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쥑'이는 여의사의 행복처방

11 암 걸린 엄마 위해 닭죽을 끓이는데 눈물이…

浮萍草 2014. 6. 7. 06:00
    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 들이닥치는 것,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젊은 변호사 네이션은 죽음의 메신저에게 말한다. “전 준비가 안됐단 말입니다.” “준비하고 죽는 사람은 드물지.” 네이션은 아내 말로리가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절도,화재,홍수,벼락,테러 등 대형 재난에 대비해 온갖 보험을 들어 두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밀어닥칠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하필 나야? 다른 사람 먼저 데려가면 어때서 그래. 착한 일을 한 것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살지는 않았어.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데려가면 어때서 그래.” 지금까지 훌륭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대단히 나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적어도 일의 순서나 일관성 같은 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의 <구해줘>라는 소설에서 발췌.) 병원이라고는 팔십 평생 살면서 처음 와 봤는데 수술도 안 되는 말기 위암이라니. 죽어야한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초조하게 떨고 있는 83세 할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이 세상살이가 너무 행복해서 떠나기가 싫은 것일까? 항불안제를 처방하면 좋아질까? 80대가 힘들다면 10대는 어쩌란 말인가? 70세이셨던 우리 엄마도 죽음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상치도 못한 폐암에 걸린 엄마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원했다. “거기가면 이제는 죽는 거 아니니?” 건강할 때는 누구보다 딸이 호스피스 활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분이다. 아버지 떠나시고 막내 남동생이 장가가고 이제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죽어도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시곤 했다. 그러나 막상 운명의 순간이 오자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가족의 마지막을 돌본다는 것은 단단한 마음의 각오가 없으면 힘든 작업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엄마의 어울리지 않는 주치의였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막 입원 했을 때, 임종하셨을 때 그리고 떠나신 후 상실감에서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끄적거렸던 글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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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닭 한 마리 푹 삶던 날 엄마가 폐암에 걸렸다. 발견 당시 늑막으로 전이된 4기였으니까 일 년 정도 버텨 준 것 만해도 현대의학 덕분이었다. 엄마는 30년 이상 된 당뇨병 환자였으므로 체력도 약했다. 그래서 나는 폐에 물이 찼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보다 일찍 호스피스 병동에 오실 거라는 것도 직감했다. 엄마의 보호자는 나보다 열 살 어린 남동생이었다. 지금은 ‘딸 바보’니 하면서 딸들의 전성시대이지만 내가 딸이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딸 세 명은 한 명뿐인 엄마의 아들을 위해 존재했다. 남동생은 곧 빠져버릴 유치(乳齒)에도 충치가 생기면 금으로 덮어 주었지만 여형제들은 아파도 병원 가는 것도 꺼렸다. 엄마는 시집가는 딸이 복을 가져간다고 해서 내가 입던 속옷도 시댁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편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는 딸이기 때문에 엄마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병이 깊어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는 말기 암이 되었을 때, 엄마는 호스피스는 죽는 곳이라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했다. 건강하실 때는 호스피스는 안 아프면서 죽을 수 있는 곳이라며 이런 곳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던 분이셨다. 나는 어디에도 써먹지 못하는 죽음의 의사 꼴이 되었지만 비단 엄마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해오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드디어 부산에서 남동생과 함께 오셨다. 깡마르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암은 지난 1월부터 머리부터 목뼈 허벅지다리뼈까지 파먹어가고 있었다. 통증 때문에 옆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눈물이 흘렀다. 한바탕 감정의 폭풍우도 몰아쳤다. 힘들었던 과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병동에 오는 모든 보호자들처럼 오로지 엄마가 안아프면서 떠났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제껏 살면서 마음속으로는 한 번도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를 보고 한 첫 말씀이었다. 그 다음날 나는 잘 먹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닭죽을 만들었다. 새벽부터 닭 껍질 벗기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껍질과 근육사이에 붙어있는 기름을 떼어내고 꽁지와 날개를 부엌가위로 싹뚝 잘랐다. 특히 닭 꽁지는 보기만 해도 혈관에 두텁게 쌓일 것 같은 포화지방 덩어리가 똘똘 뭉쳐져 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는 금세 닭 껍질과 누런 기름덩어리로 가득 찼다. 대학 다닐 때는 붕어부터 개구리, 닭 심지어 토끼까지 해부해놓고 나이 50에 웬 내숭일까? 그때는 닭 뼈를 추려서 마치 닭이 서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제출하는 숙제도 했다. 빨간 아크릴판에 또박또박 뼈 이름까지 표시해서 말이다. 고기나 생선을 손질 할 때면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부럽다. 하지만 주부들은 엄마의 요리를 맛있게 먹는 가족을 떠올리며 불편함을 감수한다. 어쨌거나 껍질과 지방이 홀라당 벗겨진 닭은 신속하게 곰탕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향긋한 당귀와 대추를 넣고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양파,당근,무를 큼직하게 토막 내어 넣었다. 닭죽에는 마늘과 인삼이 들어가야 제 맛인데 오늘은 생략했다. 혹시 아픈 엄마가 드시고 속이 불편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찹쌀과 껍질 깐 노란 녹두를 깨끗이 씻어서 불려 놓았다. 삼계탕이나 치킨스프는 보양식으로는 그만이다. 닭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해서 기력이 떨어진 환자에게는 좋은 요리 재료이다. 닭을 키우는 과정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 또는 ‘말아야 한다’는 등의 논쟁이 있지만 나는 먹는다. 조리법을 살짝 바꾸어 건강하게 만들면 박수 받을 만한 요리 재료이다. 닭 한 마리를 한 시간 반가량 푹 고았다. 닭도 잘 삶겨 졌고, 같이 넣은 야채도 푹 물러서 흐물흐물해졌다. 닭은 따로 건져내어 식혔다. 야채와 한약재도 건져내고 닭 고은 물에 불려둔 찹쌀과 녹두를 넣었다. 찹쌀이 적당히 퍼지면 곱게 살을 발라 낸 닭 살을 넣고 한번 부르르 끊이면 완성이다. 천일염도 적당히 넣어주면 구수한 맛이 한결 깊어진다. 나는 엄마한테 드릴 닭 한 마리를 푹 고아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머릿속에는 함께 했던 엄마의 인생이 떠올랐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 먼 훗날, 내 딸도 이런 순간이 있을 것이고, 내 딸의 딸도 이런 눈물을 흘릴 것 같다.
    Premium Chosun ☜       김여환 대구의료원 완화의료 센터장 dodo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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