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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의 어머니가 신하와 음란한 짓을…", 신하를 사랑한 덕녕공주

浮萍草 2014. 3. 18. 06:00
    고려 제29대 충목왕(忠穆王).8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어머니인 덕녕공주가 대신 정사를 보았다.
    충목왕은 12세에 세상을 떠났다.재위 1344~1348년.
    려 29대 임금 충목왕 3년(1347년) 7월,수도 개성에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왕의 어머니가 신하와 정을 통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은 환자(宦者·내시)와 시녀를 매개로 왕의 어머니와 통하여 음란한 짓을 자행 하며 궁중의 총애를 얻었다. (이 사람을) 베어버리면 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이 익명 투서에서 말한 ‘왕의 어머니’는 당시 임금인 충목왕의 어머니이자 선왕인 충혜왕의 몽골인 부인으로, ‘고려사(高麗史)’에 덕녕공주(德寧公主)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인이다. 몽골 이름은 이린진발(亦憐眞班·역련진반)이다. 덕녕공주는 1330년 3월 원나라에서 충혜왕과 혼인했다. 충혜왕이 원 황제로부터 고려 국왕에 책봉된 직후였다. 덕녕공주의 아버지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자인 진서무정왕(鎭西武靖王) 초팔(焦八)로, ‘원사(元史)’에는 ‘삭사반(朔思班)’으로 되어 있는 인물이다. 진서무정왕은 모두 123명의 왕이 있는 원 황실에서 90위권 밖에 있는 낮은 위계의 왕이다. 고려 왕은 원 간섭기 80여년 간 쿠빌라이 황제의 딸 등 몽골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진서무정왕 초팔은 낮은 위계의 왕이었지만 당시 원 제국에 반기를 든 반란을 여러차례 토벌해 원 황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결혼식 피로연은 집권 실력자인 우승상 엘 테무르 집에서 열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의 혼인은 엘 테무르가 주선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는 아버지와 핵심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에 오른 충혜왕과 정략 결혼한 것이다.
    ㆍ고려사 “젊은 몸으로 궁중에”…섭정하며 신하 최소 둘과 사랑 나눠 덕녕공주의 나이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결혼 당시 16세였던 충혜왕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는 15년 뒤 기록에도 여전히 “젊은 몸으로 궁중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뤄볼 때 덕녕공주는 아마도 결혼 당시 대략 13~15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는 충혜왕 재위 기간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남편 충혜왕은 아버지인 충숙왕의 몽골인 부인을 비롯해 신하의 아내 등을 마구 겁탈하고 궁중에 뽑혀온 여인들이 겁에 질려 울자 철퇴로 내리쳐 죽일 정도로 우리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폭력적인 군주로 꼽힌다.
    덕녕공주의 남편인 고려 제28대 충혜왕(忠惠王).원
    나라에 불모로 가 있다가 원나라 문종(文宗)에 의해 왕
    으로 책봉돼 1330년에 즉위했다.
    덕녕공주는 충혜왕과 사이에서 아들 충목왕과 딸 장녕옹주를 낳았다. 덕녕공주는 1344년 충혜왕이 폐위되고 여덟살 아들 충목왕이 즉위한 후 약 7년간 고려 정치의 전면에 등장 한다. 충목왕은 재위 4년만에 사망하지만 덕녕공주는 이어 즉위한 충정왕(충혜왕과 희비 윤씨 소생, 재위 1349~ 1351년) 때까지 섭정했다. 덕녕공주는 남편이 폐위돼 유배길에서 사망한 이후 앞서 투서에 나온 강윤충과 또 한 사람의 신하인 배전 (裴佺) 등 최소 두 사람의 고려 신하와 사랑을 나누었다. 고려사에는“덕녕공주는 젊은 몸으로 궁중에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이 드나들면서 공주의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맘대로 행했다”고 기록한다. 원 황실도 덕녕공주가 신하들과 정을 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려의 신하들은 원 황제의 측근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에게“강윤충이 왕의 어머니와 간통하여 죄악이 가득 차 있다”고 고하기도 했다. 강윤충은 충혜왕이 어느 환관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은밀히 그의 집을 찾았을 때 함께 모시고 간 인물로, 충혜왕을 공격하는 반란을 진압한 공을 세워 입신한 인물이다. 배전도 충혜왕 재위 때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배전은 악연도 있었다. 충혜왕은 원나라에 있을 때 배전의 집에 밤마다 가서 그의 아내와 처제를 겁탈했다고 한다. 덕녕공주는 남편 충혜왕의 음행(淫行)에 대해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다. 온갖 난행과 폭력을 일삼는 충혜왕이 무서웠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옳을 것 같다. 대신 강윤충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듯하다. 덕녕공주는 섭정할 당시 배전의 비리를 고발한 투서가 오자 “이제부터 배전을 내 곁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만 강윤충 만큼은 끝까지 보호했다.
    ㆍ짧았던 신하와의 사랑…조용한 말년 보내 덕녕공주는 충정왕 2년인 1350년 원나라로 가서 공민왕 3년인 1354년까지 5년간 머물렀다. 이 무렵 고려 신하들과의 관계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덕녕공주는 국내 드라마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사진은 200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신돈’에서 덕녕공주를 연기하는 배우 김여진씨 모습.

    강윤충은 1356년 반란에 연루돼 투옥된 후 1359년 사망했다. 배전은 공민왕 재위 초기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1361년 무렵 죽었다. 덕녕공주는 이 기간 고초를 당하는 ‘옛 사랑’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았다. 덕녕공주는 이후 20여년간 조용한 삶을 보냈다. 덕녕공주는 몽골 출신 왕비 중 유일하게 고려 정치를 섭정했지만 개인의 삶은 불운했다. 남편 충혜왕이 유배길에 사망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아들 충목왕을 먼저 보냈고 외동딸 장녕옹주와는 한동안 생이별해야 했다. 장녕옹주는 1354년 원나라 노왕(魯王)에게 시집갔지만 1368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 수도를 점령할 때 행방불명이 됐다. 장녕옹주는 명 태조가 북경의 군부대를 시찰할 때 발견됐다고 한다. 명은 장녕옹주를 고려로 돌려보냈다. 당시 고려의 집권 실력자였던 승려 신돈은“장녕옹주가 정절을 지켜 죽지 못하고 명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유배를 주장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형수인 덕녕옹주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 조카딸인 장녕옹주를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덕녕공주는 살아돌아온 딸과 여생을 보내다 우왕 원년인 1375년 사망했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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