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이봐 해봤어?'

15 대선 출마 (下)

浮萍草 2014. 6. 23. 11:18
    정주영 회장이 대선때 내건 획기적 주택문제 해결 공약
    주영 회장이 1992년 국민당을 새로 창당하고 대통령 출마를 공표하자 예상대로 한국사회는 들끓었다. 
    그의 나이 78세의 일이었다. 
    그가 그의 일생에서 추진했던 획기적인 사업을 발상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족과 형제들을 포함해서 그의 주위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은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부와 권력을 모두 탐하는 노욕이다”“노망의 발로다”“기업 성공 경험만 믿고 오만해서 비롯된 돌출 행동이다.”
    ▲ 1992년 3월 28일, 당시 정주영 대표 등 국민당의 14대 총선 당선자들이 당선자대회에 앞서 당사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를 아끼는 지인들의 만류도 대단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성공했는데 왜 그 나이에 편한 여생을 보내야지 그 고생의 길을 택하느냐?”“만약 실패하면 현대그룹이 당할 보복을 어떻게 견뎌 내려하느냐?” “아무리 정 회장이 건강해도 건강이 걱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가야 할 길을 간다는 결심을 했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반대 설득 논리다. 그는 개의치 않고 그의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그의 신생 국민당은 창당 45일만에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득표율 16.3%인 400만 표를 얻어 31명의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뿌리가 깊이 내린 기존 정치권의 이해관계,지연,동서 지역감정이 함께 얽혀있는 두터운 벽을 극복하는 데는 국가 장래를 위한 타당한 명분만으로는 정치 아마추어인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기성 정치권은 “장사해서 부자가 된 그에게 정치권력까지 주어서는 위험하다”라는 주장과 반 기업정서를 조화시켜 유권자들을 이간시켰다. 그리고 그의 실제 건강과는 무관하게 그의 고령을 들어 노망든 노인으로 매도하는 흑색선전이 불행하게도 많은 유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결국 그가 품었던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이상과 포부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한 그 특유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국민들에게 이해되고 채택되기에는 너무 앞서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80년대에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그들을 직접 겨냥하여 늘 규제와 관피아의 적폐를 질타했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집단이 능력과 전문성을 떠나 논공행상 형태의 나눠먹기식 요직 배분에서 오는 부조리를 기회 있을 때 마다 질타하며 이를 위해 정치를‘정치꾼’ 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도 경제 발전과 운용효율을 위한 당위성보다는 민간 경제계에 대한 관이나 정치권력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를 유지 하기 위한 요소가 많다고 볼 수 있다.
    ▲ 1992년 6월 25일 오후, 당시 김대중 민주당 대표, 정주영 국민당 대표가 국회 귀빈실에서 열린 양당 첫 대표회담을 가졌다./조선일보DB

    엄청난 파워와 기득권의 연대화로 반세기 이상 동안 뭉쳐진 관피아의 적폐는 이러한 토양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이의 혁파는 그야말로 혁명에 준하는 거국적 결의가 없이는 음양으로 막강한 저항에 부딪쳐 유야무야 되기가 십상이다. 이러한 규제의 폐해를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체험한 그에게 이의 타파는 가장 우선 순위가 높은 목표 중의 하나였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이러한 규제와 적폐에서 비롯되는 간접비용 제거와 토지 공급제도를 혁신하여 서민아파트 반값 공급 계획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 하기도 했었다. 결국 정회장이 그의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점철된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 선택한 대통령 출마라는 대 모험은 그가 외면할 수 없었던 운명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옳다고 생각하고 그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섰을 때 상식이나 세인의 평가가 두려워 행동에 옮기는 것을 외면해 본 일이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일관되었던 행동 선택의 기준은 그것이 쉬운 길이냐 어려운 길이냐가 아니라 그 것이 해야 할 일이냐 아니냐 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고 상황을 직접 주도하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그가 가졌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해봤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정 주영이었던 것이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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