던 케이스다. 국내 굴지의 재벌인 K그룹의 창업주의 막내 아들인 P씨는 후처 소생이라 일찌감치 학계로 눈을 돌려 그룹 경영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국내 몇째 안가는 D그룹은 형제들이 이복동생을 경영에 참여시켜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있다. 현재 그는 그룹의 최고 책임자로서 오늘의 그룹을 번창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재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후처가 많기로 소문난 창업주는 K그룹의 K회장이다. 창업주인 K회장은 다른 창업주와 달리 반드시 이혼하고 정실로 맞아들였다. 혼인 신고한 부인만 4명이나 된다. 3명의 부인한테 자식이 있다. 처자식이 너무 많아 때로는 어느 자식이 어느 부인의 아내 소생인지 헷갈린 때도 있었다고 한다. K그룹은 IMF 파고를 넘지 못해 그룹은 공중분해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K회장의 자녀들은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명장 율리우스 카이사르는“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들 보다 자유가 제약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최고 권력자는 마음대로 힘(권력)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넘쳐난다. 그러나 이 욕구대로 행했다간 결국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Premium Chosun        홍성추 재벌평론가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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