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쥑'이는 여의사의 행복처방

17 60대에 발동 걸려 20대 인생을 사는 사람들

浮萍草 2014. 6. 13. 06:00
    ▲ 양을천(66) 대구의료원 호스피스봉사자 회장.
    홍색 봉사 가운이 엉덩이를 푹 덮을 정도로 작은 키 때문일까? 나는 정말로 중학생인줄 알았다. 지난 3월부터 토요일 마다 예쁘장한 여학생이 엄마와 함께 호스피스병동에 봉사하러 왔다. 그런데 이 모녀 봉사자는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발마사지 선생님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환자의 발을 매만지고 다녀도 힐끗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보호자용 병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서 환자나 의사인 나만 빤히 쳐다봤다. 게다가 여학생이 입은 핫팬츠는 봉사 가운에 가려져서 ‘하의실종’을 방불케 했다. 복장 때문에라도 무거운 말을 한번은 해야 했다. “보통 학생들은 공부 때문에 방학 때만 봉사하러 오는데 토요일마다 오시면 공부에 지장이 있지는 않나요?” “괜찮아요. 우리 아이는 대학졸업반이예요. 의학전문대학교 준비 중이라서 시간은 좀 많은 편이예요.” 스펙 쌓기 위해서 봉사하러 온다면 지금보다는 잘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시는 일도 없으면서 병실에 앉아 있으시면 어색하거나 서먹서먹하지는 않나요? 어떤 봉사자는 좋은 마음으로 왔다가도 해드릴 것이 없어서 힘들어 하시더라구요.” “아, 지난번 호스피스 교육 받을 때 봉사자 회장님도 그러셨어요. 근데 저는 마음의 부담은 별로 없어요. 딸아이가 처음에는 무서워하고 좀 그랬는데 몇 번 오니까 괜찮아 하네요. 사실 봉사를 많이 해서 의전에 진학할 봉사시간은 넉넉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녀 봉사자가 봉사하는 옆방에는 정란씨가 누워있다. 정란씨의 딸도 스무 세 살이다. 6년 전에 엄마가 뇌종양에 걸려서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뭐든지 혼자서 했다. 세살어린 남동생을 돌보는 일도 그녀 몫이다. 아빠는 아픈 엄마를 챙기기에도 바빴다. 그래도 늘 생글 생글 이다.
    ▲ 양을천(66)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봉사자 회장.
    옆 침대의 위암 환자가 화장실 갈 때면 부축도 해주고 엄마의 몸도 구석구석 베이비 로숀을 발라 촉촉하게 했다. 그녀는 엄마가 숨을 거두면서 본 마지막 대변도 물휴지로 스스럼없이 닦아냈다. 사망선언 할 때, 정란씨의 얼굴은 다른 환자와 달리 불그스름했다. 정란씨의 남편이 여기저기 임종을 알리는 전화를 하는 동안,딸은 죽은 엄마의 얼굴에 핑크색 볼터치를 올린 고운 화장을 해줬다. 나는 우연히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스무 세 살의 인생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은 언제나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바닥에서는 세상을 평가하는 잣대가 변한다. 살아가면서 소중했던 것들이 죽어가면서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죽어가면서 필요한 것만 추구하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 그저 ‘죽어감’도 준비하면서 살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호스피스병동에서도 인생의 반전은 있었다. 양을천 대구의료원 호스피스봉사자회 회장님이 단단한 명품 복근(腹筋)을 가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반쯤 벗겨진 대머리에다 염색도 하지 않은 흰 머리카락으로 더도 덜도 말고 딱 66세다. 그러나 얼마 전에 카카오톡에 올린 양회장님의 사진은 몸짱 그 자체였다. 그는 7년 동안 나와 동거동락(同居同樂)한 호스피스 봉사자다. 매일 봉사를 마치고 헬스장에 가서 두시간정도 운동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골골거리는 나에게 “몸이 건강해야 환자를 잘 돌볼 수 있다”고 충고하시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25년 전, 양회장님은 부인을 직장암으로 떠나보냈다. 당시는 모르핀이 흔하지 못해서 많이 아파하면서 떠나보냈다. 지금 이 병동 환자들은 안 아파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다. 양회장님은 정년퇴직 한 후 몇 년 더 직장에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봉사라는 것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 할 것 같아서 대구의료원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다. 나는 말기 암으로 38살의 젊은 부인을 잃어야 하는 환자의 남편에게 양회장님을 소개했다. 짧은 만남이지만 큰 위로가 됐다.
    ▲ 목욕봉사하는 양을천 회장님

    숙희 할머니가 숨이 차서 급하게 입원을 했다. 오른쪽 폐가 암 덩어리로 막혀서 가슴 엑스레이가 보얗게 됐다. 응급조치를 받고 숨 쉬는 것이 편해지자 숙희 할머니는 병실 침대에서 앉은 채로 장구 연습을 했다. “딸아이가 엄마 심심하다고 배우라고 했는데 참 잘 한 거 같아요. 이렇게 장구를 치면 숨 가쁜 것도 잠시 없어지거든요.” 6년 배운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봉사하고 싶어서 배웠는데 아직도 실력이 부족하다면서 수줍게 말했다. 나는 봉사를 부탁했다. 숙희 할머니는 호스피스환자로 있으면서 환자들을 위해서 3번 음악봉사를 했다. 봉사하는 날이면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자진모리와 굿거리 장단을 복습했다. 그녀는 사후에 안구기증도 했다. 숙희할머니는 비록 인생의 끝자락에 발동 걸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뜨겁게 달궈냈다.
    ▲ 장구치는 숙희 할머니.

    늦게 발동 걸려서 멀리 가지 못해도 상관없다. 발동조차 걸리지 않는 인생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드라마도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듯이 우리 인생도 뒤늦게라도 언젠가 발동 한번 제대로 걸어보자.
    Premium Chosun ☜       김여환 대구의료원 완화의료 센터장 dodo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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