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이봐 해봤어?'

13 통일에 대한 갈망과 집념 (下)

浮萍草 2014. 6. 9. 10:33
    고르바초프 만나 북한 경유하는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유용성을 역설
    한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통천은 그에게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채 뼈가 굳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했던 만감이 서린 고향
    이다. 
    그 곳은 그가 평생토록 그토록 추모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과의 어린 시절의 애절한 추억이 서린 영원한 그의 영혼의 고향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면할 수 없는 배고픔이 싫어서 떠났던 고향이지만 분단되어 맘대로 갈 수 없는 곳이었기에 더욱 안타깝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고 억만장자가 된 그는 어린 시절 시골 초가집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 찐 감자를 으깨서 고추장을 넣고 썩썩 비벼먹던 일을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하면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고향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는 굶주리고 헐벗은 가난한 북한 동포의 실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유난히 가슴 아파했다. 
    그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헌신할 사명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정 회장은 남한의 정부나 정치인이 아니고 개인 경제인 자격인 정 회장 자신이 북한의 권력층에게 가장 정치적 부담이 적은 대상일 것이라는 데 착안했다. 
    또한 그의 고향이 이북이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북한 경제문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실질적으로 기여를 할 가능성이 높은 인사로 
    그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정 회장은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중점적으로 몇 가지의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금강산관광 개발사업이었다. 
    금강산은 그의 잊지 못하는 고향일 뿐 아니라 세계에 드문 명승지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타당성 못지않게 통일분위기 조성을 위해 반드시 개발해야 할 중요한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사업임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관광사업은 사업의 채산성 측면만 가지고 그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20일 금강산 입구의 목란관 앞에서 친척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 회장이 대북경협에 가졌던 또 다른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을 경유하며 가깝게는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그리고 멀리는 소련대륙을 횡단하거나 중국대륙을 횡단하며 옛 실크로드를 거치는 유럽대륙으로의 무역 물류 철도 수송로를 여는 것이었다. 시베리아는 우리가 절대로 필요한 원유,가스,임업자원과 광물의 보고이다. 북한을 육로로 경유하여 남한으로 이들 자원의 수입로를 확보하는 것은 한국경제에 큰 활력을 가져다 줄 계기가 될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지도자 고르바체프 같은 인사들도 열심히 만나고 다녔다. 현재 바다로는 부산을 출발해서 유럽 중심의 독일이나 프랑스까지 약 2만km 거리에 27일이나 걸린다. 그러나 철도로 북한을 경유해서 중국이나 소련을 횡단할 경우 그 운송거리가 절반가량 줄어 시간이 약 10일로 단축되며 컨테이너당 수용비용도 해로보다 반 이하로 줄어들어 우리 수출이 그만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실현하는 데 강한 의욕을 가졌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 회장은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을 얻어 적극적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비료와 곡물 지원 우호적 관계 개선을 위한 일부 현금 지원, 개성공단,경수로 프로젝트 남북 연결 경의선 철도 복원 금강산관광 등이 햇볕정책 안에 포함되었던 정부의 경제 지원 정책이었다. 이러한 대북 경제 지원은 특히 국내 보수 진영으로부터 ‘퍼주기 식’ 지원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요즈음 들어서도 북핵 문제가 더욱 심화됨에 따라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타당성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남북한 관계의 현실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정 회장 평생의 집념과 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동안 남북문제에 대한 각계의 견해가 대단히 혼란스런 양상을 보여왔다. 진보와 보수,그리고 여러 계층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평가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통일이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독일 드레스덴 연설은 이런 흐름에 중요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혼신의 열정을 남북간 경제협력 사업들을 내세워 통일사업에 쏟아 부었던 정회장도 유한한 생명의 천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많은 미완의 과제를 남긴 채 2001년 타계했다. 그리고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으로 정 회장과 호흡을 같이 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이러한 남북관계 기조를 이어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제는 다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앞서 과거 김대중 정부와 합세하여 민간 경제계의 대북 사업을 주도하였던 현대그룹은 그 후 새로 들어선 정부로부터 화를 모면할 수 없었다. 특히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전달되었다는 지원금의 적법성 문제가 온통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그룹을 이어 받았던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이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 사옥에서 투신자살 하는 비극이 발생하여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정몽헌 회장의 극단의 선택에 대한 시비를 떠나 정회장은 그의 아들마저도 그가 말년 열정을 불태웠던 남북 통일사업이라는 제단에 바치게 된 셈이 되었다.
    ▲ 북한에서 김정일을 면담하고 돌아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11월 2일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DB

    그러면 이토록 ‘무리’에 가까운 열정을 바치고 뼈아픈 상처를 감내하면서까지 남북경협사업에 몰두한 정 회장의 심중에는 어떤 의지와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 회장은 나라의 법은 원칙적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민족적 숙원인 남북통일이라는 진로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뛰어 넘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측근에 비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던 실정법이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시대의 사상가나 정치 세력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해 집단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시대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서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 역사는 이러한 것들에 의해 장애를 받기에는 너무나 절실하고 지고하며 영속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시비에 대한 평가를 최종적으로 후대와 역사에 맡기고 그의 신념을 그 특유의 행동력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을 위한 길은 앞으로도 험난할 것이다. 그간 우리 민간 경제계에서는 다른 누구도 엄청난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는 북한 과의 경제협력 사업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정 회장은 과감하게 앞장서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 많은 시련과 영욕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지고한 과제인 통일로 가는 길에 그가 생전에 깔아놓은 유형 무형의 발자취는 앞으로 통일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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