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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악기 '장고'가 우리 것이 아니고 서역에서 전해온 것이라고?<주천3 >

浮萍草 2014. 5. 1. 09:27
    공자는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졌다
    ▲ 장가압 벽화묘에 그려진 요고(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가갑 벽화묘에는 묘주와 직접 연관된 벽화도 많다. 생활도, 연회도, 행렬도가 있는데 그중 연회도에는 4명의 악사와 2명의 곡예사 2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4명의 악사는 거문고를 연주하는 남자와 비파, 긴피리 장고를 연주하는 3명의 여악사로 구분된다. 그중 우리의 악기라고 생각되는 장고에 눈이 간다. “어! 저것은 장고가 아닌가?” “맞아요. 장고입니다.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이지요.” “서역?” “네. 장고뿐 아니라 비파나 피리도 다 서역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장고는 우리의 대중적인 악기다. 그런데 장고가 우리의 악기가 아니라니.의아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에는 정가갑 벽화와 똑같은 순서로 악사가 그려져 있는데 마지막에 장고가 없다. 고대 우리나라의 향악편성을 보아도 삼현삼죽(三絃三竹)이라 하여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중금,소금에 큰북(大鼓)과 박(拍)이 포함될 뿐 장고는 없다. 장고는 중국의 악기에도 없는데 문헌에는 ‘요고(腰鼓)’라고 했다. 허리 부분이 가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듯하다. ‘악학궤범’에 보면, “요고의 통은 큰 것은 질그릇으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머리는 모두 넓고 허리는 가늘다. 오른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친다. 후세에는 이것을 장고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ㆍ서역인의 심금을 울리는 ‘장고’로 발전
    우리나라에 장고가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로 당시 중국은 송나라 때였다. 초기에는 조정의 당악에 쓰였지만 그 후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악에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장구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악기가 되었는데 이는 전래 당시의 요고를 우리의 음악과 체질에 맞게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신을 부르는 소리’,‘신과 동화되는 소리’라는 사물놀이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니 그 핵심 악기가 바로 장고인 것이다. 이처럼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전래된 요고는 우리나라에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장고로 다시 태어났다. 대금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중국의 당적(唐笛)을 모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서역의 횡적(橫笛)이 중국으로 전해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반면, 우리나라는 보다 길어지고 커졌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신체적으로 서역인보다 작은 체구임에도 악기는 왜 커졌을까? 그것은 우리의 전통음악이 저음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악기가 짧고 작으면 고음을, 길고 크면 저음에 강하다. 중국의 악기가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길고 커진 것은 저음 위주의 우리 음악에 맞추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대금은 중국의 당적(42㎝)보다 길어졌고(61㎝) 장고도 고구려 때의 요고(42㎝)보다 훨씬 길고(70㎝) 커졌다. 시대가 지날수록 우리의 음악성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이는 두 나라가 선호하는 악기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은 금(琴), 비파, 호적(胡笛) 등 고음역 악기를 선호하고 우리는 거문고, 대금, 아쟁 같은 저음역의 악기를 선호한다. 거문고와 가야금도 크기가 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인데 비파는 고음 위주의 악기인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도태된 것이다.
    ㆍ공자는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졌다
    공자는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은 곧 공자의 인학(仁學)을 완성하는 최고 경지였기 때문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의“시를 배워 일어나고 예를 배워 바로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라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좋아했다.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으니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깊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소에 대해 평하길 “소리의 아름다움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선함도 지극하다.”라고 했다.
    ▲ 공자가 순임금의 음악 소를 들은 곳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였다. 순임금의 음악은 고음보다는 저음 빠름보다는 느림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추구한 음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음악을 좋아하고 또한 즐길 줄 알았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공자의 말 그대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K-POP도 유구히 내려온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음악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가갑 벽화묘를 나오니 날은 더욱 흐리고 어두워졌다. 갈 길이 바쁜지라 곧바로 차에 올랐다. 15분 정도 떨어진 신성(新城) 벽화묘를 하나 더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 귀한 지역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이 먼 이역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마냥 기쁘다. 신성 벽화묘도 위진(魏晉)시대의 묘다. 1972년에 발굴을 시작했는데 총 13기의 묘 가운데 8기의 묘에서 660개의 그림이 그려진 벽돌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출토된 그림들이 모두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소박하고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중에서도 당시의 농업과 여가문화가 반영된 화상전(畵像磚)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ㆍ고고분야의 진정한 프로는 ‘도굴꾼’
    정가갑 묘처럼 자갈밭에 우뚝 선 입구로 들어가니 지하 30여 미터의 묘도가 나온다. 정가갑의 묘가 전후실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이곳은 전실,중실,후실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묘들은 도굴의 아픔을 갖고 있다. 신성 벽화묘 역시 도굴 당하였는데 도굴꾼들이 파고 들어온 구멍이 묘실 입구다. 돔형으로 만든 묘실을 천장이 아닌 출입문 바로 위로 뚫었다는 것은 묘실의 구조를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기야 역사적인 유물의 발굴지에서 위치 선정이나 입구를 찾아내는 진정한 프로는 도굴꾼이라고 하지 않던가.
    ▲ 신성 벽화묘 부분

