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역사 속의 여인

3 충선왕, 몽골여인에 빠지다

浮萍草 2014. 3. 14. 06:00
    충선왕이 사랑한 몽골 여인 야속진
    리 역사에서 임금과 진실한 사랑을 나눈 대표적인 외국 여인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아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들 수 있다. 
    공민왕은 당초 고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 정략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웠다.
    (공민왕의 깊은 사랑은 훗날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만.)
    고려말 ‘충(忠)자 돌림’ 임금들은 모두(어린 나이에 죽어 결혼하지 못한 충목왕 충정왕 제외) 정략적으로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이들 임금은 모두 몽골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다. 
    노국공주는 유일하게 고려 임금이 사랑했던 몽골 공주였다. 
    그러나‘고려사(高麗史)’ 등 사서(史書)에서 이 시대 기록을 보면, 임금이 사랑한 몽골 여인이 한 사람 더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충선왕이 사랑한 몽골 여인 야속진(也速眞)이다.
    ㆍ임금의 사랑, 한 송이 붉은 연꽃 조선 성종 때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은 저서‘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고려 제26대 임금 충선왕(즉위 1298,복위 1308~1313)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에 머물 때 한 몽골 여인과 오랜 기간 서로 깊이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충선왕이 즉위하게 되어 고려로 돌아가게 되었다. 충선왕은 사랑의 정표로 여인에게 연꽃 한 송이를 건넸다. 사랑하는 남자와 갑자기 이별하게 된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詩)를 썼다.
    충선왕이 몽골 여인에게 건넨 붉은 연꽃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조선일보 DB

          한 송이 연꽃을 보내주시니 (贈送蓮花片) 처음엔 불타는 듯 붉었습니다 (初來灼灼紅) 가지를 떠난 지 이제 며칠 (辭枝今幾日) 초췌함이 사람과 다름없어요 (憔悴與人同)

    뜨겁게 사랑하던 남자의 마음도 자신의 모습도 가지를 떠난 연꽃처럼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릴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담은 내용이었다. 여인을 잊을 수 없었던 충선왕은 귀국 직전 수행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을 보내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가보니 여인은 슬픔에 빠져 잘 먹지도 못해 말도 제대로 못했다. 여인은 자기가 쓴 시를 충선왕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현은 그러나 충선왕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염려해 거짓으로 보고했다.
    이제현 초상화.이제현은 몽골여인의 연시를
    충선왕에게 전하지 않는다.
    “그녀는 술집에 나가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충선왕은 화가 나 땅에 침을 뱉고 여인을 잊기로 맹세했다. 이제현은 1년이 지난 충선왕의 생일날 술잔을 올리고 땅에 엎드리며“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제현은 그제서야 여인이 지은 시를 품 안에서 꺼내 바쳤다. 충선왕은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만일 그때 이 시를 보았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그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충성스러운 일이다.”
    ㆍ죽은 뒤에야 왕비가 된 여인 ‘용재총화’에는 충선왕과 사랑을 나눈 이 몽골 여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야속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야속진은‘고려사’에 충선왕이 사랑했던 유일한 몽골 여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80여년간 고려 임금은 몽골 여인 8명을 아내로 맞이했다. 야속진은 이들 임금과 혼인했던 몽골 여인 중 유일하게 공주 신분이 아니었다. 야속진은 몽골 여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녀는 충선왕과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세자 감(鑑)과 훗날 충선왕의 왕위를 물려받는 충숙왕이다. 충선왕과 야속진이 결혼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충숙왕이 태어난 해가 충렬왕 20년인 1294년이고,첫째 아들 감이 충숙왕보다 한두 살 위라고 가정한다면 야속진은 적어도 1292년 이전에 충선왕과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야속진은 높은 신분의 여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녀는 충선왕이 1296년 11월 원나라 궁정에서 몽골 공주 보탑실련(寶塔實憐)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높은 신분의 여인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아마도 그녀는 충선왕 처소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야속진은 임금의 아들 둘을 낳고 훗날 둘째 아들이 고려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는데도 평생 왕비로 대접받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나라 고려에 와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1316년(충숙왕 3년) 7월 원나라에서 쓸쓸히 죽은 뒤에야 고려에 올 수 있었다. 장례식은 남편과 아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조촐하게 치러졌다. 당시 남편 충선왕은 원나라에 있었고, 아들 충숙왕도 몽골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원나라에 가 있었다. 야속진은 죽은 뒤에야 의비(懿妃)로 추증되어 왕비의 이름을 얻었다. 가지를 떠난 연꽃처럼 시들었던 그녀의 일생을 애도한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