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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 최초 스웨덴 유학 여성 최영숙, 인도 청년과 사랑…아이 낳고 사망

浮萍草 2014. 3. 17. 06:00
    안창호 존경하던 한국 최초 스웨덴 유학 여성 최영숙, 인도 청년 아이 낳다가 사망
    
    1932년 4월 23일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스물여덟 살 젊은 엘리트 여성이 사망했다. 
    한국 최초로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유학해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경제학사 학위를 받고 불과 5개월 전인 1931년 11월 귀국한 최영숙(崔英淑)
    이었다. 
    유럽에 유학한 엘리트 여성이 귀국하자마자 죽었다는 사실 자체도 큰 뉴스였지만 그보다 더 세상을 놀라게 한 건 미혼인 줄 알았던 그녀가 인도 청년의 아이를 낳고 
    (혹은 낳다가)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잡지들은 최영숙의 죽음과 그의 일대기를 자세히 보도했다. 
    젊은 엘리트 여성이 외국인 청년과 사랑하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스토리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삼천리’ 1932년 5월호는 ‘인도 청년과 가약 맺은 채 세상 떠난 최양의 비련(悲戀)’이란 제목으로 일대기를 전했다. 
    ‘동광’ 6월호는 ‘경제학사 최영숙 여사와 인도 청년과의 연애관계의 진상’이란 기사를 실었다.
    한국 여성 최초 스웨덴 유학생
    경제학사 최영숙
    최영숙이 태어난 해는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귀국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1년 1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그는 당시 27세였다. 이를 역산하면 최영숙은 1904년생이다. 조선일보는‘조선 초유의 여류 경제학사 최영숙양’이란 기사에서“서전(瑞典·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 양은 다섯 나라 말 을 능통하는 재원(才媛)”이라고 전했다. 당시 신문과 잡지 보도에 따르면 최영숙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여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네살 때 서울로 올라와 이화 고보(이화여고)를 졸업했다. 1923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남경(南京) 명덕(明德)여학교에서 1년간 중국어를 공부한 후 다시 회문(匯文)여학교에 입학 해 1926년 3월 졸업했다. 당시 최영숙은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존경했다고 한다. ‘동광’은 최영숙이 “중국 유학 당시 안창호의 교화를 입음이 막대하다”고 적었다. 최영숙은 1926년 9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웨덴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스웨덴의 여성 사상가 엘렌 케이(1849~1926)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엘렌 케이는 여성과 아동의 해방을 주창한 운동가이자 사상가다. 하지만 최영숙이 스웨덴에 도착했을 때 엘렌 케이는 이미“3개월 전(실제로는 5개월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최영숙은 스웨덴에 도착해“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학을 공부”하는 생활을 했다. 베개에 ‘자수(刺繡)’를 놓아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명문 스톡홀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30년 6월 경제학사 학위를 받았다. 최영숙은 졸업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이집트 카이로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인도로 가서 마하트마 간디(1869~1948)와 반영(反英) 민족운동을 펼친 여성 정치인 사로지니 나이두(1879~1949)를 만났다. 최영숙은 이때의 만남을‘삼천리’1932년 1월호에 ‘간디와 나이두 회견기-인도에 4개월 체류하면서’라는 글을 남겼다.
    ㆍ그녀가 사랑한 인도 청년은 누구? 최영숙이 사랑한 인도 청년은 누구였을까.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이 청년의 신원에 대해 엇갈린 보도를 하고 있다. ‘삼천리’는 최영숙의 일대기를 소개하면서 마치 본 것처럼 두 사람의 연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스웨덴 유학시절 만났다. 어느날 최영숙이 인도 남학생과 함께 강에서‘뽀드(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배가 뒤집혔다. 이 인도 청년은 물에 뛰어들어 최영숙을 구했다.
    최영숙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2년 4월 25일자
    삼천리는“최 양은 처음 이성의 품에 안겨보았고 그 청년 역시 이 세상에 나서 아마 처음으로 최양의 실신한 육체를 안아보았던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사랑이 변치 말기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삼천리’는 이 인도 청년이 ‘마하드 젠나’라고 이름까지 적었다. 하지만 잡지 ‘동광’의 보도는 다르다. ‘동광’은 “문제의 인도 청년은 아버지를 조선 사람으로 하고 어머니를 인도 여자로 한 혼혈아” 라며 ‘Mr. Row(盧氏·노씨)’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처음 만났고 최영숙은‘노씨’의 도움을 받아 인도에서 체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광’ 역시 소설 형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극화해 서술하고 있다. 아이 출산에 대한 이야기도 엇갈린다. ‘동광’은“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모체(母體)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산아(産兒)를 집어내고 세브란스 시료실(施療室)에 옮겼다가 4월 23일 오전 11시 반 한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반면‘삼천리’는“1932년 3월 최영숙 양은 인도인의 씨인 아이를 낳았습니다. (중략) 그만 산후의 조섭이 불량하였는지 간난애는 열을 발하며 수일동안 앓더니 끝끝내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라고 썼다. 최영숙은 아이가 사망한 직후“그만 자신이 병이 덜컥 들어 동대문 병원에 입원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동광’은 아이를 낳다가,‘삼천리’는 아이를 낳은 직후 최영숙이 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최영숙이 사랑한 인도 청년이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최영숙은 귀국 후 쓴 글에서 이 인도 청년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다. 최영숙은 조선일보 1932년 2월 3일부터 7일까지 5회 연재한 ‘인도 유람’이란 글에서 인도 청년에 대해 살짝 언급했다. 그는 2회 기사에서“나이두 여사의 생질이 되는 이로 애급(이집트)에서부터 우연히 동행이 되었고, 그동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친구”라고 이 인도 청년을 소개했다. 자신이 회견했던 사로지니 나이두의 조카였다는 것이다. 최영숙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다. 그는 영어·중국어·스웨덴어·일본어·프랑스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 후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서대문 밖 교남동에 작은 상점을 차리고 배추·감자·미나리 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삼천리’는“(최영숙은) 어학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그도 불가능하였고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文部省)의 교원면장(敎員免狀) 관계로 그도 불가능하였고 나중에 모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하다가 그도 여의치 못했다”면서“10년간의 외국 유학으로 얻은 지식을 팔기로 나섰으나 조선 사회는 아직 인테리 여성을 수용하기에 여유가 없었다”고 전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영숙 같은 엘리트 여성이 활동할 만한 공간은 없었다. 그의 죽음은 시대의 불행이었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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