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30 만리장성 서쪽 끝 '가욕관'에 오르다<가욕관1>

浮萍草 2014. 5. 16. 22:18
    서세동점(西勢東漸) 이전 동세서점(東勢西漸) 있었다
    리장성의 서쪽 끝은 가욕관이다. 
    아침 일찍 시내를 나서니 만리장성의 고장임을 알리는 듯 도로변에는 가욕관과 장성 풍경 그림이 화려하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것도 잠시. 거리는 온통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이 모두 같은 회사로 출근한다. 
    바로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회사인 주천철강공사(酒泉鋼鐵公司)다. 
    1958년에 세워진 이 공사는 철강 콤비나트를 형성하며 거대한 철강 공단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발전 속도가 빨라 1965년에는 가욕관 시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철강회사의 이름은 당시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ㆍ가욕관,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 도시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이는 거센 황토 바람이 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철소의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탓이다. 제철소에는 모두 4만여 명이 근무한다고 하니 아침 출근길의 광경이 실감 난다. 근로자가 4만여 명이면 그 가족들 또한 몇만 명일 터. 가욕관 시는 이제 만리장성의 서쪽 끝 변방에서 벗어나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 가욕관 입구

    . 수천 명의 노동자가 밀물처럼 제철소로 몰려드는 길을 빠져나와 가욕관으로 향한다. 시내를 벗어나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잿빛 하늘도 아랑곳없이 제철소에서는 검은 연기를 펑펑 쏟아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공해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아 호흡이 저절로 멈춰진다. 하지만 굴뚝산업으로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자는 식으로 환경문제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제재할 마음은커녕 더 독려할 판이니 말이다. 가욕관은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 쓰촨성 서안에서 감 숙성의 이곳까지는 약 1100km 협곡인데 가욕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좁은 곳에 있다. 기련산에서 뻗어 나온 문수산과 흑산 사이 15킬로미터의 좁은 폭에 있는 가욕관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당당한 위용에 압도된다. 고비사막을 바라보며 좌우 산맥 사이를 굳건히 가로막는 가욕관은 한눈에도 철옹성임을 알 수 있다.
    ㆍ만리장성 서쪽 끝 ‘天下第一雄關’에 오르다
    가욕관이라는 이름은 가욕산에서 온 것이다. 가욕관 성루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는 명칭답게 그 자태가 웅장하다. 성루에 올라 사방을 살펴본다. 그 위세가 마치 홀로 장판교를 막아선 채 조조군을 호통치는 장비와도 같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에서부터 북쪽의 하늘을 치받으며 내달려온 톈산산맥과 난주에서부터 이어 달려온 기련산맥이 만나 바람 길목도 안 되는 천하의 요충지에 성벽을 틀고 서 있기 때문이다. 5,0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산맥들을 마주 보고 있는 가욕관은 분명히 천하의 웅관임에 틀림없다. 청나라 때의 시인 악종기(岳鐘琪)도 가욕관 성루에 올라 감회를 읊었다.
    ▲ 가욕관에서 바라본 만리장성

