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이봐 해봤어?'

16 "나는 노동자"(上)

浮萍草 2014. 6. 26. 09:52
    정주영, 현대중공업 시위대에 4시간 동안 갇혔을 때 하고 싶었던 일
    
    "나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노동자일 뿐 재벌이 아니다.”
    그가 자주 했던 이 말은 언뜻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평생 그의 심중 깊이 자리 잡았던 노동이라는 가치에 대한 숭상,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동류의식이 배어있는 말이다. 
    실제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것이 인쇄물이든 구두 보고든 ‘재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 역정을 내곤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굶주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병들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것이고 그 다음이 똑똑한 자식을 돈이 없어 못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이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죄다. 
    이것이 방치되면 그런 사회에서는 결국 돈 있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온전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려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해 주어야한다. 
    이것은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책무다.”
    그가 틈 있을 때마다 한 말이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해 봤고 다니던 보통학교에서 음악을 빼 놓고 일등을 했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어 뼈가 채 여물기도 
    전에 아버지를 따라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해 본 그의 말이라 각별한 울림이 느껴진다.
    식구들이 비를 가리고 살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자식들 세 끼니를 굶기지 않을 수 있고 학교에 갔던 애들이 월사금을 못내 집으로 쫓겨 오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해뜨기 전에 일터로 나가 달 보며 집에 오는 일자리라도 감지덕지하던 현실이 우리의 60~70년대 형편이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 형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박봉을 받으며 수출 공장에서 봉제공장에서,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해외 공사장에서 땀 흘려 일하며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경제도 성장했고 세상도 바뀌었고 자신의 권리와 몫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수출 주도 성장정책 아래 국제 경쟁력에 턱없이 못 미치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임금과 처우 면에서 계속적으로 그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노사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욕구 표출은 억압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 평화시장 봉제공이었던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 터졌고 1974 년엔 밀린 임금을 떼어먹고 외국으로 달아난 악덕 사업주로부터 임금을 
    받아 달라고 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하던 어린 여공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한명이 추락사한 소위 YH사건이 발단이 된 김영삼 제명 파동, 
    그리고 이것이 도화선이 된 부마 민중항쟁 확산은 끝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 사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사회안정 유지라는 명분으로 정치 탄압과 함께 노동계의 목소리도 억압하는 정책을 견지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끝나가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같은 군부를 기반으로 재집권을 노리는 노태우 세력은 6·29 민주화 선언으로 국민에게 어필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신군부 강압 통치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의 욕구는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과격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거의 모든 사업 현장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오랫동안 억압, 밀봉 되었던 욕구와 의사 표출은 그만큼 그 반동의 강도가 컸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여러 산업 현장이 불타고 있었다.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쟁의 형태는 많은 경우 노동 쟁의의 본질과 목적을 벗어나고 있었다. 경인 고속도로 가도의 공장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 xxx 사장아 너 죽고 나 죽자!”라는 표어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6.29 민주화 선언을 내걸고 집권한 세력은 그 정신을 견지 한다며 국가적인 경제 붕괴 위기 상황에서도“노사문제는 노사 스스로가”를 되뇌며 뒷짐 진 채 방관하고 있었다. 중소기업 사주들의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 사업장의 생산 시설의 파괴는 물론 당장 수출 납기를 지키지 못하게 된 대기업 총수들로 구성된 전경련 회장 단의 위기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거의 매일 회장단이 모여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으나 상황을 종합해보는 일 외엔 정부의 공권력 개입이 배제되는 상황에서 아무리 힘 있는 대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일지라도 쟁의 현장의 폭력적 상황은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선 상태였다. “정부가 뒷짐 지고 있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산업현장이 파괴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 어떤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과거 일본이 쟁의현장 불법폭력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대기업들이 일종의 자경단 같은 것을 만들었던 일이 있는데 우리도 그런 방안을 모색해봅시다.” 자기 사업장의 심각한 사태를 울먹이며 설명하던 한 재벌 총수가 격정 끝에 낸 제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노사관계 역사와 경제사에 큰 오점을 남길 수 있었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김 회장, 아무리 지금 상황이 급박해도 그건 위험한 생각이오. 지금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더 인내하며 멀리 봅시다.” 원로급 총수들의 신중론으로 그 안은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 최대 규모 노동현장인 현대 중공업 울산 조선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현대 조선소의 격렬해지는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은 전국적인 사태의 가늠자 격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조선소 임원들과 사장이 앞서서 수습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울산 현대중공업 노사분규./조선일보DB

    정회장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군중 심리에 휩싸여 이성적인 대화와 통제가 어려운 시위 현장의 위험성을 들어 모두 만류했으나 철저한 현장주의자인 정회장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수 천 명의 시위노동자들과의 직접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라 강당같이 생긴 대형 작업장 건물 내에서 일정 기준을 정하여 대표들을 들어오게 한 다음 얘기를 시작 하려했다. 그러나 건물 밖의 수천 명 시위자들은 “밀실 야합 반대”를 외치며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서 전체를 상대로 얘기할 것을 외쳐대었다.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 급조된 연단에 섰다. 황급히 마련한 마이크와 스피커 성능도 문제였지만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제가끔 구호와 함성,야유를 외쳐대는 수 천 명 시위 노동자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해 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정회장은 대책 없이 수 천 명의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위기감에 겁에 질려 정회장을 보호하려는 몇 명의 조선소 간부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큰 파도 앞의 갈대와 같이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현대 조선소의 노사 대화보다, 당시 이미 70대 중반에 들어선 노구라 할 수 있는 정회장 신변의 안전이 전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중요 TV와 라디오가 상황을 생중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사태가 거의 4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행히 시위 노동자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틈을 타서 정회장은 현장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정회장이 아무리 건강해도 그 연세에 4시간 동안이나 선채로 흥분한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갇혀 있었으니 심신이 탈진 상태일거다. 아마 어디 병원에라도 가서 몇 일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뉴스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특히 전경련 임원들은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을 빗나가는 완전한 기우였다. 상경한 정회장은 그날 저녁 전경련 명예회장 자격으로 당시 현직 회장이었던 구자경 회장을 비롯하여 전경련 사무국 임원회를 소집하여 대책논의에 들어갔다. 그의 심신의 상태와 표정은 바로 몇 시간 전 그런 일을 겪었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진압작전을 펴 진입한 경찰./조선일보DB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한참 구호와 함성을 듣고 있자니까 한 순간 나도 머리띠 두르고 그 친구들 사이로 내려가 함께 하늘로 주먹을 뻗으며 구호와 함성을 지르고 싶어지더라고. 원래 내가 노동자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봐. 그런데 나는 누구를 향해서 구호를 외쳐대야 하나 생각하니 안 되겠어. 그래서 그만 두었어, 하하하!” 회의 중간에 느닷없이 던진 그의 말에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 태연히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할 말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뜻 수긍이 안가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노동에 대한 경외심과 노동자들에 대한 속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부두 노동자로 건설 현장 노동자로 무거운 돌짐을 지고 가파른 비계를 오르며 허리가 휘는 노동을 해봤던 경험을 고난의 시기로 기억하기 보다 노동과 땀의 참된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했던 값진 수양의 기회로 회고하며 흡족해 하였다. 따라서 의외로 들리는 그의 말에는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햇볕에 그을고 땀 맺힌 모습의 현장 노동자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과 동료 의식이 깊게 배어있는 것이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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