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33 강희제의 욕심이 베인 교만성<안서2>

浮萍草 2014. 6. 5. 09:28
    강희제, 국고 빼돌린 간신 두개골 가르고 가죽을 벗겨… 위구르 물리치고 新疆 차지하는 계기 마련
    ▲ 교만성 전경
    원이 사막으로 바뀌고 자동차는 뜨거운 폭염에 허덕대며 달린다. 마침 한 줄기 물길이 보인다. 소륵하(疏勒河)다. 소륵하는 하서주랑을 오아시스로 적시는 3대 내륙하천 가운데 으뜸이다. ‘소륵’이라는 말은 몽골어를 음역한 것으로 ‘많은 물(多水)’이라는 의미다. 만년설 녹은 물이 강이 되어 사막지대를 흐르니 그 물은 바다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소륵하는 옥문시 서북쪽을 지나 안서와 돈황을 거친다. 그리고 서쪽으로 흘러 롭노르 호수에서 사라진다. ‘롭노르’는 몽골어로 ‘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호수’라는 뜻이다. 이 호수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호수의 바닥까지 말라서 염분이 많은 사막으로 변하였다. 롭노르 호수는 일명 방황하는 호수라고도 한다. 이 호수로 들어오는 타림강과 공작하의 물길이 변해 호수의 위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다. 그냥 마실 수 없으면 찻잎과 함께 끓여서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륵하 주변은 실크로드를 오가는 사람들이 중시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소륵하 주변이 어떠했기에 그랬을까? 당나라 때 이길보(李吉甫)가 지은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 과주(瓜州) 진창현(晋昌縣)조에 보면,“동서 260리, 남북 60리에 이르는데 수초가 풍부해 목축이 성행한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만 해도 이곳은 강물이 초원을 적시고 들판에는 소, 말, 양떼가 노니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ㆍ인간의 꿈이 만든 ‘교만성’
    소륵하가 황량한 벌판을 휘저으며 물길을 낸 옆으로 폐허의 고성이 보인다. 교만성(橋灣城)이다. 교만성은 중국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나아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 동으로는 가욕관과 연결되고 서로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이르며 남으로는 기련산맥을 바라보고 북으로는 외몽골과 통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은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 된 곳이다. 지금은 황량한 폐허로만 남아있지만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만 해도 군사거점지역으로 번창하였다. 이후 회족(回族)의 반란으로 성이 부서지면서 주민들이 흩어지자 방치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소륵하에 접해 있는 교만성에는 원래 천생교(天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후에 강물이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며 흐르게 되자 ‘교만(橋灣)’이라 부르게 되었다. 교만성에 도착하니 호양목(胡楊木)과 낙타 풀만 가득하다. 동서 320미터, 남북 122m에 이르는 성터에는 풍파를 이겨낸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폐허의 교만 성터를 걷는다. 황토판축으로 쌓은 성벽이 송곳 햇살에 몸을 뒤척인다. 숨 막히는 바람이 햇살 사이를 가차없이 몰아친다. 교만성은 인간의 욕심이다. 부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쟁투의 결과물이다. 교만함에 가득한 인간이 잘난 척 으스대려고 만든 상징이다. 하지만 그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열기에 찌든 황토 흙이고 바람에 흩어지는 한 줌 먼지인 것을 다시 한 줄기 바람이 다가온다. 그리고 단호하게 속삭인다. “보았으니 가서 전하라. 헛된 욕심은 화를 부를 뿐이니 심신을 다스리고 비우는 법을 배워라.” 무엇을 비울까?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남보다 더 담기 위해 달려온 욕심인데 다스리고 비울 수 있을까? 내려놓는 연습조차 하지 않은 삶들이 어떻게 비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실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임을 말하면서도 실천하지는 않으니 진정 이 말을 믿기는 하는 것일까. 인간의 욕심을 뉘우치게 하는 것은 아픔뿐이다. 육체적 아픔은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하고, 정신적 아픔은 비우는 법을 깨닫게 한다. 스스로 뼈저린 아픔 없이는 내려놓지도 못하고 비울 수도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지만 이는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아픔 속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다.
    ㆍ강희제의 욕심이 나은 ‘인피고(人皮鼓)’
    ▲ 교만성 박물관의 강희제 상

