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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 '샘터사'의 추억…

浮萍草 2014. 4. 4. 06:00
    최인호 선생의 惡筆, 그리고 나를 기죽게 했던 작가 한강
    의 첫 직장은 ‘샘터사’입니다. 
    서울 대학로 한복판, 마로니에 공원 옆에 있는 담쟁이 넝쿨 늘어진 붉은 벽돌 건물을 보신 적 있는지요.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 선생이 지은 4층 건물에서 저는 1991년 10월부터 1995년 5월까지 월간 샘터 기자로 일했습니다.
    샘터에서 저는 문학적 감수성을 원없이 길렀던 것 같습니다. 
    환경이 그랬습니다. 
    저의 사수 그러니까 월간 샘터의 편집장이 돌아가신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이었습니다. 
    시인 김형영 선생이 단행본을 내는 출판부장이었고 소설가 정찬주 시인 박몽구 선생은 당시 출판부와 월간 샘터의 차장을 맡고 계셨지요. 
    시인 피천득, 법정스님을 비롯해 이해인 수녀 소설가 최인호 등 샘터는 당대 글쟁이들과 문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이었습니다.
    ㆍ 오타 나면 불벼락 날리던 법정 스님, “나 그리 무서운 사람 아니야” 저는 법정스님의 ‘산방한담’ 원고와 최인호 선생의 연재소설‘가족’원고를 담당했는데 두 분 다 특이한 캐릭터라 애를 먹었습니다. 법정스님은 조사 하나라도 오타가 나면 불벼락이 떨어지니 눈에 불을 켜고 교열을 보아야 했습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가끔 서울로 출타를 나오시면 법련사나 맑고향기롭게 운동본부에 가서 ‘알현’을 했습니다.
    2008년 11월 생전의 법정스님.

    무릎을 꿇고 바짝 얼어 있는 저를 보고 ‘편히 앉아요. 나 그리 무서운 사람이 아니야’ 하며 빙그레 웃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법정스님이 오래 수행하셨던 송광사 불일암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스님 대신 불일암을 지키던 젊은 상좌스님의 안부를 전하자 법정스님이 혀를 쯧쯧 차며 이러십니다. “그 놈이 또 뭐라고 사기를 치던고?” ‘사기’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서울서 온 손님 접대한다고 구멍난 양말을 신은 채 부엌을 들랑거리며 된장찌개 끓이시던 상좌스님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습니다. 최인호 선생을 떠올리면 작은 키와 파이프 담배,그리고 ‘악필’ 원고가 생각납니다. 원고 마감날이면 샘터사로 와서 파이프 담배를 연신 피우며 골방에서 글을 쓰셨지요. 두시간여 지나면 원고지와 함께 녹음기를 들고 나오시는데 저의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워낙에 악필이라 원고만 보고는 도통 정서(正書)가 불가능하여 반드시 녹음기가 필요했습니다.
    ㆍ 파이프 담배 피우며 골방에서 글 쓰던 최인호 선생의 악필 원고 최인호 선생이 일단 글을 쓴 뒤 자기 글을 소리내어 읽어 녹음시키면 그 테이프를 제가 받아 다시 들으면서 녹취를 푸는 작업이었지요. 아랍어처럼 라면땅 굴러가는 듯한 글자들을 선생 자신은 알아본다는 게 늘 신기했습니다. 한편으로 당신의 악필 습관을 고치면 이중삼중의 작업을 안해도 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 의문을 최인호 선생과 함께 부산 이해인 수녀님 계신 베네딕도 수녀회를 찾아갈 때 풀었습니다. 새마을호 기차 안이었을까요? 제가 조심스럽게 “글씨를 왜 그렇게 이상하게 쓰세요?” 하고 물으니 최인호 선생이 답하십니다. “아, 내 악필? 내 손이 내 머릿속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하하!” 필이 꽂히는 순간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이야기의 속도를 손글씨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과연 천재구나, 생각했지요.
    생전의 소설가 최인호씨. 그는 2012년 6월 암투병을 하면서도 소설을 출간했다.

