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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종대왕 며느리는 레즈비언이었다

浮萍草 2014. 3. 13. 06:00
    글을 만드신 우리 역사상 가장 영명한 임금 세종대왕도 집안 일로 당혹스러워 했던 순간이 있었다. 
    세종은 재위 18년인 1436년 음력 10월 26일 주위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신인손(辛引孫)과 동부승지 권채(權採)를 은밀히 불렀다. 
    세종은“말하는 것조차 수치스럽다”고 운을 뗐다. 
    이야기 핵심은 큰아들인 세자(훗날 문종)의 부인인 세자빈 봉씨(奉氏)를 폐출하는 내용의 교지(敎旨·임금의 명령을 쓴 문서)를 지어 올리라는 내용이었다.
    ㆍ‘소쌍’이라는 여종을 사랑해 항상 잠자리 같이 한 레즈비언 세자빈 세종은 승지들에게 직접 며느리 봉씨의 동성애 행각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세자빈 봉씨는 소쌍(召雙)이라는 이름의 여종을 사랑해 항상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궁인들은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를 같이 한다”고 수군댔다. 세자도 소문들 들었다. 어느날 궁궐을 청소 중이던 소쌍에게 직접 물었다.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소쌍은 깜짝 놀라면서“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종은 직접 소쌍을 불러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빈께서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했는데 저는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빈께서 윽박지르기에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습니다.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벗기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세자빈 봉씨는 소쌍이 잠시라도 자신의 곁을 떠나기만 하면“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는데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면서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원망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소쌍은 주위 궁인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 이상으로 해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봉씨는 소쌍이 다른 여인들과 같이 있는 것도 질투했다. 봉씨는 소쌍이 세자의 후궁 권씨(단종의 어머니)의 여종인 단지(端之)와 친하게 지내며 함께 자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다른 여종을 시켜 미행하도록 해 단지와 함께 있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신윤복 풍속화. 지체 높은 여인(왼쪽)과 옆에 앉은 여인은 동성애를 즐겼을까.

    ㆍ세자빈이 옷을 다 벗기고 곁에 눕게해, 폐출 교지에는 동성애 사실 없어 세종은 열흘 후인 음력 11월 7일 세자빈을 폐출하는 교지를 내린다. 그런데 정작 교지에는 봉씨의 동성애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세종의 지시였다. 세종은“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쓸 수 없다”면서 다른 죄목을 들어 폐출 교지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봉씨는 세자의 두번 째 부인이었다. 첫 부인인 김씨는 세종 11년인 1429년 7월 18일 “남자에게 사랑받는 술법”을 써 세자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폐출됐다. 김씨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먹이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미움을 받게 된다’,‘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같은 말을 믿고 이를 행하다 궁궐을 나가야 했다. 봉씨는 김씨 폐출 석 달 후인 10월 15일 새 세자빈으로 간택됐다. 세자는 봉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종은 “세자가 (봉씨와) 금슬이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되었다”고 했다. 세종은 “내가 중궁(세종비 심씨)과 함께 늘 가르치고 타일렀지만 침실의 일까지야 비록 부모라도 어찌 자식에게 다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한다. 실록에 따르면 봉씨는 처음부터 동성애를 즐긴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매일 밤마다 세자를 보고자 했다”고 한다. 고미(古未)라는 늙은 여종을 시켜 세자를 매일 모셔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자는 “며칠 동안 왕래하다가 그 후에 드물게 갔다”고 한다. 봉씨는 세자를 사랑하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여종에게 부르게 했다. 좋게 보면 애틋한 사부곡(思夫曲)이지만 당시 봉씨의 행동은“상스러운 일”로 치부됐다. 봉씨 폐출의 또다른 큰 이유는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봉씨는 항상 방안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봉씨는 세자의 후궁인 권씨가 임신했을 때는“권씨가 아들을 낳게 되면 나는 쫓겨날거야”라며 소리내 울기도 했다.
    ㆍ매일 밤 세자를 보고자 했으나 세자의 발길은 드물고, 아버지가 봉씨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사실 아냐 봉씨는 폐출된 후 친정 아버지인 봉려(奉礪)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봉려가 딸을 목졸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정설(定說)처럼 돌아다닌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의 ‘세자빈 봉씨’ 항목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트는 “폐빈봉씨가 친정집에 이르자 폐빈봉씨의 아비 봉려가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단정히 수습한 후 자결하였다. 세종 18년 10월의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나온다고 참고문헌을 달았다. 하지만 봉려는 딸 봉씨가 폐출되기 석 달 전인 7월 12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세종이 내린 세자빈 폐출 교지에도 “봉씨가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초기에는 술을 먹지 않다가 상(喪)이 백일을 지나지 않았는데 평상시와 같이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 있다. 이미 죽은 봉려가 다시 살아나 폐출된 딸의 목을 졸라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폐빈된 딸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불미스러운 동성애 행각으로 궁궐에서 쫓겨난 여인에 대해 후대에 각색한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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