    교만성은 몽성(夢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나라 강희제가 서역을 시찰하는 꿈을 꾼 데서 비롯된 것이다. 꿈에는 인적 없는 사막에 오아시스가 나타나서 그 물이 성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는데 물가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에 금빛 찬란한 황관과 옥대가 걸려 있었다. 황제는 화공에게 자신의 꿈을 그리게 하여 신하들에게 이를 살피게 하였는데 지금의 교만성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황제는 정금산(程金山) 부자에게 큰돈을 하사하고 이곳에 군사방어기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게 하였다. 정씨 부자는 황제가 이처럼 황량하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초라한 성곽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많은 돈을 빼돌려 호의호식하였다. 5년이 지나고, 흠차대신이 서쪽 변방을 순시할 때 이곳을 둘러보고 돌아가서 황제에게 사실대로 아뢰었다. 대로한 황제는 정씨 부자를 처형하고 그들의 두개골을 붙여 북 틀을 만들고 등가죽을 벗겨 내 북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정금산의 뒷골로는 그릇을 만들었다. 황제의 경고를 보여주기 위해 200m 떨어진 곳에 영령사(永寧寺)를 짓고 나서 날마다 그 북을 두드려 백성은 바르게,관리들은 청렴하게 지낼 것을 명령하였다. 황제의 칙령으로 지어진 영령사도 시대의 풍파 속에 사라지고 1992년 그 자리에는 몽성박물관이 들어섰다. 정씨 부자의 두개골과 피부로 만들어진 인피고(人皮鼓)와 인두완(人頭碗)은 청나라 때부터 보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과 호기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리고 유리상자 안에 보관된 두 보물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하는 섬뜩함에 다시금 몸서리를 친다.
    ㆍ사람 가죽 벗기는 형벌 박피(剝皮)형은 오래된 형벌
    중국에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인 박피(剝皮)형은 오래된 형벌이다. 처음에는 사람의 얼굴을 벗기는 형벌이었는데 점차 심해져 전신으로 발전한다. 온몸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은 ‘한서’에 처음 보인다. 경제(景帝) 때 광천왕(廣川王) 유거(劉就)가“살아있는 인간을 찢어서 벗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형벌 가운데 최고의 형벌은 머리와 몸통, 팔다리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이다. 그런데 박피형도 이에 못지않은 끔찍한 형벌이었다. 이 끔찍한 형벌은 명나라 때에 이르면 절정기를 맞는다. 무종(武宗)은 모반자 60명의 피부를 벗겨 말안장을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 강희제가 정금산 부자의 가죽으로 만든 인피고

    박피 형벌은 그리스 신화에도 보인다. 피리의 대가인 마르시아스(Marsyas)는 자신의 연주 실력에 도취한 나머지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누구의 음악이 뛰어난지 가려보자며 도전장을 내민다. 그 결과 아폴론이 승리하고 마르시아스는 참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는다. 중일전쟁이 배경이 된 영화 ‘붉은 수수밭’에도 일본군이 중국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장면은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산둥성 고밀(高密)현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실화를 근거로 제작한 것이다. 인피로 만든 것은 북이나 말안장만이 아니었다. 책표지에도 인피가 사용되곤 했는데 프랑스혁명 때 유행하였다. 살인자의 재판기록을 담은 문건은 살인자의 살가죽으로 제본하거나 해부학 책표지는 해부 대상자의 살가죽을 사용하였다니,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처진다. 오늘날은 인간의 존엄성이 최고인 시대여서 박피형은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권력자의 생각 여부에 따라 한낱 짐승처럼 취급되기 일쑤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여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하는 극형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말로만 인간의 존엄성을 외칠 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화되었을 뿐이니 그 역사 또한 일천하다. 강희제는 분명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것이다. 황제의 명을 어기고 국고를 빼돌린 간신이니 그 죄를 엄중히 물어 처벌해야 한다. 처벌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왜 두개골을 가르고 가죽을 벗기라고 했을까. 강희제는 고비사막을 사이에 두고 영토 확장을 위하여 티베트,몽골과 일진일퇴를 벌였다. 이러한 때, 전략적 요충지에서의 기선 제압은 매우 중요하다. 강희제는 지엄한 황명을 보임으로서 일반 백성과 관리들로 하여금 복종과 단결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아울러 이러한 경고는 티베트와 몽골에도 전해져 얼마간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희제의 전략은 건륭제로 이어져 위구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강(新疆)’을 차지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ㆍ백성은 ‘고복격양’을 원한다
    ▲ 폐허가 된 쇄양성

