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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렬왕의 몽골인 부인 홀도로게리미실

浮萍草 2014. 3. 12. 06:00
    황제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원 세조 쿠빌라이
    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 우리 역사 속 인물이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서(史書)에서 흔히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라고 말하는 몽골 출신 여인이다. 홀도로게리미실은 몽골 이름인 ‘쿠투루칼리미쉬’의 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여성을 꼽으라면 선덕여왕 등 신라 세 여왕을 들 수도 있지만 나는 홀도로게리미실이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여인이라고 본다. 그는 당시 국왕을 능가하는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고 원 제국을 배경으로 고려 국왕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ㆍ세계 최강 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은 몽골제국(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세조)의 딸이다. 몽골은 13세기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쿠빌라이 재위 기간(1260~1294)은 원나라의 최고 전성기였다. 홀도로게리미실은 1274년 음력 5월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현 베이징) 황궁에서 고려 세자 왕심(王諶)과 성대한 결혼 식을 올렸다. 당시 그녀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신랑인 고려 세자 왕심은 서른아홉 살의 유부남이었다. 왕심은 결혼식 직후 아버지인 고려 국왕 원종이 죽자 귀국해 왕위에 오른다.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이다. 홀도로게리미실은 석달 후 남편의 나라 고려에 온다. 이때 충렬왕은 국경 부분까지 마중나가 아내를 맞이했다. 충렬왕은 홀도로게리미실과 결혼하기 전 이미 부인이 있었다.
    ㆍ득남하자 충렬왕의 본부인은 무릎꿇고 술따라
    쿠빌라이 부인이자 홀도로게리미실의 어머니 원 세조비
    충렬왕은 홀도로게리미실을 맞이한 후 부인 정화궁주(貞和宮主)를 별궁에 유폐했다. 홀도로게리미실로서는 남편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1275년 9월 홀도로게리미실이 아들(훗날의 충선왕)을 낳았을 때 일이다. 정화궁주는 득남(得男)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무릎을 꿇고 홀도로게리미실에게 술잔을 올렸다. 이때 충렬왕이 술을 따르는 정화궁주를 흘깃 쳐다본 게 문제였다. 홀도로게리미실은 발끈하며 충렬왕에게 쏘아붙였다. “왜 흰 눈으로 나를 봅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앉았다고 그런 것입니까?” 충렬왕은 진땀을 흘렸다. 충렬왕은 황제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을 두려워했다. 어느 날 궁궐 밖에서 열린 한 행사에 충렬왕이 홀도로게리미실과 함께 행차했을 때였다. 충렬왕은 여러 신하들이 조금 늦게 도착하자 화를 내며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는 사실 홀도로게리미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충렬왕은“공주(홀도로게리미실)가 일찍 가자고 했는데 경들이 늦게 왔으니 공주가 과인 (충렬왕 자신)을 질책할까 두려워 잠시 가두었다. 과인을 조급하다고 하지 말라.” 충렬왕은 또 다른 행사에 행차했을 때 홀도로게리미실에게 지팡이로 얻어맞기도 했다. 홀도로게리미실은 충렬왕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고려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도로게리미실은 역모 사건 조사나 관직 파면 같은 실질적인 국왕의 권한을 행사했다.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 선발도 주관했다. 고려 공신인 홍문계는 딸이 공녀로 뽑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깎도록했다. 그러자 홀돌로게리미실은 쇠채찍으로 딸을 마구 때리게 하고 홍문계에게 심한 고문을 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귀양을 보냈다. 홀도로게리미실이 막무가내로 권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려의 장래를 염려했다. 홀도로게리미실은 사냥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충렬왕에게“사냥놀이 하는 것만 일삼으니 나라 일은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라고 질타했다. 충렬왕이 악공들에게 풍악을 연주하게 하고 잔치를 벌이자“음악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ㆍ진심으로 국가 장래 염려 홀도로게리미실은 1297년 5월 서른아홉 살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홀도로게리미실은 죽기 며칠 전 궁전에 핀 작약꽃 한 가지를 꺾어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는 황제의 딸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낯선 나라에 시집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한 많은 여인이기도 했다. 남편 충렬왕은 사냥을 핑계로 도라산에 자주 가 무비(無比)라는 여인을 가까이했다. 당시 사람들은 무비를 ‘도라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몽골제국 전성기 지도

    무비는 홀도로게리미실 사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홀도로게리미실의 아들로 훗날 충선왕이 되는 세자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몽골어로 ‘젊은 황소’라는 뜻)는 “주상(충렬왕)께서는 어머니(홀도로게리미실)가 병이 생기게 된 까닭을 아십니까”라며 아버지 충렬왕을 몰아세웠다. 세자 익지례보화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여인 무비를 잡아 죽이고 충렬왕을 모시던 환관 등 수십명의 목을 베었다. 홀도로게리미실의 죽음은 고려의 왕권 변동을 가져온다. 원나라는 홀도로게리미실이 죽은 후 7개월 만에 충렬왕의 양위 형식으로 아들 익지례보화를 고려 임금에 올렸다. 제26대 임금 충선왕이다. 황제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은 죽어서도 남편을 왕위에서 몰아낼 만큼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Premium Chosun ☜       이한수 문화부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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