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34 '서유기'의 원류를 만나다< 안서3>

浮萍草 2014. 6. 19. 09:44
    '서유기' 손오공의 모델은 '털북숭이' 西域人?
    ㆍ협곡 속에 숨어 있는 ‘유림굴’
    ▲ 협곡속에 있는 유림굴 전경
    서에서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 중 하나가 유림굴(榆林窟)이다. 유림굴은 쇄양성과 함께 중국의 국가급 문화재이다. 유림굴은 유림하 양쪽 강변의 절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돈황의 막고굴과 같은 불교 석굴이다. 만불협(萬佛峽)이라고도 불린다. 계곡이 보이는 자갈밭에 주차하고 계단을 통해 유림굴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면 평지에 ‘유림굴’이란 표지석만 보일 뿐이니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인 관광객을 실은 관광버스 한 대가 정차하자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내린다. 그 중 몇몇 아주머니들이 사방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유림굴을 찾는 눈치다. 표지석 뒤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안 뒤에야 표지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 허허벌판에 덜렁 표지석만 하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표지석이 유림굴로 통하는 입구이다. 발아래로는 유림하가 수천 년을 헤치고 간 길이 협곡으로 변해 있다. 대자연이 만든 길옆으로 인간이 석굴이란 집을 지은 것이다. 자갈과 흙이 뒤섞인 계단 벽을 보니 오래전에 대홍수가 있었던 것 같다. 유림굴은 당나라 때부터 건설되어 오대,송나라,서하,원나라를 거쳐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꾸준히 부처상을 모신 감실이 석굴 속에 만들어졌다. 유림굴에는 모두 42개의 석굴이 있는데 동쪽 절벽에 32개 서쪽 절벽에 10개다. 그러므로 유림굴 관광은 동쪽에 집중된다. 안내인을 따라 콘크리트로 계단과 난간을 만든 석굴의 입구로 향한다.
    ㆍ佛畵, 문명교류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상징
    ▲ 유림굴 외부

    중요문화재가 모두 그렇지만 이곳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에 카메라를 보관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아쉬워할 것이 못 된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촬영으로 훼손시켜서야 하겠는가. 그 또한 욕심이다. 내 뒤로 이곳에 올 무수한 사람도 봐야 할 문화재임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석굴은 입구마다 문이 굳게 잠겨 있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고 하지만 관람객이 임의대로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안내원이 관람 가능한 석굴을 정해 안내할 때만 열고 닫는다. 안내원을 따라가는 길. 그는 제11호 굴부터 안내하기 시작한다. 사하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18나한상이 살아있는 듯하다. 제12호 굴은 청나라 때 중수한 것인데 벽화는 오대의 것이라고 한다. 나한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이 인도인이나 서역인이 아니라 영락없는 중국인이다. 당시 중국불교가 오랜 교류를 통해 서역불교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부처의 모습을 그린 벽화에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빠질 수 없다. 문수는‘지혜’를,보현은‘실천’을 주관하는 보살이다. 지혜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깨달음은 자각이다. 그러나 자각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심적․정신적 아픔을 수반한다. 살아가면서 아프지 않은 적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렇다고 모두 지혜가 될 수는 없다. 지혜는 수없는 아픔 중에서 걸러낸 수정과도 같은 정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깨달음이 없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냥 지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식은 얼마나 필요할까? 사회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지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다. 살아가는 동안 지혜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지식은 지혜로운 삶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지혜 역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지식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선조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중시한 것도 지식을 통해 지혜를 쌓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덕인(德人)이 되려 했기 때문이리라.
    ㆍ‘서유기’ 손오공의 모델은 털북숭이 ‘서역인’
    ▲ 서유기 원류를 볼 수 있는 서하시대의 벽화

    제16호 굴의 벽화는 좀 특이하다. 9세기 중반부터 서하에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한 귀의군 정권의 제2대 절도사인 조의금(曹議金)과 부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귀의군 정권도 당시에 성행한 불교를 숭상하고 불사 건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이 공양 벽화는 귀의군 정권의 사회와 문화 복식 등을 알 수 있는 연구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제6호 굴은 유림굴에서 가장 큰 대불상을 모신 곳이다. 당나라가 가장 융성하던 때에 만든 것으로 높이가 약 25미터에 이른다. 대불의 발과 얼굴 쪽에 각각 입구를 내었는데, 이곳에서 예불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유림굴을 대표하는 제25호 굴 역시 당나라 융성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서방정토도’와 ‘미륵도’는 당대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데 이는 돈황의 막고굴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유림굴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서하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제2호 굴이다. 이곳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서하 벽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당나라 때 서화론가인 장언원(張彦遠)이 쓴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이 책은 중국의 저명화가들에 대한 전기와 회화기법을 정리한 것인데 중국의 회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필독서이다. 수월관음도의 오른쪽 아래에는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현장이 손을 합장하고 관음에 예불을 올리는 ‘현장취경도(玄奘取經圖)’가 함께 그려져 있다. 당대의 시인인 백거이는 이를 보고 경탄하며 시를 지었다.
        청정하고 맑은 물 위淨淥水上 빛 속에 없는 무량광으로虛白光中 오로지 그 바탕만을 볼 뿐이니一睹其相 수많은 인연도 다 소용없구나萬緣皆空

