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26 고대 黑水國을 찾아서<장액4>

浮萍草 2014. 3. 27. 09:37
    왜 흑수성은 폐허가 됐을까?
    중후한 느낌의 장액 목탑
    액 시내에 있다는 목탑을 보기 위해 시민광장을 찾았다. 30m가 넘는 탑이어서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비둘기 떼가 어둑어둑해지는 목탑과 광장 주변을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로 더욱 아수라장이다. 그 옆으로는 강택민 전 주석이 쓴 “금장액의 영광을 되찾자”라는 글씨가 보인다. 광장에 있는 목탑은 높이가 33m인 8각9층탑이다. 7층까지는 벽돌로 쌓고 처마만 나무로 만들었다. 원래 이곳에는 만수사(萬壽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목탑만 남은 채 광장으로 변하였다. 목탑이지만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묵직한 느낌이다. 이 탑은 수나라 초기에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청나라 말기에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1926년에 재건한 것이다.
    ㆍ서너 명만 모이면 춤추는 중국인들 널따란 광장은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족히 500~600명은 됨직한 여성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장액시 건강무용지도단이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건강생활을 위한 무용지도다. 늘 반복해서 그런지 그들의 춤은 가무단의 공연처럼 일사분란하다. 중국을 여행하노라면 이런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양한 춤을 춘다. 맨손체조, 사교춤, 부채춤,기공체조인 태극권,칼이나 창을 휘두르며 추는 춤에 이르기까지 모든 춤이 다 있다. 특히 이들은 새벽에 가장 많이 춤을 추는데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춤추는 것을 보기로 마음만 먹으면 출근 때건 한낮이건 수시로 볼 수 있으니 중국은 춤을 좋아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건강지도무용단과 춤추는 중국인들

    춤은 인간의 자유로운 삶과 영혼을 표현하는 행위예술인데 어째서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을까? 중국은 억압된 체제,경제적 궁핍,부패의 만연,빈부격차의 증대 등으로 인하여 정부 당국을 바라보는 국민들 다수의 시선이 곱지 않다. 이 때문에 체제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건강무용이라는 미명 아래 가가호호 불러내어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 최대의 인구를 다스리려면 공산당이라는 1당 독재의 제국주의적 지도력을 가지고 ‘상명하달’하고 ‘책임완수’하는 국민치안 유지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과거 우리도 군사정권 시에 무수한 인력동원과 체제교육을 받지 않았던가. 자고로 자신들의 방식이 떳떳하지 못하고 어딘가 구린 곳이 있으면 옥죄고 설쳐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구린 곳을 도려내지 않고 가리려고만 하니 곪고 썩어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ㆍ黑水國을 찾아서 장액 시내를 빠져나와 서북쪽으로 30여분을 달렸다. 흑수국(黑水國) 성터를 보기위해서다. 부근에 흑하(黑河)가 흐르기 때문에 흑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성은 한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사용된 고성으로 지금은 폐허인 채로 버려져 있다. 국도에서 4km 안쪽에 있는 흑수성을 보러 가는 오솔길에도 이미 심각할 정도로 사막화현상이 진행되어 있다.
    사막화 현상이 심각한 흑수성터

    인간의 문명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가보다. 흑수성은 원래 동서 245미터, 남북 220미터 크기의 성이었다. 하지만 사막화현상이 심해지면서 지금은 대부분이 모래에 묻혀 있다. 그나마 남쪽의 성보(城堡)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흑수성도 판축을 쌓아서 만든 성이다. 그런데 일부 성벽은 벽돌로 덧쌓은 흔적이 선명하다. 명나라 때에 무너진 성벽을 벽돌로 보수했다는 증거다. 폐허가 된 성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흑자,백자,청자 등 도자기 파편들에 아롱져 있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답게 역참이 있었다. 당나라 때는 공필역(鞏筆驛),원나라 때는 서성역(西城驛), 명나라 때는 소사하역(小沙河驛)이라고 불렸다. 당시 서역인들을 비롯해 많은 교역상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온갖 물품들을 거래하였으리라. 또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서역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들도 함께 상주하였으리라. 이 성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서유기’와 ‘삼국지연의’의 고사(故事)를 묘사한 벽화도 있는데 이는 흑수성의 활동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흑수성 주변에는 한나라 때의 묘지들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것은 여지없이 도굴되었다.
    ㆍ전설만 뒹구는 페허의 흑수성 흑수성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이곳을 찾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을 만났다. 왕장(王將)이라는 장액일보 기자인데 흑수성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곳 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 한 가지를 들려준다.
    흑수국 고성