    묘실(墓室)의 그림들은 대부분 생활상을 묘사한 것들인데 수렵,출타,접객,농경,양잠,상업,가축도살, 요리 등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흔히 보이는 내세의 안녕을 비는 신화적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위진 시대는 조조가 위세를 떨치던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염이 위나라를 이어받아 진(晉)을 세운 시기다. 당시 조조의 위나라는 이곳까지 영토를 넓혔는데 워낙 변방인지라 문화적 수준은 중원보다 훨씬 뒤졌을 것이다. 또한 수시로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조상을 모시는 일은 그리 여유롭고 평안한 것은 못된다. 묘실의 벽화가 벽돌 단위로 구성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리라. 벽돌의 크기가 가로 34.5센티미터에 세로 17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그곳에 신화적인 소재를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채로운 그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황소에 써레를 사용하여 농사짓는 모습인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미 선진적인 농법을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다른 하나는 뽕나무에서 뽕잎을 채취하는 그림이다. 양잠을 했으니 뽕나무 그림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그림이 정가갑 벽화묘에도 있다는 게 특이하다. 이곳은 메마른 사막인데 뽕나무 그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는 지금의 기후가 메마른 것이지 5호16국시대만 하더라도 뽕나무가 자랄 만큼 습윤 기후지대였다는 의미다.
    ▲ 써래질하는 모습의 화상석

    ㆍ文明,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파괴하고 얻은 산물
    고대에 있어 살기 좋은 곳은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고 기후도 좋아 먹을거리도 풍성했다. 때문에 사람들도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씨족공동체사회에서 부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사람들은 국가의 위상에 맞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삼림의 파괴가 시작된 것이다. 삼림의 파괴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는 농작물 경작이 삼림을 태워 얻은 화전(火田)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고대문명이 발달한 곳은 황하유역과 섬서,산서,하남,하북 등 모두 북방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서주(西周) 때만 해도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맹자’ ‘등문공(하)’편에는 이를 증명하는 글귀가 보인다.
    ▲ 뽕나무에서 뽕잎 채취하는 화상석

    “숲, 못, 늪지가 많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모여들었다. (중략) 주공이 무왕을 도와 주(紂)를 물리치고 엄(奄)나라를 토벌했으며 그 임금을 3년 만에 죽이고 비렴(飛廉)을 바다로 쫓아냈다. 또한 50개의 나라를 정벌하고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을 멀리 몰아내니 천하가 기뻐했다.” 삼림지대에 사는 동물들이 도처에 있었음은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제작된 청동기에는 코끼리, 물소, 호랑이, 표범 등이 많이 보인다. 하남성을 ‘예주(豫州)’라고 불렀는데, ‘예’란 커다란 코끼리를 뜻하는 글자다. 하남성도 코끼리가 살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죽림칠현’이나 판다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북방지역에도 대나무가 울창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으면 서한 때 황하의 제방이 터졌을 때 대나무로 방죽을 만들어 물막이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겠는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나라가 흥망 하는 동안 삼림은 황폐해졌다. 그 결과 북방지역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은 급속히 사라지고 옥토는 점차 모래와 자갈뿐인 황무지로 바뀌었다. 인간들의 욕심이 인간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이다. 신성 벽화묘를 보고 나오니 바람이 거세게 분다. 이 거센 바람을 피하는 길은 빨리 하서주랑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옛 상인과 병사 등이 그랬듯이 가욕관에 도착해 비바람에 절은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이다. 가욕관으로 가는 짧은 시간의 도로 주변도 온통 황폐한 평원이다. 산림의 파괴로 생긴 빈자리를 바람이 모래와 돌을 실어와 채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인간이 만든 문명의 흔적인 성벽과 봉수대도 바람이 실어온 모래와 돌에 묻히고 허물어졌다. 인간사도 결국 자연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자연은 저토록 처절하게 알려주는 것인가.
    Premium Chosun ☜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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