    폐허의 성터에 다시금 바람이 분다. 햇살도 한층 강하다. 하지만 호양목과 낙타 풀은 초록을 잃지 않고 있다. 바람과 햇살에 몸을 내어주어도 초록만큼은 단호하게 간직하고 있다. 다 주고 비운 그곳에 초록이 있기 때문이리라.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은 정금산 부자만이 아니다. 강희제 또한 천하의 제왕이 되고픈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백성이 스스로 존경하는 통치자는 태평성세를 열어가는 자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태평성세인가. 아니다. 이는 통치자 개인의 욕심일 뿐이다. 백성은 통치자 개인의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백성은 소박함 속에서의 평안함이면 족하다. 국가와 통치자는 백성의 이러한 소박한 행복을 누리게만 관리해주면 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왠가. 통치자의 욕심이 백성의 생각을 벗어난 까닭이다. 가야 할 길이 아닌 막다른 길로 질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백성의 뜻이 곧 ‘천명(天命)’이니 그 뜻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언제나 달콤한 말 뿐이다. 오히려 자신만의 천명을 만들어 그것이 백성의 천명이라고 우겨댄다. 개인의 존엄성이 최고조인 시대 백성(百姓)의 명령은 존엄하지 않은 것인가. 진정 무엄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어느덧 햇살은 오후의 강렬함을 잃었다. 서둘러 감숙공로에 오르니 모랫바람이 더욱 거세다. 자갈밭의 무덤들도 저마다 모래를 뒤집어썼다. 그 너머에서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내가 탄 자동차를 비켜지나 간다. 삶과 죽음이 지척이고 하나인 길, 그 길을 나아간다.
    ㆍ쇄양성, 설인귀가 쇄양을 먹고 승리한 곳
    ▲ 쇄양성 입구의 설인귀 상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쇄양성(鎖陽城)을 보기 위해서다. 쇄양성은 고대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중요한 성이다. 쇄양성 입구에 도착하니 성은 보이지 않고 황량한 모래밭에 사막식물인 홍류(紅柳)만 무성하다. 홍류를 헤치며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폐허가 되어 주저앉은 쇄양성이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고적하게 앉아 있다. 쇄양성은 일찍이 한나라 때 지어졌다. 수나라 때에는 이곳에 옥문관을 설치했는데, 이곳 또한 서역을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쇄양성은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린다.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실크로드 전성기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쇄양성 지역은 소륵하 주변의 풍부한 수초와 끝없는 녹지가 이어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쇄양성도 명나라 말기부터 쇠퇴한다. 사막화 현상도 한몫하였을 터. 자연의 위대한 힘을 인간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쇄양성의 원래 이름은 ‘고욕성(苦峪城)’이었다. 그런데 왜 쇄양성이 되었을까? 이는 성 주변에 많이 자생하는‘쇄양’이란 식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름을 두고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유적지마다 한두 개의 전설이 있는 법인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당나라 초기의 장군인 설인귀가 서역을 정벌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합밀(哈密)국의 원수인 소보동(蘇寶同)의 매복군에 밀려 쇄양성에 고립된다. 엄동설한에 성에 갇힌 설인귀 병사들은 원군이 도착하기까지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병사들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눈 속을 뚫고 나온 쇄양을 먹었는데 이를 통해 원기를 회복해 끝까지 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에 태종은 그 성을 쇄양성이라고 고친다. 쇄양은 고비사막의 특산품이다. 사막인삼으로도 불리는 약용식물인데 의학적으로 약효가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쇄양은 영하 20도 전후에서 자란다. 그래서 쇄양이 자라는 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ㆍ탑이사에는 현장의 佛心만 머물고
    쇄양성은 현장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현장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가기 위해 몰래 장안을 떠나 이곳 과주에 이르렀다. 과주는 광활한 사막을 건너기 전에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도시였다. 현장은 과주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쇄양성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탑이사(塔爾寺)에서 강설도 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과주자사 독고달(獨孤達)은 양주자사로부터 현장이 현지에 오면 체포하라는 공문서도 찢어가며 현장의 구법 길을 보호한다.
    ▲ 현장이 설법한 탑이사

    독고달의 보살핌 속에 현장은 서둘러 길을 나섰는데 그 와중에 서역 길을 잘 아는 호인(胡人) 석반타(石槃陀)가 현장에게 오계(五戒)를 받기를 청한다. 그는 옥문관과 다섯 봉화대를 무사히 지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었는데, 현장에 갈아탈 말까지 주선하였다. 석반타가 소개한 노인은 서른 번도 넘게 사막을 횡단한 야위고 기운 없는 말이었는데 현장은 두말없이 자신의 튼튼한 말과 바꿨다. 그는 야윈 말을 믿은 것이다. 자신이 타고 온 말이 튼튼하긴 했지만 사막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막 길을 잘 아는 노쇠한 말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현장의 판단은 적중한다. 고비사막에서 길을 잃고 식수마저 동이나 사경을 헤맬 때 야윈 말이 물 냄새를 맡고 오아시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1km 떨어진 탑이사를 향한다. 입구에는 폐허인 채 세상을 관조하는 탑이사를 등지고 현장의 발자취만을 알리려는 안내판이 요란하다. 부서진 탑이사를 돌아보는 데 정좌한 불상의 흔적이 부서진 아픔 사이로 보인다. 저 불상은 저토록 아픔을 참고 따가운 모랫바람을 이기며 나를 기다린 것인가.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합장하며 나직이 읊조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자, 가자,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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