    “옛날 불심이 높은 고승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은 흑수성이 폐허가 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려고 하였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지요. 하루가 다르게 서역물품이 오가고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는 흑수성이 폐허로 변한다니 누가 믿겠습니까. 게다가 스님이 대추와 배를 가지고 다니며 시주를 하니 모두의 비웃음만 받을 뿐이었지요. 스님이 대추와 배를 가지고 다닌 까닭은 중국어 발음으로 대추는 ‘일찍’,배는 ‘떠나라’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사라지고 난 후 흑수성에 풍사(風沙)가 몰아쳐서 이처럼 폐허가 되었답니다.” 실크로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 길이다. 그러하기에 실크로드에는 인간의 흥망성쇠가 오롯하게 살아있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실크로드를 따라간다. 인간이 남긴 발자취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크로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랑, 이별, 믿음, 배신 등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인간의 심사(心史)가 곳곳에 배어 있음도 보아야 한다. 공자는 정치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제자 자공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백성을 배불리 먹여야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하며, 신의를 지켜야 한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묻는다. “셋 중에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무엇부터 없애야 합니까?” 공자는 거침없이 답한다. “군대를 없애야 하느니라.” 자공이 또 하나를 없앤다면 무엇을 없애야 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먹는 것이다.”
    ㆍ‘愛民’ 모든 위정자들의 근본사상 인간은 너나없이 사랑받기 위하여 산다. 사랑이 없는 삶은 모래바람 거센 폐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중한 단비와 같다. 하지만 사랑도 믿음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사랑은 일희일비하다가 결국 이별과 배신으로 끝나버린다. 견고한 믿음은 진실함에서 나온다. 나와 상대방의 진실함이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될 때 믿음은 굳건해진다. 이런 믿음이 바탕이 된 사랑은 천하를 다주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견고한 것이다.
    기와와 토기 파편만 무성한 폐허의 흑수성

    정치도 애민(愛民)이다.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도 애민이다. 부처의 말씀도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니 ‘애민’하는 것이 곧 신심을 돈독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나 종교의 애민도 그 근원은 모두 믿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사랑이 신실한 믿음일진대 천하의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어찌 일반적인 믿음일 수 있겠는가. 위정자나 종교인의 믿음은 모름지기 인고의 아픔을 견뎌내며 용광로처럼 끓어올라야만 하는 것이리라. 애민이 사라지면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석양이 실크로드에 걸린다. 흑수성의 모래밭을 빠져나와 다시 길 위에 선다. 바쁜 걸음과는 다르게 마음은 언지산이 그립다. 다시금 뒤를 돌아 멀리 기련산맥을 바라본다. 저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 중심에 푸르른 언지산이 있는 줄 누가 알았으랴. 초록빛 산록에 붉은 꽃 만발해도 정상에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언지산. 이토록 평온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피 흘리며 싸워야 했던가. 그래서 평화로운 초원도 병사들의 넋을 달래는 듯 해마다 붉디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리라. 시선 이백이 어느 늦은 가을날 언지산을 찾았다. 그리고 ‘추사(秋思)’라는 시 한수를 지었다. 이백은 언지산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연지산 낙엽 지는 계절燕支黃葉落 떠난 님 보고자 대에 높이 올랐거늘妾望自登臺 푸르른 구름 청해 언저리서 끊겼고海上碧雲斷 서역 땅 추워지니 오랑캐 몰려오겠구나.單于秋色來. 이미 서역 군사들이 사막지대에 왔다고胡兵沙塞合 한나라 사신이 옥문관에서 전해오니漢使玉關回 전쟁 가신 님 더더욱 돌아올 날 멀어져征客無歸日 시들어 가는 난초에 서글픔만 더하는구나.空悲蕙草摧.
    수시로 벌어지는 전쟁은 사람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게 한다. 전쟁터로 떠난 님을 그리는 여인의 삶도 긴장의 연속이다. 님은 행복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떠났지만 여인은 행복하지 않다. 그림 같고 풍요로운 생활터전도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굳게 믿는 것이고 행복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배운다. 어느 것 하나 아픔 없이 이뤄지는 것이 없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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