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31 동쪽으로 헤이룽장성~서쪽으로 신강성 하미까지라니! <가욕관2>

浮萍草 2014. 5. 22. 09:12
    萬里(만리)가 2만km? '萬里長城' 아니라 '五萬里長城' 만든 중국의 장성공정 해도 너무해
    ㆍ“長城의 확장은 中華魂을 높이는 것이다”
    다섯에 전쟁터로 출정하여 十五從軍征 여든 살이 되어서야 돌아오네.八十始得歸 동네 어귀서 마을 사람을 만나道逢鄕里人 우리 집에 누가 사느냐 물었더니家中有阿誰 멀리 보이는 것이 당신 집일 거라는데遙看是君家 소나무 잣나무 사이로 무덤만 이어있네.松柏塚纍纍 장성의 나라, 중국 중국의 역사는 장성의 역사다. 장성은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도구였다. 그리하여 성을 쌓고 성들을 이어 철벽의 울타리를 확장시켜 나갔다. 춘추시대인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장성은 그 길이만큼이나 기나긴 역사를 이어왔다. 그리하여 동쪽의 바다에서 서쪽의 모래사막까지 그야말로 거대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의 침략을 막았다. 거대한 장성을 지키는 것은 막대한 인원을 필요로 한다. 열다섯의 청년이 되면 언제 올지 모르는 전쟁터로 징집된다. 살아서 오기도 쉽지 않고 죽어서 고향에 묻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장성은 이렇게 장정들의 피로 세워지고 지켜진 것이니 장성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래서인가. 가욕관 안에는 장성박물관이 있다. 만리장성에 대한 중국의 생각이 궁금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 가욕관에 위치한 만리장성에 위용

    1988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중국 최초로 만리장성과 관련된 것만을 다룬 전문박물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중국의 혼(中華之魂)’이라고 새긴 비석이 톈산산맥 그림을 배경으로 우뚝하다. ‘위대한 장성’이라는 주제로 춘추전국시대부터 명나라 때까지 3000년 장성의 역사를 모두 4개의 시대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는데 모형과 도표, 사진 등을 적절히 활용 하여 많은 자료와 함께 장성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ㆍ고무줄처럼 뻗어가는 萬里長城 길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만리장성을 나타낸 지도가 이상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 아니라 국경지역인 단둥을 거쳐 헤이룽장성의 목단강까지 이어져 있다. 국경지역인 단둥에 있는 고구려 박작성은 명나라 때의 호산산성으로 그럴싸하게 둔갑해 있다. 그 앞에서는 중국인 가이드가 내국인들에게 장성의 길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모두가 동조하는 듯한 표정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장성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군사시설이다. 이는 고대의 여러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성들을 연결하여 장성을 만들게 하였다. 사마천의‘사기’‘몽념열전’을 보면 이렇다. “진나라는 천하를 병합한 후 몽념에게 30만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융적을 내쫓게 하여 하남(河南)을 차지한 뒤 장성을 쌓게 하였다.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는데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의 길이가 1만여 리가 되었다.”
    ▲ 중국이 새롭게 완성한 만리장성

