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쥑'이는 여의사의 행복처방

9 문이 있으면 집, 문이 없으면 무덤

浮萍草 2014. 6. 5. 06:00
    ‘집과 무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창문이 있고 없고 이다.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창문이 있으면 집이고, 없으면 무덤이다.
    신라시대 왕의 무덤이었던 천마총에는 금관 같은 보물이나 토기로 된 밥솥 등의 살림살이가 있기는 했지만, 창문이 없다. 
    그래서 무덤이다. 미국 대통령이 살고 있는 백악관은 밖에서 보면 으리으리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대통령 집무실은 의외로 소박하고 좌우로는 참모진의 집무실이 딱 붙어 있다. 
    출입문이 네 개나 되고, 오바마 대통령은 수시로 드나들며 참모진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 문을 항상 열어둔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은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누는‘소통의 공간’인 셈이다. 제대로 된 '집'이다.
    ‘삶과 죽음’도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 소통할 수 있느냐에 있다. 
    비록 이 세상에 없더라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어 그리워하고 사랑받고 있으면 그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같은 집,같은 직장에 있으면서도 의견이 달라서 서로 소통할 수 없으면 살아 있으되 그 관계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모,아내,그리고 자식의 가슴에 담겨져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 살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고 쳐다보지도 않고 냉랭해지는 사람도 살다보면 생긴다.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오래된 공포영화가 있다. 
    참혹할 만큼 아름다운 그레이스 부인(니콜 키드먼 분)은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낸 후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 둘과 함께 해안가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그레이스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 이였는데 자신들 이외에 다른 사람이 집에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 둘 발견하고 극도로 예민해진다. 
    마치 유령과 동거하는 느낌일 꺼다.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 마치 악마와 싸우는 성직자 같이 심각하다. 
    그레이스 부인은 유령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강한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캄캄한 구석방에 가두기까지 한다. 
    그레이스 부인이 하얗게 질려서 외부 침입자들을 유령으로 확신하는 모습은 소름끼치는 음악과 함께 으스스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것보다 심한 등골이 오싹하는 반전이 있다. 
    죽은 자가 외부 침입자들이 아닌 바로 주인공 그레이스 부인과 아이들이다 라는 것이다. 
    단지 주인공인 그레이스와 관객들만 그 사실을 몰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바로 그 유령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문에 무겁고 두터운 검은 커튼을 친다. 
    그레이스는 사람과 소통할 수 없는 유령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닌 창문 없는‘무덤’이었다. 그저 한 편의 공포영화일 수도 있지만 철학적인 교훈도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레이스와 같이 마음의 창문이 없는 사람이 종종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떠나 보내야하는 등 인생의 극한 상황에 부딪치면 끔찍하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령 그레이스처럼 소통 할 수 없게 된다.
    선자 할머니(65세)가 입원한 후로 303호는 늘 반찬냄새로 가득했다. 
    할머니의 식사 시간이 족히 두 시간을 넘기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자 할머니는 먹는 것이 아니었다. 
    큰 딸이 계속 입안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어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했디. 
    같은 방에 있는 몇 주째 식사를 못 하시는 말기 위암환자도 연신 구역질해대는 비위가 약한 간암환자도 별 불평 없이 지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식사시간이 남다른 선자할머니 때문에 힘이 들었다. 
    폐암이 머리로 전이된 암 환자였지만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로 심한 당뇨병을 앓아 왔다. 
    불규칙한 식사시간 때문에 혈당이 들쭉날쭉 해서 인슐린 처방내기가 무척 곤란했다. 
    더군다나 선자할머니는 폐암에 대한 증상보다 전이된 머리 암에 대한 증상이 심각했다. 
    머리에 시행했던 방사선치료 후에 생기는 후유증 때문인지 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보가 되었다. 
    어떠한 자극에도 그저 눈만 껌벅거렸고 씹거나 삼키는 기능도 많이 떨어져 밥을 먹다가 음식물을 입에 머금고 잠들기도 했다.
    “방사선 치료하기 전에는 멀쩡했는데…….” 하면서 가족들은 애를 태웠다.
    무작정 위로하거나 죽음을 받아 드리게 하는 것보다 의학적 지식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방사선 후유증으로 말씀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휘청거리시기는 하지만 만약 그 치료를 안했으면 벌써 돌아가셨을 겁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방사선치료에 반응이 보이면 차츰 차츰 의식을 회복 할 수도 있어요”라고 수십 번 반복해서 말했다.

