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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녀는 '후리후리한 키''풍염(豊艶·글래머러스)한 체격''수죽(脩竹·가는 대나무) 각선미'를 가진 여기자였다"

浮萍草 2014. 3. 16. 06:00
    민간지 최초 여기자는 최은희, 두번째는…
    금은 한국 사회 각 부문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여성들이 남자들과 함께 경쟁하며 사회 생활을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다. 
    특히 신문사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 사회였다. 물론 요즘은 여기자의 활약이 눈부시지만.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다. 
    그는 3·1운동 이후 가장 처음 발행된 민간신문인 조선일보에 1924년 10월 입사한 첫 여기자였다. 
    (언론학자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여기자는 1920년 9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각경이다.) 
    최은희 이후 1925년 동아일보 첫 여기자 허정숙을 비롯해 시대일보 황신덕 중외일보 김말봉 등이 활동했다.
    ㆍ조선일보 두번째 여기자 윤성상 “조선 여기자 중 최고 미인” 언제나 최초는 역사에 남는다. 그러나 두번째는 좀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기 마련이다. 1969년 달에 처음 착륙한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유명하지만 그와 함께 아폴로 11호를 타고 갔으나 한걸음 늦게 달을 밟은 버즈 올드린은 잘 모르듯이 말이다. 최은희에 이어 조선일보에 두번째로 입사한 여기자는 누구일까. 1928년 입사한 학예부(현 문화부) 여기자 윤성상(尹聖相)이 주인공이다. 함경도 정평(定平) 출신으로 일본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중퇴한 그는 최은희가 퇴사한 직후 조선일보 두번째 여기자가 됐다.
    여기자 윤성상. 조선 여기자계의 최고 미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당시 여기자는 ‘전문직 신여성’으로 마치 영화배우처럼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당시 종합잡지인‘개벽’ ‘삼천리’ ‘별건곤’ 등은 여기자들의 활동을 마치 유명 연예인 동정을 전하듯이 기사를 썼다. 여기자들의 필력에 대한 논평은 물론이고 외모 품평도 자주 등장했다. 잡지‘별건곤’1933년 5월호는‘각계 명남명녀(名男名女)’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성상에 대해“조선 여기자계에서 만일 미인 투표를 한다면 당연 우수한 점수를 얻을 분”이라고 적었다. 당시 잡지들은 윤성상을 엄청난 미인으로 기록한다. 윤성상은 “후리후리한 키” “풍염(豊艶·글래머러스)한 체격” “수죽(脩竹·가는 대나무)한 각선미”를 가진 미인이었다.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백옥 같은 빛이 났고 눈에는 가을 이슬 같은 정기가 돌았다고 한다. “신문기자 노릇을 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말도 들었다. 별건곤은“앞으로 보아도 춘풍(春風)에 만개한 모란과 같이 환하고 복스럽지만 그보다도 뒷모양이 더 좋다”고 썼다. 윤성상이 거리에 나서면 누구나 한 번씩 쳐다보고 그의 ‘배선미(背線美·뒷모습의 아름다움)’를 구경하기 위해 조선일보 사옥 앞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퇴근하면 뒤를 따라가는 청년도 있었다고 한다.
    ㆍ심훈의 짓궂은 장난에도 무대응으로 일관 윤성상은 신문사 편집국의 유일한 홍일점 기자로 남자 기자들의 짓궂은 놀림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장난기가 많았다. 그는 윤성상의 이름 ‘성상(聖相)’의 한자를 바꿔‘성상(聖上) 폐하’라고 부르며 놀려댔다. 발음이 ‘묘한’ 일본 신문 이름을 들먹이면서 요즘 같으면 심각한 ‘성희롱’에 해당하는 장난도 쳤다. 윤성상은 남자 기자들의 심한 장난에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좀처럼 먼저 말을 부치기 어려울 만큼 쌀쌀해 보인다”는 평도 들었다. 당시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회고록 ‘인생잡기’에서“(심훈 등이) 놀려대도 얼굴에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도무지 상대를 하지 않아 농담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설'상록수'의 작가 심훈. 조선
    일보 기자였던 그는 여기자 윤성상
    에게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다.
    윤성상은 기사에 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 강단있는 기자였다. 그는 당시 학예부장(현 문화부장) 안석주와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진한 함경도 사투리로 “선생! 어찌 그러우. 좀 봅세”하며 독대(獨對)를 신청하기도 했다.
    ㆍ과감한 여성 해방 주장…안재홍이 “과격하다” 제지하기도 윤성상은 기사를 통해 과감한 여성 해방을 주장해 당시 조선일보 주필 및 부사장이었던 민세 안재홍(훗날 조선일보 사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윤성상은“여성들을 깨우칠 수 없을까 하는 심정으로 여성과 가정에 대한 간단한 시평을 실었고 자극제로 세계 여권 운동자 전기 같은 것도 소개하다가 과격하다는 이유로 민세(안재홍) 선생에게 중지당한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윤성상이 1929년 주도한 기획기사‘부인 공개장’은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부인 공개장’은 당시 여성들이“여러 사람에게 한 번 발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한 일,갑갑한 하소연이며 속상한 사정” 등을 써서 보내도록 하고 이를 지면에 실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기획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여성들 ‘나를 버리고 간 변심한 남편에게’ ‘저주하라! 조선의 가정제도를’ ‘버스걸은 당신네 놀림감인줄 압니까’ ‘이러한 남자들은 하루 바삐 각성하라’ ‘가면을 쓴 남성들에게’ 등 과감한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윤성상은 “아직도 봉건의 깊은 안방 속에서 잠자고 있는 우리 여성들을 위한 계몽”을 위해 이 같은 기획을 했다고 밝혔다. ‘부인 공개장’이 히트를 치자 이번엔 남성들의 목소리를 지면에 반영했다. 남성 독자들은 ‘여성 운동보다 먼저 사람이 되라’ ‘배웠다는 여성들 정조를 지킵시다’ ‘허영을 버리고 실력있는 인물이 되라’ 등을 투고했다.
    남성과 여성이 지면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서로 비판한 이 기획은 당시 엄청난 화제였다. 윤성상의 기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1930년 신병으로 입원하게 되면서 조선일보를 퇴사했고 나중에 중외일보에 잠깐 재직했다. 윤성상은 1965년 3월 5일 조선일보 창간 4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해 4월 ‘신문평론’에 기고한 ‘나의 여기자 생활 회고’라는 글에서 “내가 기자라는 직업의 말석에 잠깐 끼어 있었던 동안의 유물은 희미한 기억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심훈이 지어준) ‘성상 폐하’라는 무용(無用)의 별명이 남아 있다”고 했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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