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27 주천공원에서 술의 역사를 둘러보다.<주천1>

浮萍草 2014. 4. 3. 10:30
    주왕, 주지(酒池)와 육림(肉林)에 빠져 음탕한 술자리 낮밤으로 넉 달을 지속하더니…
    수성에서 물과 식량 등을 준비한 실크로드 상인들은 70km 떨어진 낙타성에 와서 다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 상인들의 발길을 따라 낙타성을 향한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낙타성향(駱駝城鄕)으로 접어드니 길은 또다시 메마른 사막길이다. 
    성터 입구에는 제멋대로 자란 낙타풀이 사람의 발길이 귀찮다는 듯 따가운 햇살에 잔뜩 독기를 내뿜으며 노려보고 있다.
    ㆍ낙타성을 찾아가다
    낙타성은 동진(東晉)시대인 397년에 건축되어 오량 시기를 거쳐 당나라 때까지 사용되었다. 동서 425m, 남북 704m의 장방형으로 된 커다란 고성이다. 낙타성은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남성의 서쪽 모퉁이에는 별도의 작은 성을 쌓았다. 북성에는 동·서·남쪽으로 문이 있는데 모두 옹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 모서리마다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사방에서 오는 적들을 감시하였다.
    ▲ 폐허의 낙타성 모습

    성 안으로 들어가니 불에 탄 토기 파편과 부서진 벽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주인들에 의해 부서지고 재건되고 다시 흩어진 흔적이겠지만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던 성이니 결코 평화롭게 이어오지만은 않았으리라. 흑수성보다도 큰 성을 둘러보며 이곳에 터를 닦은 오량(五凉) 정권의 막강한 경제력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낙타성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무엇보다도 교역지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낙타성을 차지하는 것은 경제적 부를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오량 정권은 낙타성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였을 테고 때문에 인근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낙타성으로 몰려들었으리라.
    ㆍ酒泉, 샘물이 술맛 같은 도시
    기련산의 북쪽에 위치한 주천(酒泉)은 장액에서 226km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숙주(肅州)라고 불렸다. 기련산 빙하에서 흘러내린 백하(白河)가 지하로 흘러와서 주천 시내에서 솟아나는데 물맛이 아주 좋다. 주천의 옛 이름은 금천(金泉)인데“어떤 사람이 샘물을 마시고 보니 금색이었다. 그 물을 가져다가 햇볕에 말려 금을 얻었다. 그래서 금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말이 전해온다.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도 말하길,“도성 아래 금천이 있으니 샘물 맛이 술과 같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주천이라는 명칭은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의 본거지인 기련산을 공략하여 휴거왕과 혼야왕을 물리치자 한 무제가 곽거병의 공적을 치하하며 어주(御酒)를 하사하였다. 황제가 하사한 술이 모든 병사에게 돌아갈 수 없자 샘에다 붓고 그 물을 마셨는데 샘물이 모두 술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천은 주천이 되었다.
    ▲ 주천 샘물

    시내에 있는 주천공원을 찾았다. 오늘날의 도시 이름이 탄생한 샘물이 솟아나는 곳인데 지금은 천호공원(泉湖公園)이라 부른다. 주천공원은 천연호수에 원림(園林)을 건축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내세워 주천을 한껏 자랑한다.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天若不愛酒 주성(酒星)이 천상에 없었을 것이고酒星不在天 대지가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地若不愛酒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도 없었으리라地應無酒泉
    술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아마도 인류의 문화사는 술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맨 처음 누가 만들었을까? 술의 탄생은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즉 먹다 남은 곡물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진한 향기를 내자 인간들이 그것을 먹어보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문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까닭에, 기록된 시점은 아마도 훨씬 이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상나라 시대에 이미 술이 대량으로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왕(紂王)의 유명한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가 이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 주천공원 입구에 있는 이백의 시 월하 독작