    주천은 지금도 중요한 요충지酒泉今重鎭 천연의 요새로 예부터 이름 높았는데,天險古名州 들판엔 가축들뿐 인가는 없어도牧野无新幕 변방을 방어하는 가욕관은 굳건하다네.籌邊有舊樓 마른 바람은 성벽에 부딪혀 되돌아 날고風旋沙磧動 하늘은 바닷가의 구름만 띄우는데天接海雲浮 장안으로 가는 길 돌이켜보매, 回首長安路 봉화연기 만 리 가을을 태우네. 烽烟萬里秋
    가욕관은 만리장성과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곳으로 예로부터 교통과 군사요충지로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한 것은 명나라 때인 14세기 이후다. 가욕관의 성벽은 벽돌을 쌓아 만든 외성과 흙으로 만든 내성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방위체제에 따라 건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심성인 내성은 1372년에 명나라 대장군 풍승(馮勝)이 당시 하서주랑까지 세력을 뻗친 몽골군을 토벌하고 재건축한 것이다. 가욕관은 이중 성벽, 옹성과 나성, 3개의 성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어가 주목적이니 설계부터 치밀하고 공사도 매우 견고하게 하였다. 성루의 성문은 돌을 깎아 만들었고 성벽은 황토를 잘 다져서 쌓았다. 황토도 엄선하여 햇볕에 말려 만든 가루를 체로 거르고 찹쌀가루를 섞어 성벽에 발랐다. 이런 수고로움 덕분에 가욕관은 수백 년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하고 튼튼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가욕관 외성의 동문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석비(石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략 3미터쯤 되어 보이는 석비에는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일필휘지한 행서체 글씨가 장쾌하다. 이 비는 청나라 때인 1809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숙주(肅州) 총병(總兵)인 이연신(李廷臣)이 새벽에 가욕관을 시찰하다가 그 웅장함에 매료되어 즉석에서 4글자를 썼는데 후에 이를 새겨 비로 만든 것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문창각(文昌閣)과 관제묘(關帝廟),희대(戱台) 등 부속건물이 눈에 띈다. 모두가 명나라 때 지어진 것인데 가욕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을 자랑하는 문창각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한다.
    ▲ 천하웅관비

    ㆍ도교와 관우, 천하웅관을 지키는 民과 軍의 힘
    문창각은 도교적인 건물이다. 문창(文昌)은 북두칠성을 이루는 6개의 별을 합해 문창궁(文昌宮)으로 부르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문운(文運)과 벼슬운을 관장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이라는 믿음 으로 발전한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과거(科擧)는 송나라 때 이르러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러자 합격을 열망하던 과거 준비생들은 자연스럽게 신을 받들게 되었고 원나라 때에 이르러 문창제군은 국가로부터 과거신(科擧神)으로 책봉된다. 원나라도 과거를 중시하였고, 민간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의 6번째 별을 녹성(祿星)이라 부르는데,공명(功名)과 녹봉(祿俸)을 관장하는 별이다. 고대 봉건사회에서 선비들의 출세 길은 오로지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문장을 짓는 시험이기 때문에 선비들은 녹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녹신은 모든 선비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신(文神)이 된 것이다. 관리가 되어 국가로부터 받는 급여를 녹봉(祿俸)이라 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생긴 것이다.
    ▲ 관제묘(왼쪽)와 문창각

    그런데 언제나 전시체제를 유지하며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변방국경지대에 어째서 문창각이 있는 것일까? 바로 옆에 세워진 관제묘가 그 답을 제시한다. 관제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이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 최대의 용맹을 떨친 장수다. 또한 1800여년간 내려온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함께 최고의 주인공으로 꼽힌다. 관우가 평생을 중시한 것은 장수로서의 충의(忠義)이다. 이는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이 혼란을 수습하는 방책으로써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우 숭배사상이 발전하였고 그 결과 관우는 마침내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다. 무신 관우의 영험을 받아 전쟁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제묘를 만든 것이고 그와 짝을 이루는 문창각은 도교 숭배가 일반적이던 당시에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일체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인 관우에 대비하는 문신은 공자다. 그런데 관제묘 옆에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대신 문창각을 세운 것은 바로 도교신앙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 때는 문(文)을 숭배했기 때문에 학문 또한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 있었으리라.
    ▲ 졸고있는 장수를 표현한 유격장군부