    당나라 때 시인인 왕굉(王宏)은 ‘종군행(從軍行)’이란 시를 지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시황이 장성 삼천리를 쌓았는데秦王築城三千里 서쪽의 임조에서 동쪽의 요수까지다西自臨洮東遼水
    ㆍ遼水의 위치 변화로 고구려 강역이 축소되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삼천리라고 하니‘사기’의 1만 리 하고는 대단히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요수의 위치 때문이다. 고대 요수는 산시성(山西省)의 북쪽 대동(大同)시를 지나는 상건하(桑乾河)를 가리켰다. 하지만 욕심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인들은 점점 더 동쪽에 있는 강을 요수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때의 요수는 허베이성의 난하(鸞河)였고 요(遼)나라 때는 현재의 랴오닝성에 있는 요하를 가리키게 되었다. 수천 년에 걸쳐 중국의 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우리 고대사는 일방적으로 축소ㆍ왜곡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 식민사학자들이 이런 잘못된 역사를 앞장서서 가르쳤으니 역사 왜곡의 폐해는 실로 엄청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왜곡시킨 것일까?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고구려 영토에 대한 설명 중에서 아래처럼 서너 문장만 살펴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동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로는 요수를 건너 2000리에 이른다. 남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는 말갈과 1000여 리에 걸쳐 인접한다.” - ‘周書’, 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그 나라는 동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로는 요수를 건너 2000리에 이르며, 남으로는 백제와 접한다.” - ‘北史’, 其國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나라의 중심에 요산이 있으며, 요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 ‘南史’, 中有遼山 遼水所出 “고려는 본래 고구려다. 우임금이 9주로 나눈 땅 중에 기주에 속하였는데, 주나라 때는 기자의 나라였고 한나라 때에는 현토군이었다.” - ‘宋史’,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菟郡也
    ㆍ고구려의 강역은 허베이, 산시까지
    기주는 오늘날의 허베이성과 산시성 일대를 말한다. 기주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중심에 요산이 있고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요수라면 요수는 난하를 의미한다. 하지만 위 내용만으로는 난하가 요수임을 알 수 없다. 이를 입증하는 고구려 벽화가 있다. 평안남도 덕흥리에 있는 고분벽화에는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연회도가 그려져 있는데 유주자사 진에게 13개 군의 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장면이 있다.
    ▲ 송사 외국전에 기록된 고구려 영토
    그리고 태수들 13명의 소속이 적혀 있다. 연군(燕郡),범양(范陽),어양(魚陽),상곡(上谷),광녕(廣寗),대군(代郡),북평(北平),요서(遼西),창려(昌黎), 요동(遼東),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인데 모두 허베이성과 산시성에 있는 고대 지명들이다. 창려는 지금도 난하 하류에 남아 있는 지명으로 난하가 요수임을 증명 하는 귀중한 벽화다. 또한 요수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른다고 했으니“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대 요수인 난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가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가 중국 대륙의 한복판이었음이 이렇듯 명확한데도 식민사학자들은 잘못 꿴 단추를 끌러 다시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니 이를 보는 중국인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를 이롭게 전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니 말이다. 명확한 입증자료가 있음에도 우리의 고대사는 현재의 지명에 사로잡힌 채,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바로 매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망한다. 그런데 과연 1만 리의 장성을 쌓을 수가 있을까? 만리장성이 전국시대 7국의 성들을 이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성과 성 사이를 잇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 양제(煬帝)가 100만 명의 장정을 동원해 내몽고의 유림(楡林)에서 자하(紫河)까지 장성을 쌓게 하였다가 열흘 만에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반 이상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성을 쌓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동으로 가면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다. (莫向遼東浪死歌)”라는 처참한 말이 생겨났겠는가. 성을 쌓는 곳 築城處 천만 사람 일제히 달구질 소리 울린다.千人萬人齊把杵. 단단히 다졌는지 거듭 성벽을 찔러보는데 重重土堅誠行錐 채찍 든 군인감독은 더디다고 독촉만 한다.軍吏執鞭催作遲. 그때부터 일 년 동안 깊은 사막에서 來時一年深磧裡 짧은 옷마저 다 해지고 물이 없어 목이 타고 盡著短衣渴無水. 기운 빠져 달구질 소리 잦아드는데 力盡不得拋杵聲 그 소리 끝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杵聲未盡人皆死. 집집마다 대 이으려고 사내자식 길렀건만家家養男當門戶 오늘 여기 성 아래서 흙이 되고 마는구나.今日作君城下土.
    ▲ 고구려 덕흘리 고분벽화 연회도에 나타난 중국 각지의 태수들.