    ㆍ‘酒池肉林’의 허와 실
    주왕은 상나라 마지막 왕이다. 망국의 군주가 그렇듯이 주왕도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폭군들의 공통점은 술과 여자다. 이를 간파한 제후국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주왕의 마음을 쏙 빼놓을 여자를 공물로 보냈는데 그 여인이 바로 희대의 독부(毒婦)인 달기(妲己)다. 달기의 용모는 선녀와 같았고 춤과 노래 또한 잘하였다고 하니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달기는 주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독부답게 자신의 끝없는 욕망과 흥미로움을 즐기기 위하여 무엇이든 거침없이 행동했다. 달기에 정신이 빠진 주왕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주문왕의 아들인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그 살로 만두를 만들어 아버지인 주문왕이 먹도록 하고 충신인 비간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병을 고치는데 그의 간이 필요 하다고 모함했다. 또한, 별궁에 연못을 만들고는 그곳에 술을 가득 채워 주지(酒池)를 만들고 나무에 고기를 매달아 육림(肉林)을 만들었다. 그 주변을 알몸의 남녀가 뛰어 놀며 음탕한 춤과 놀이를 하게 하였다. 음탕한 술자리는 낮에도 장막을 치고 그칠 줄 몰랐으니 넉 달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주왕은 달기의 말도 안 되는 모함을 기꺼이 받아준다. 정녕 주왕은 달기의 분신이라도 되었던가.
    ▲ 주천의 정자

    주왕은 원래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처음엔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명한 왕이었다. 그런데 여러 제후국을 정벌하고 왕권이 강화되자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달기라는 요부이자 독부가 주왕의 곁에 있게 되자 정사(政事)를 그르치고 망국의 길로 치닫는다. 세상을 차지하는 것은 남자라지만 그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여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달기라는 여인도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대로 주물렀으니 스스로의 욕망을 채운 셈이다. 하지만 달기로 인해 비롯된 주왕의 폭정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정치적인 빌미를 주게 된다. 주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周公 旦)이 상을 정벌하기 위한 명분도 바로 이로부터 시작되니 그에게 있어서 달기는 상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필요한 방법이자 도구였던 셈이다.
    ▲ 영화 달기 포스터
    ㆍ역사의 죄인은 ‘망국의 군주’
    망국의 군주는 치욕스런 삶만 부각된다. 포악,사치,음란 등으로 매장되어 역사의 죄인이 된다. 정녕 망국의 군주는 포악하였던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터이다. 승자에 의해 각색된 역사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주문왕의 아들인 백읍고의 죽음만 해도 그렇다. 백읍고가 달기의 모함에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명나라 때의 소설인‘봉신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야기꾼들은 주 무왕이나 주공 단은 백읍고의 동생들이니 억울한 죽임을 당한 형의 원수를 갚는 것은 정당 하다는 명분론을 내세워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각색한다. 대중들은 어려운 역사책보다 쉽게 접하는 소설책의 내용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믿게 된다.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 ‘삼국지연의’를 마치 역사서로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지육림에서 남녀가 알몸으로 뛰어 놀며 음탕한 춤과 놀이를 하였다는 것도 잘 파악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혼인제도가 성립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환락곡(歡樂谷)이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풍습이 있었다. 즉,어느 한 시기와 장소를 정해서 남녀가 숲에서 뛰노는 풍습인데 주나라 초기에도 인정하던 풍습이었다. 유교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 되고 이는 곧 망국의 군주가 짊어지는 악행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악행을 패자의 것이 되게 하고 패자의 선정도 승자의 것이 되게 바꿀 수 있다. 역사의 행간과 이면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ㆍ오늘도 반복되는 중국인들의 역사의식
    공원 안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커다란 버드나무 옆에 주천이라 쓴 우물이 있다. 곽거병이 한 무제로부터 하사 받은 술을 샘에 부었더니 샘이 모두 술이 되어 모든 병사들이 술을 마셨다는 샘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우물을 들여다보니 물이 참 맑고 깨끗하다. 누군가 넣어놓은 금붕어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우물이 지금도 깨끗한 것은 우물 밑에서 샘물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물 앞 쪽에는 거대한 부조물을 설치하였는데 살펴보니 무제가 흉노를 무찌른 곽거병에게 내린 술을 샘에 부어서 모두가 즐거운 모습으로 건배(乾杯)를 하는 모습이다.
    ▲ 석기에 새겨진 곽거병과 주천의 역사

    주천공원의 호수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정자에 ‘서한주천성적(西漢酒泉胜迹)’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보인다. 석비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석비 뒷면에는 곽거병이 이곳 샘물을 술샘으로 만든 이야기를 새겨놓았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유적지에 산재한 전설을 역사인양 새겨놓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어느덧 역사로 굳어져 버리기 일쑤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희한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누가 문제를 제기해 거짓이 드러나도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사마천의 ‘사기’로부터 이곳 석비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생각은 수천 년을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Premium Chosun ☜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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