    샘터를 떠나 신문사로 옮긴 뒤 한동안 뵙지 못하다가 우연히 최인호 선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상하이 공항이었지요. 저는 상하이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최 선생은 중국 관련 대하소설을 쓰시기 위해 대륙을 여행하시던 중이었습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하며 저를 포옹해주시던 선생은 제 얼굴을 잠시 살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단단해졌어. 샘터 꼬마기자였던 때보다 단단해지고 강해졌어.” 그 후로는 신문 지면에서 문학담당 기자들의 글을 통해서만 소식을 전해듣다가 작별의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선생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습니다. 샘터, 하면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저와 동갑내기인 시인이자 소설가 한강입니다. 이미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을 거머쥐었고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후보로도 매해 오르고 있는 대단한 작가입니다. 샘터 입사로는 제가 선배인데도 저는 늘 한강씨에게 주눅들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우선, 아름다웠습니다. 긴 생머리에 고전적인 미모를 지닌데다 말없이 수줍은 미소를 피워내는 그녀를 보면 여자인 저도 가슴이 설렜으니까요.
    ㆍ 내게 콤플렉스를 안겼던 작가 한강 소설가 한승원 선생을 부친으로 둔 그녀가 20대에 이미‘시인’으로 등단한 작가였다는 것도 제겐 큰 컴플렉스였습니다. 문인들 사랑방이었던 샘터에서는 일개 기자들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적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닌’ 저는 이래저래 기가 죽었습니다.
    소설가 한강.

    실제로 한강은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절감하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샘터 젊은 직원들이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당일 소풍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다들 흥이 나서는 바닷가에서 게임을 하거나 바위 위에 올라앉아 노래를 부르고 농담따먹기를 했는데 어느 순간 한강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둘러보니 저 멀리 혼자서 천천히 해변을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지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우리가 목청을 돋워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리고 철이 없던 저는 ‘대체 저 친구는 무슨 생각이 저리 많을까 외롭지 않나?’ 하는 의문만 들었지요. 그 해 겨울, 우리는 매우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한강이 신춘문예 소설 분야에 응모했는데 신문사 한 곳도 아니고 두 곳(동아일보·서울신문)에 동시 당선된 것입니다.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서울신문 당선작인 ‘붉은 닻’이 지난 여름 우리가 엠티를 갔던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하하호호 웃고 떠들던 그 시간에 그녀는 하나의 위대한 작품을 건져올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샘터는 저에게 문학의 우물과도 같은 곳입니다. 샘터에서 일했던 시절이 저에겐 순수의 시대, 낭만의 시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빨간 벽돌 4층에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과 민현식 선생의 사무소가 세들어(?) 있었는데 출퇴근길 그 좁은 샘터사 계단을 오르내릴 때 이 멋쟁이 건축가들을 마주 치면 또 가슴이 설레곤 했습니다. ‘건축가들은 왜 하나같이 곱슬(파마)머리에 김구안경테를 쓰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그 시절 처음 갖게 되었지요. (아주 나중에, 서울시청 신청사 설계한 유걸 선생에게 들어보니 서양건축의 대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가 그런 모양의 안경을 즐겨썼다는군요.ㅋㅋ) 지금은 사라진 ‘밀다원’ 커피숍도 참 그립습니다. 커피맛 좋기로도 유명했지만 대학로의 사계(四季)를 민낯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통유리창 정경이 정말 좋았습니다. 샘터 창립자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고건 전 총리 등 원로 정치인들이 매일 아침 밀다원에서 담소를 나누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정객들이 떠나고 나면 승효상, 민현식 선생 등 대학로에 둥지를 틀고 있던 건축가들이 모여 커피를 마셨고 뒤를 이어 샘터에 볼일이 있는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들이 또 커피를 마시러 밀다원에 모여들었지요. 20년 전 사수였던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은 제가 샘터를 떠나 신문사로 자리를 옮길 때 진심으로 걱정해주었습니다. “샘터가 오솔길이라면 신문사는 아스팔트 길이야. 넘어지며 무릎을 다쳐 피가 날 수도 있으니 잘 견뎌야 해.” 지금도 이 말씀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10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정채봉 선생이 지금의 저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 궁금해지면서요.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 우주전까지 다 겪은 대한민국의‘진짜 아줌마’가 되어 웬만한 생채기엔 눈도 깜짝 안하는 저를 보면 슬퍼하실까요, 기뻐하실까요? 샘터는 저에게 영원한 그리움입니다.
    Premium Chosun ☜       김윤덕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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