    희대(戱臺)는 공연장이다. 전장에서의 공포와 고독,우울함 등을 없애고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근심과 걱정을 없애고 흥을 돋우는 것이다. 공연은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최고의 문화예술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공연이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단골 메뉴는 관우가 조조군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가족상봉의 염원을 뜨거운 눈물과 함께 쏟아냈을 것이다. 무대 앞 공터에 서니, 당시 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탄식했을 병사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양쪽 모퉁이의 대련(對聯) 글귀가 나그네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오매불망 고향 탄식은 무대 위에 넘쳐나고 离合悲歡演往事 세상사 인간 됨됨이도 확실하게 알 수 있구나 愚賢忠佞認當場
    ㆍ서세동점이 있기 전에 동세서점이 있었다
    가욕관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광화문(光化門)이다. 반대편 서쪽에는 유원문(柔遠門)이 있다. 문 위에는 각각 성루가 있는데 성벽이 건축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496년에 축조한 것이다. 동쪽 문이 광화문인 것은 동쪽 즉 중국으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오른다는 의미다. 서쪽 문은 어떤 의미일까? 부드러움이 멀리 이어진다는 말인데 이는 중화문명이 서역의 모든 지역에 전파되기를 바라는 뜻이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있기 오래전에 이미 중국은 동세서점(東勢西漸)을 염원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실크로드의 핵심은 ‘비단’을 수출한 중국이었기에 이미 동세서점이 이루어진 것이고 명나라 때는 이를 영원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발전한 서구문명은 급기야 중화문명으로 대표되는 아시아를 장악하게 되었으니 실로 서역 멀리까지 날아간 상서로운 기운이 부메랑이 되어 기세등등하던 중국의 발등을 찍은 것이다.
    ▲ 돌길이 바퀴자국으로 패인 가욕관 성문

    광화문으로 들어가니 유격장군부(游擊將軍府)가 있다. 이는 가욕관의 지휘소로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적의 침입 시 방어를 지휘하는 것은 물론 이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상인과 여행자들을 검사하고 서역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지휘소를 꾸며놓았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밀랍으로 만든 인형의 모습이 흥미롭다. 장교인 듯한 자가 피곤함에 겨워,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조는 모습이 너무도 생동감이 넘친다. 뒤쪽 벽에는 ‘가욕관 수비도’라는 지도가 붙어 있다. 가욕관이 천하제일의 철옹성인 까닭에 졸고 있어도 걱정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중한 업무에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푸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점심 후 나른함을 못 이겨 낮잠에 빠진 것일까? 현실적인 모습을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오가는 이들마다 한 번씩 더 살펴보게 한다. 두 번째 성루가 있는 유원문에 들어서니 성벽으로 오르는 경사로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수레도 오를 수 있는 넓이다. 그래서 일명 마도(馬道)라고 부른다. 누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널따란 사막이 끝없이 광활하고 그 너머로 희미한 만년설산이 구름인 듯 아득하다. 그 어떤 용감한 병사라 하더라도 저처럼 험준한 산맥을 넘어올 수 없고 모래폭풍 거센 사막을 건너오기 어렵다. 설령,산맥과 사막을 헤쳐 나왔다 할지라도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높다란 가욕관을 보는 순간 기진맥진한 몸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거침없이 당당한 가욕관의 위용이다. 100만 대군이 와도 공략하지 못할 난공불락의 요새인 것이다.
    ㆍ벽돌 한 장에도 전설이 깃들고
    사람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 황무지 벌판.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스러져간 말발굽과 군사들의 함성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듯하다. 한참 동안 서쪽을 응시하다가 옹성 내부로 눈을 돌리는데 성벽 끝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벽돌 한 장이 달랑 놓여 있다. 무슨 벽돌이기에 한 장만 있을까. 알고 보니 전설이 담겨 있는 벽돌이다. 벽돌공이 가욕관을 설계한 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었는데 99만 9,999개였다고 한다. 벽돌공은 만약을 위해 1개의 여분을 포함해 100만 개의 벽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가욕관을 완성하고 보니 정확하게 벽돌 한 장만 남았다고 한다. 가욕관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만든 것인지를 재미있게 알려주는 이야기인데 사실 벽돌 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작업 중에 깨지거나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분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위의 말대로라면 공사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어야만 가능하다. 벽돌의 여분이 많으면 다른 곳에 사용하면 그만이다. 벽돌 한 장이라도 불량 내는 일 없이 어찌 공사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 가욕관 위용

    성루를 살펴보고 내려와 드디어 가욕관의 정문을 나선다. 관문은 마차 두 대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 돌길인데 바닥은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수레가 이곳을 지나갔기에 단단한 돌길이 마치 밀가루를 눌러놓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말인가. 하기야 서역으로 오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지나야만 했기에 각각의 사연을 담고 오갔을 수많은 역사가 저토록 깊고 선명한 자국을 남겨놓은 것이리라. 나도 수레자국을 밟으며 1,000년 전 순례자의 마음으로 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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