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역사 속의 여인

8 소설가이자 여기자 이선희

浮萍草 2014. 5. 21. 10:18
    "타락을 해도 그렇지 소설가이자 여기자가 카바레가 뭐야”
    ▲ 소설가이자 기자 이선희. 노천명
    ㆍ모윤숙과 함께 이선희와 친했던
    최정희는 "버선 뒤축은 구멍이 나기
    일쑤였고 두 아들은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모습이었음에도 자신
    을 쌍두마차를 타고 달리는 공주로,
    두 아들을 왕자같이 생각하고 있었
    다"고 회고했다.
    제시대 시인 김동환이 발행한 잡지‘삼천리’1934년 6월호에는 ‘내가 서울 여(女)시장이 된다면’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정치 활동이 제한된 식민지에서 조선인 여성이 서울시장이 될 리 없지만,‘삼천리’는 간혹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고 여류 명사 들의 대답을 듣곤 했다. 당시 스물세 살의 소설가이자 개벽사 여기자인 이선희(李善熙ㆍ1911~?)의 대답이 재치있다. ‘1. 서울 안의 시민을 모두 불러 내어서 영양주사를 한 대씩 주겠어요. 2. ‘딴스홀(댄스홀)’을 한 백여소에 두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잡어내어 춤을 추게 하지요. 3. 구세군을 행길로 떼를 지어 다니지 못하게 하겠어요. 아주 보기 싫으니까요. 4. 여기자에게 특별대우를 하되 위반하는 자는 구류에 처하지요.’
    ㆍ“이선희는 버선 뒤축 구멍난 거 신고 다니면서도 자신을 쌍두마차 타고 달리는 공주로 생각”
    이선희는 “저널리스트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효석과 견줄 만한 서정성과 예술성을 지닌 작가로 1930년대 독특한 세계를 이룩했다”(서정 ‘이선희 소설 연구’)는 평가를 받는다.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는 당대 문인 중 최고라는 평가였다. 조선일보는 1937년 12월 12일 자에서 이선희의 중편 소설 ‘여인명령’이 연재됨을 알리는 사고(社告)를 싣고 이선희를 “청신한 촉감과 섬세한 관찰과 화려한 필치가 한데 어울리는 작가”로 소개했다. 이선희는 화려한 문체만큼이나 평소 생활에도 미화와 과장이 많았다고 한다. 노천명ㆍ모윤숙과 함께 이선희와 친했던 최정희는 “버선 뒤축은 구멍이 나기 일쑤였고 두 아들은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모습 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을 쌍두마차를 타고 달리는 공주로 두 아들을 왕자같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최정희가 “아이 목욕 좀 시켜”라고 하면 이선희는 “나는 이 아이의 냄새가 스코틀랜드 향수보다도 좋다”고 응수했다. 이선희가 1934년 4월 7일 조선일보에 처음으로 기고한 수필 ‘젊은 여인의 허영’은 그런 자신에 대한 변호였다. ‘젊은 여인의 허영은 한 개의 죄 없는 예술이다. 그 사람을 마음껏 살지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아름다운 욕망이다.
    봄바람과 같이 가볍고 오색의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희망이다. 세상에 점잖다는 선생님들 멋도 모르고 함부로 꾸짖지 마소. 나는 이 허영을 분수에 없이 넘치게 타고난 가여운 딸이다. 괴로운 존재다.’ 이선희는 스물일곱 살 때인 1938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해 1년여간 학예부(현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학예면에 ‘계절의 표정’,‘영화에서 얻은 꽁트-여인도(都)’ 같은 감각적인 문체의 수필을 주로 썼다. 1939년 7~8월 ‘섬 색시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8회 연재한 르포 기사도 남아 있다. 잡지 ‘조광’ 1936년 4~5월호에 연재한‘작가 조선의 인상’은 이선희의 화려하고 감상적인 문체가 잘 드러난다. 이 글은 이광수ㆍ김동인ㆍ정지용ㆍ이태준ㆍ이효석ㆍ이헌구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26명에 대한 인상기다. 이선희는 이효석 편에서 “작품엔 늘 거미줄같이 섬세하고 봄비와 같이 보드라운 정서가 출렁거리고 있더군요”라고 썼다. 이헌구 편에서는“초콜릿빛 그늘이 날카로운 각도를 던지고 있는 봄 거리를 스적스적 걸어가시는 모양이라니 두말할 것 없는 ‘가난한 로미오’”라고 표현했다.
    ㆍ작가 김학철의 첫사랑 “타락을 해도…카바레가 뭐야”
    중국 연길 지역에서 작가로 활동한 김학철(1916~2001)은 이선희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섬세한 외모와 화려한 문체를 가진‘누나 이선희’에게 연정을 품었다. 이선희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원산 루씨아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김학철도 원산 출신이다. 김학철은 훗날 잡지‘샘이 깊은 물’1992년 7월호에서 이선희에 대한 글을 실었다. 김학철은“(이선희는)‘홍루몽’의 여주인공 임대옥과 일본 여배우 야마구치 모모에를 반반씩 닮았다. 고상한 품격에서 우러나오는 버릇에 매료된 나머지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아무 때고 칼산 지옥에도 뛰어들 각오가 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루씨아 여고보 졸업 후 이화여전 음악과를 다닌 이선희는 노래를 잘했다. 그가 오르간을 타며 프랑스 작곡가 마스네의 ‘엘레지’를 부르면 김학철은“마치 타들어가는 나무껍질마냥 몸이 오그라들곤 했다”고 한다. 이선희는‘삼천리’ 1941년 4월호에 실린 ‘여류작가의 장편(掌篇) 자서전’이란 제목 아래 실은 수필‘아버지와 산보하던 밤’에서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 건 아버지 덕분 이라고 적었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폐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희야 노래 하나 해라’. 우리 아버지는 내게 열심으로 음악을 가르치셨다. 그 후 성악을 전공시키신 것도 아버지의 소원이셨다. 나는 산 위에서 바다를 향해 노래를 불렀다. 되도록 성량을 크게 내서 노래를 부르면 아버지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셨다. (중략) 나는 지금도 그 산보하던 기억을 하고 지금도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내 자서전은 이것으로 종장(終章)은 물론 아니다.” 이선희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개벽사 기자를 그만두고 조선일보에 입사하기 이전 한때 카바레 여급으로 일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학철은 “돈 때문인가? 허영심 때문인가? 아니면 무슨 실연 따위 사유로 자포자기를 한 건가?”라며 “이름하기 어려운 일종의 느낌-배신당한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아주 미치지 않았다면야 타락을 해도 저 지경까지야 할 리가 있나. 카바레가 뭐야, 카바레가. 나 참!” 이선희는 유부남인 유명 극작가 박영호(朴英鎬)와 결혼했으나 전처와 갈등을 빚어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선희는 해방 후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그의 생애나 작품이 일반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북한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39세쯤 괴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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