    선자 할머니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30대 후반인 큰 딸만 미혼이고, 다른 딸들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으니 간병은 큰 딸 몫이었다. 슬프게도 이제 딸이 엄마 역할을 대신 해야 했다. 큰 딸은 유달리 엄마의 밥 먹는 것에 집착했다. 무언가 드시게 하면 조금 더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억지로 드시게 하다가는 기도로 음식물이 들어 갈 것 같았다. 잘못 들어간 밥알이 흡인성폐렴(음식물이 기도로 잘못 들어가 생기는 폐렴)을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영양실조가 아닌 독한 폐렴으로 더 빨리 돌아가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때뿐이었다. 할머니의 다른 딸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 하면 “우리 언니는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하고 고개만 떨구었다. 그래도 큰 딸이 영어 원서를 병실에서 틈틈이 읽는 걸 보면 배운 만큼 배운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오죽 엄마의 죽음이 싫으면 저렇게 까지나 처절할까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간호사들이 번갈아 설득하고, 나도 회진 갈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목욕하는 날이었다. 목욕 봉사자들이 목욕하다말고 손가락으로 퉁퉁 불어 있는 음식물을 한 그릇 이상 긁어냈다며 허겁지겁 알리러 왔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입안에는 아침에 드신 밥알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위험했다. 그날 이후 나는 심각하게 금식(禁食)에 대한 면담을 하려고 진료실로 큰 딸을 부드럽게 불렀다. 그러나 큰 딸은 상담 도중에“그런 이야기라면 이제 듣기 싫어요. 이야기 들을 시간에 나는 우리 엄마 밥을 먹여야 하거든요!” 하고 불쑥 나가버렸다. 나는 선자 할머니 가족을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나한테 열어줄 마음의 창문이 없었다. 세상에는 혼자서 정말로 강한 사람은 없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면,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처럼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존재 안에 새겨진 관계 그리고 서로의 흔적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과 마음 깊숙이 소통을 할 수 없으면 그것은 살고 있지만 죽은 거나 같다. 반대로 몸과 영혼이 분해되는 죽음조차도 영원히 사는 것처럼 잘 통하게 할 수도 있다. 한평생을 가정이라고는 돌보지 않고 방방곡곡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말기 췌장암이 되었다고 박변호사가 상담을 신청해왔다. 30년을 아버지 도움 없이 오로지 어머니의 힘으로만 어렵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아버지였더라도 자식된 도리로서 안 아프면서 편안하게 떠나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암 때문에 통증도 있고 식사를 잘 못하시는 것도 오늘 상담을 한 이유이지만 새삼스럽게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된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것이 가장 큰 고민 이라고 했다. 입원한 뒤 박변호사 어머니는 우리가 안보는 곳에서는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접한 남편을 정성껏 돌봤다. 난생 처음 노래교실에서 잉꼬부부처럼 다정하게 노래도 함께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투게더 아이스크림도 입원실 냉동고에 가득 채워 놓았다. 박변호사 어머니가 남편의 마지막이 왔을 때 눈물을 훔치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가슴을 찡하게 했다. “내가 안 울라고 했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다른 건은 몰라도 남편은 참 마음대로 안 되더래이.” 경제력도 없고 폭력까지 행사한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아이들 때문이었다고만 하기에는 아까운 내 인생이다. 그래서 박 변호사의 어머니는 대단했다. 한평생 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는 남편에게 자신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창문을 열어 주었던 박변호사 어머니의 삶이 가슴 시리도록 눈부시다. 마음의 창문이란 결국 내가 가진 딱딱한 벽을 도려내야 생기는 것이었다.
    Premium Chosun ☜       김여환 대구의료원 완화의료 센터장 dodo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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