    장성을 쌓는 것은 이처럼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3000리에 걸친 장성도 수많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인데 진시황이 어찌 그리 짧은 시간에 1만 리의 장성을 구축할 수가 있겠는가. 사마천의 ‘사기’도 그가 집필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정 가필되어 온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중국인의 사서편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춘추필법’이다. 이는 중국에 이로운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확대하고 불리한 것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사소하게 처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ㆍ식민사학의 망령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학계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개보수작업은 명나라 때 와서 진행되는데 이는 북방의 몽골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부르는 만리장성이 탄생하게 된다. 중국 역사서에서 만리장성을 거론할 때면 예외 없이 동쪽의 산하이관에서 서쪽의 가욕관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국의 지도책에는 만리장성의 동쪽이 한반도의 청천강까지 연결된 것일까? 여기에도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먼저 한 무제가 고조선을 물리치고 설치한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을 포함한 지역이라고 못 박았다. 이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중국의 사서에 의거하여 황해도에 수성현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이를 꿰맞춘 것이니 참으로 넋이 나가고 말문조차 막힐 일이다. 역사지리는 시대에 따라 변동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논리를 무시한 채 스승과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우리 사학계의 행태가 분노를 넘어 가엾게 느껴진다. 소통과 융합의 시대에 이를 단절시키고 스스로 함몰하는 그들에게 한 줌 억지눈물을 흘려야 할 판이다. 중국의 사학계는 신났다. 한국의‘뜻 맞는’동지적 학자들이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니 굳이 춘추필법을 쓰지 않아도 쉽게 역사를 침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유네스코에서는 ‘보존 위험에 직면한 세계 유산 명단(2004)’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중국의 만리장성도 들어 있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기회로 ‘장성보호공정(2005∼2014)총체공작방안’을 제정한다. 장성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마련한 것이다. 뒤이어 법률적인 효력을 얻기 위해 ‘장성보호조례’를 만들었고 2006년 9월 20일에는 국무원 제150차 상무회의에서 조례를 통과시키면서 장성보호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장성보호공정은 유네스코의 바람과는 달리 문화유산 보호만을 위한 공정이 아니었다. 중국의 속셈은 이제 새롭게 주장하는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로 만리장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즉,중국의 영토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라는 영토주의 역사관을 강화하는데 만리장성은 더없이 중요한 역사도구인 것이다. 이는 중국이 줄기차게 역사 왜곡을 감행하며 시도해온 4대 공정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판인 것이다.
    ㆍ중국의 장성공정, “장성의 길이는 21,196.18킬로미터”
    2012년 6월, 중국 국가문물국은 장성보호공정의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역대 장성의 길이를 2만 1,196.18킬로미터로 늘려 발표하였다. 그와 함께 ‘장성을 확장하는 것은 중국의 혼을 드높이는 것이다(長城長 中華魂)’는 축하행사도 열었다.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 목단강까지 서쪽으로는 신강성의 하미까지 그야말로 고무줄처럼 늘려 놓았다.
    ▲ 중국 정부가 장성공정을 마치고 축하행사를 여는 장면

    고구려의 천리장성인 노변강토장성(老邊崗土長城),발해의 목단강변장(牧丹江邊墻),고구려와 발해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변고장성(延邊古長城) 등이 모두 중국의 만리장성에 포함된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 이후 불안전한 정치논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향후 몽골을 포함,동북 3성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발생할 문제에 대비한 치밀한 포석이 깔려 있는 것 이다. 신강도 마찬가지다. 서북공정으로 신강 지역의 역사 왜곡에 성공하였지만 계속되는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만리장성 늘리기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을 차단하면서 자신들의 강역을 넓혀가려는 정치적 꼼수가 포함된 것이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늘리자 ‘역대장성’이란 말로 슬쩍 바꿔놓았다. 장성 늘리기를 교묘하게 위장한 것이다. 중국의 장성 늘리기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계속될까? 전 세계에 중국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구가 통째로 중화제국주의를 받아들이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만리장성을 일컬어 3,000년에 걸쳐 이룩한 위대한 중화의 산물이라고 하듯이 앞으로도 3,000년쯤의 세월을 가지고 느긋이 하지만 집요하게 완성하려 들 것 이다. 한국은 냄비처럼‘빨리빨리’ 처리하고 곧 잊어버리지만 중국은 쇠솥처럼 ‘천천히’ 하며 잊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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