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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강보다 성스럽고 바티칸보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聖地, 그 이름은 목욕탕

浮萍草 2014. 4. 3. 06:00
    요일 오후, 집 앞 동네 목욕탕.
    한증막에서 온몸을 벌겋게 익혀 나와서는 냉탕에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나오는데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유황탕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던 30대 후반, 아니 40대 초반의 여인입니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 살며시 고개를 돌립니다. 
    다시 이슬사우나에 도전했다가 땀을 비오듯 흘리며 나오는데 그녀가 이번엔 정면에서 날 바라보다가는 이내 시선을 돌립니다. 
    그새 녹차탕으로 옮겨가서는 말이지요. 
    뭔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인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찬물을 끼얹은 뒤 다시 한증막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웬일입니까. 
    이번엔 그녀가 따라들어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헐~ 60도가 넘는 불가마인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옵니다. 
    이건 뭐지? 
    설마, 이 여인이 말로만 듣던 도 동성애자? 
    ‘오 주여!’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옆자리에 살포시 수건을 깔고 앉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여차 하면 쏘아붙일 태세로 전의를 다지는데 이 여인 매우 민망하고 죄송하다는 듯 조심조심 묻습니다.
    “저, 등 좀 밀어주실래요?”
    
    #
    저는 목욕탕 매니아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동네 목욕탕에 가서 열탕과 냉탕의 반전을 즐기며 두세 시간 물놀이하다 오는 것이 삶의 낙입니다. 
    목욕탕을 사랑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줌마병법’에 쓸 글감을 목욕탕에서 얻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탕 속 혹은 한증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여인들이 시시콜콜 주고받는 수다 속에 배꼽 잡는 유머와 넉살 어느 석학도 따르지 못할 인생의 지혜와 성찰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멀리서 웬 총각이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오는겨. 누구인지 도통 생각이 나야 말이지. 
    슈퍼 총각인가? 중국집 배달부였나? 
    도무지 모르겠어서, 코 앞까지 온 그 총각한데 물었지. 
    ‘근데 누구시더라아~?’ 그러자 총각이 이러는 거지. ‘희영이 담임입니다, 어머님’”
    한증막에 왁자한 웃음이 터집니다. 
    도마 위에 오르는 건 짜장면 배달부로 오인된 담임뿐만이 아닙니다. 
    처갓집에 제물로 갖다바친 아들 비행기 태워준다더니 시집가자마자 함흥차사 된 딸내미 늘 말만 앞서지 공수표만 날리는 며느리 제 자식 봐주는데도 냉장고에서 
    뭘 가져가나 싶어 도끼눈을 뜨는 사위 매일 밤 중학생 아들을 잡는 옆집 여자 드라마 보며 마누라보다 더 많이 우는 늙은 남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일러스트 / 김도원 화백