    현장의 모험담을 그린 현장취경도에는 현장과 그의 제자인 원숭이 그리고 백마가 담겨 있다. 오승은의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과 사오정,저팔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이 현장취경도는‘서유기’를 이룬 주요 소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제3호 굴에 있는 ‘보현보살도’의 하단 부분에도 그려져 있다. 현장을 따르는 행자의 모습은 원숭이와 흡사하다. 입은 튀어나와 있고, 머리와 팔은 온통 털북숭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원숭이를 표현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현장을 따르며 길 안내를 한 자는 서역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이 털북숭이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게 나중에 ‘서유기’에서 원숭이 모양의 손오공이 된 것은 아닐까? 중국의 저명한 돈황학자인 단문걸(段文杰)은 안서 유림굴과 동천불동에 있는 현장취경도의 발견은 세계적으로 진귀한 것이며 불교사상의 변화와 중국-인도 간 문화 교류의 역사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서유기’가 완성되어 간행되기 300여 년 전에 이미 주요 인물의 예술적 형상이 창조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했는데 예술적 형상이 아니라 원래의 생김새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림굴에서‘서유기’의 원류를 생각할 줄이야. 인류의 교류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현장취경도를 보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길은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다.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형상을 남기니 새로운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정직과 신의에 바탕을 둔 창의적인 상상력. 실크로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길 위에 남기는 것이다.
    ㆍ草書의 大家 장지(張芝)의 흔적을 찾아서
    ▲ 안서는 초서의 대가 장지의 고향이다

    해가 지기 전에 안서 시내로 가기 위해 길을 다잡는다. 어느덧 황량한 사막이 사라지고 초원과 가로수가 보인다. 이정표가 없어도‘오아시스의 도시’안서에 왔음을 알 수 있다. 길옆의 천막가게에는 수박과 멜론을 팔고 있다. 과일도 먹고 쉬어갈 겸 잠시 멈춘다. 차에서 내리자 서로 자기네 것을 맛보라고 난리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깎아주는 과일을 한입 물었다. 달다. 아니 달다 못해 꿀맛이다. 그야말로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 한 조각을 더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아주머니 얼굴이 환하다. 큰 것으로 집었더니 그것보다는 좀 작은 것이 더 맛있다고 골라준다. 아주머니가 골라준 것도 3명이 먹을 만하다. 갈증도 풀고 요기도 되니 간식으로 이만한 게 없다. 안서 시내로 접어들자 민가가 촘촘하다. 대문 위에는 큼지막하게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이라고 쓴 집들이 보인다. 우리는‘성공’하는 것을 좋아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만사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크게 일어나는 것을 좋아해 ‘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시내로 들어서니 곧게 뻗은 대로변에 깃발이 쉼 없이 연이어 걸려 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치다가 계속 보이는 터에 차장으로 스치는 문구를 자세히 살펴본다. ‘초성고리(草聖故里)’라 쓰여 있다. “아, 초서의 대가 장지(張芝)의 고향이 이곳이었구나.” 장지는 중국 서법사(書法史)상 초서의 대가다. 그는 한나라 말기인 헌제(獻帝)시대의 사람으로 지금부터 2,2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장환(張奐)으로 흉노를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을 지냈다. 부친이 탁월한 무인이었지만, 아들인 장지는 서법 학습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당대 저명한 학자이자 서법가인 최원(崔瑗)과 두조(杜操)의 필법을 익혔다.
    ㆍ고사성어 ‘座右銘’의 탄생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좌우명(座右銘)을 말한다. 삶에 있어서 귀감이 되는 문구를 항상 옆에 두고 그 뜻을 되새기며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이런 좌우명은 최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스스로 지켜 행하여야 할 내용을 칼로 새겨 자신의 책상 오른쪽에 놓고 평생 잊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좌우명’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최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無道人之短 나의 자랑도 떠들지 마라.無說己之長 남에게 베푼 것은 잊어버리고施人愼勿念 세상의 명예를 좇지 마라.世譽不足慕 오직 어짐으로서 기강을 삼고唯仁爲紀綱 마음을 다잡은 후 행동하라.隱心而後動 비방하면 어찌 상처가 없겠는가謗議庸何傷 명분을 세우고 잘못을 하지 말며無使名過失 어리석음을 알고 성인의 도를 배우라.守愚聖所藏 진흙 속에 있어도 물들지 말고在涅貴不淄 어둠 속에서도 빛을 품어라.曖曖內含光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이니柔弱生之徒 노자는 굳세고 강한 것을 경계했다.老氏誡剛强 어리석게 행함에 뜻이 있고行行鄙夫志 유연함에 오히려 헤아릴 수 없다.悠悠故難量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愼言節飮食 족함을 알아 상서롭지 못함을 이겨내고知足勝不祥 행동함에 있어 항상 떳떳하게 하면行之苟有恒 오래도록 저절로 향기가 나는 법이다.久久自芬芳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이 물음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시류에 욕심내지 않으며 옛 성현들이 몸소 체득하여 남긴 명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것. 이것이 진정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되는 삶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이런 삶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지언정 정작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이 비일비재하다. 삶의 지향점이 다른 까닭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같은 좌우명을 실천하는 삶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듣는다. 신체와 생활이 모두 자본의 향기와 맛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 장지의 필체

    최원은 서예도 뛰어나 특히 초서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다. 그의 필법은 이런 좌우명에서 비롯된 것인데 초서를 쓸 때에도 나름대로 법칙을 새겨놓았다. “획을 꺾을 때는 붓을 옮기지 않는다. 내려 보고 올려보아도 예의에 맞아야 한다. 생동감이 넘치며 기묘한 글씨를 쓰려면 한 획일지라도 옮기지 않고 써야 한다.(終而不離. 俯仰有儀. 放逸生奇, 一劃不可移.)” 장지는 두 대가의 필법을 익혀 자신만의 비법인 ‘일필서(一筆書)’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서법가들은 장지를 일러 ‘초서의 성인(草聖)’이라고 부른다. 서성(書聖) 왕희지조차도 일생 장지를 존경하였으며 장지의 필법을 배우려고 애썼다. 장지는 후한 말기 전란의 시대를 살았기에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며 서법에 매진하였는데,그의 이런 정신과 품격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Premium Chosun ☜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