    편견인지 모르지만 강북 한증막과 강남 한증막에서 오가는 화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코끝에 ‘강남바람’쐬고 싶은 날 신사동에 있는 여성전용 스파에 가끔 가기도 하는데 한고은 홍진경 이영자 등 연예인들의 단골 사우나이기도 해서 운이 좋으면 예상치 못한 ‘눈호강’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여튼 모두 벌거벗은 상태이니 겉만 보고선 빈부를 가늠할 길 없지만 신사동 한증막에서는 이문동 한증막에선 듣기 힘든 화제가 오갑니다. 바로 주식입니다. 요즘 뜨는 기업의 생경한 이름들이 오가고 잘못 투자해 망하고 흥한 지인들의 근황이 오갑니다. 100을 날렸네, 1000을 벌었네 운운할 때는 누가 들을까, 목소리 볼륨을 잔뜩 줄입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강남 줌마들 내공이 대단해보이는 순간입니다. # 시골 목욕탕의 풍경은 서울과는 또 다릅니다. 인심이 후하겠지,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낯선 시골 한증막에 들어갈 땐 ‘몸가짐’을 바로해야 합니다. 관광객 대상이 아니라 동네 목욕탕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텃세! 텃세가 어찌나 심한지 마음놓고 찜질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단양 대명콘도 사우나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절반 이상이 단양팔경 구경온 외지인들일텐데도 열명 남짓 안되는 토박이 단골들의 눈치를 봤습니다. 샤워를 안하고 탕에 들어가 온천물이 오염되네 제 집 목욕탕 아니라고 피같은 물을 낭비하네 생긴 것마냥 목욕한 뒤끝이 지저분하네 등등‘도시 것’들을 향한 잔소리를 옴팡 뒤집어쓰기 십상입니다. 친정집 있는 청주의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얼음 동동 띄운 냉커피를 양은 그릇에 한냄비 타서는 무슨 조폭집단 의식 치르듯 돌려가며 마십니다. “첨 보는 언니도 마실라우?” 하길래 잔뜩 졸아 고개를 저었더니 구석에 있던 한 여인이 그럽니다. “서울내기덜은 이런 거 안마셔어~. 원두. 아녀, 그 뭐냐, 아메리카노만 마신다잖여.” 입도 뻥긋 안했는데, 서울에서 온 건 어찌들 아셨는지….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에 땀구멍이 채 열리기도 전에 도망치듯 한증막을 빠져나왔습니다. 목욕탕 얘기 중에는 소설 쓰는 최재경에게 들은 포항 목욕탕이 압권이었습니다. 나체의 여인들이 앞앞이 자기 바가지를 엎어놓고 냉커피 타는 숟가락으로 장단을 맞춰가며 목욕탕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녀의 이모가 한증막 노래강사겸 지휘자라고 해서 얻어들은 이야기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포항으로 전화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여튼 사우나, 아니 목욕탕은 대한민국 여인들에게 ‘힐링’의 장소인 게 분명합니다. 인도 갠지스강보다도 성스럽고, 바티칸보다 아름다운 그녀들만의 성지(聖地)라고나 할까요? # “등 좀 밀어주실래요?” 그 한마디 부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목욕탕에서만 볼 수 있었던 훈훈한 인정도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거지요. 서로에게 폐 끼치지 않고 쿨하게 살고 싶은 걸까요? 그날 저는 레즈비언으로 오해했던 그녀의 등을 힘차게 밀어준 보답으로 저 또한 거의 6개월만에 처음으로 등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등 좀 같이 밀까요?” 그 말 한마디면 이렇게 개운한 것을요. 등을 밀면서 같은 여성으로서의 동지애 연대감을 느낀다면 너무 거창한가요? 특히 칠순, 팔순의 어르신들 등을 밀어드릴 때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한때는 뭇총각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을 젊고 아름다웠던 몸이었겠지요. 그 육신에서 새 생명들이 태어나고 모진 풍파 속에 연꽃같은 생명들 건사하려고 궂은 일 험한 일 비굴한 일 마다하지 않았을 테고요. 거친 세월 살아내느라 자기 몸 찬찬히 돌아볼 겨를 있었을까요? 희부옇게 김이 오른 거울 앞에 앉아 삭풍에 휘청이는 겨울나무처럼 거칠고 메마른 몸을 열심히 닦고 있는 여인들. 루브르박물관에 걸린 명화 ‘터키탕’의 여자들처럼 결코 관능적이거나 풍만하지 않지만 오종종한 대한민국 이 토종아줌마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일종의 경외심마저 우러납니다. 때를 밀고 또 밀며 여인들은 또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이것이 제가 목욕탕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P.S 참, 최근 모 대형찜질방에서 본 풍경 하나! 용산역 앞 외국인들에게도 유명해져 찜질방 풍경이 유엔을 방불케 할 정도인데요. 그날 마침 수능시험을 끝낸 고3 남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있더군요. 대한민국에서 땀이 제일 잘 나는 불가마로 인정할 만큼 천장 높은 한증막에서‘앗 뜨거 앗 뜨거’엄살을 떨며 수다를 떠는 남학생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더라고요. 그 중 한 남학생이 이럽니다. “나 어제 저녁 7시부터 자서 오늘 아침 9시에 일어났다. 완전 오래 잤지?” 그러자 다른 남학생이 받습니다. “시험 끝나니 잠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 완전 심심해.” 이번엔 다른 학생입니다. “시험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천지에 널려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다 재미없는 거 있지.” 이 줌마를 웃긴 대목은 그 다음 이어졌습니다. “맞아. 시험 전엔 모든 게 다 재미있었거든 심지어 (신문) 정치면 기사도 재미있었다니까? 근데 이젠 개콘도 재미없는 거 있지. 완전 유치해.”
    Premium Chosun ☜       김윤덕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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