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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실록 4 <하> 진성여왕이 음란했다고?

浮萍草 2014. 2. 14. 11:05
    천하대란 속에서도 '개혁'의 의지를 꺾지는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 신라 진성여왕 3년의 상황입니다. 불과 2년 전인 여왕 즉위년에 호기롭게 시행했던 ‘감세’ 정책이 정부에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실로 자승자박의 형국이었지만 제대로 공물과 조세가 걷히지 않아 국가 재정에 차질이 생기는 지경에 이르자 왕은 지방에 사자를 보내 독촉합니다. 그런데 그 독촉의 결과가 ‘도적들이 사방에서 봉기했다’는 것입니다. ‘도적들’이란 표현은 물론 신라 조정에서의 시각입니다. 좀더 그 실체를 분석해 보면 각지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들이 중앙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군사적 행동을 시작했으며 불만을 품고 있던 6두품 지식인과 선종(禪宗) 세력,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이 여기에 속속 가담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ㆍ‘이복동생’이 칼을 겨누고 덤벼들다
    891년, 지금의 강원도 원주인 북원(北原)의 반란군 수장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를 보내 1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지금의 원주 동쪽부터 영월군 주천면 일대까지 휩씁니다. 그 부하의 이름이 여기서부터 등장합니다. 바로 궁예(弓裔)였습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궁예(김영철 분).
    / KBS 사진
    이로부터 10년 뒤인 901년에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하게 되는 궁예의 일대기는 정사인 ‘삼국사기’ 기록만 읽어 봐도 영웅신화 그러니까 사가(saga) 그 자체입니다.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강보에 싸인 채 버림받아 간신히 죽음은 면했으나 사고로 한쪽 눈을 잃고 장성한 뒤 그 신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 왕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예가 영주 부석사에 가서 신라 왕의 영정을 칼로 내리쳤다는 일화에서 거꾸로 유추해 만들어 낸 얘기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라 왕자설’이 진짜였다면? 그 아버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김부식은 헌안왕이라는 설과 경문왕이라는 설을 모두 소개합니다. 후자가 맞는다면 궁예는 진성여왕의 이복 남매였던 것이 됩니다. 여왕의 입장에선 어렸을 때 버림받은 이복동생(또는 이복오빠)이 칼을 겨누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막힌 형국 이었던 것입니다.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공격한 다음해인 892년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경북 상주 사람으로 지역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며 신라의 무관이었으나 기울어지고 피폐해 가는 신라의 현실을 보고 232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흥을 꿈꾼 인물 견훤(甄萱)이었습니다. ‘삼국사기’ 견훤열전은 견훤이“한 달 사이에 무리가 5000명에 이르자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해 왕이 됐다” 고 기록합니다. 무진주가 어딘지 아십니까? 지금의 광주(光州)였습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견훤(서인석 분). /KBS 사진

    견훤과 아자개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견훤이 후백제왕이 된 뒤에도 부친 아자개는 계속 상주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세력에 포섭됐다는 것입니다. 아들한테 안 가고 아들의 적에게 간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일을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하다가 ‘아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탁 친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기업의 총수는 전처가 낳은 자식과 후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자 세상을 떠날 무렵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기 회사를 헐값으로 경쟁사에 팔아넘긴다는 얘기였습니다. 그걸 보고 “아, 세상에는 아자개와 견훤 같은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견훤의 모친 역시 계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ㆍ그래도 여전히, 여왕은 개혁을 하려 했다
    견훤의 칭왕(稱王)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후백제라는 나라의 ‘건국’이었습니다. 흔히 ‘통일신라시대’라 불리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는 진성여왕 6년인 서기 892년에 끝이 나게 됐던 것입니다! 1000년 가깝게 신라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던 구귀족 세력에게는 이런 난국을 수습할 능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894년, 천운(天運)이었는지 아니면 신라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였는지 홀연히 여왕 앞에 결재서류를 들고 나타난 인재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수백 년 만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인재였습니다. 그의 자(字)는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에서 고운(孤雲)이라고도 하고 바다 위에 뜬 구름이라는 뜻에서 해운(海雲)이라고도 했습니다 (부산의 해운대는 여기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그의 나이는 38세, 그의 이름은 최치원(崔致遠).
    채용신의 작품'최치원 초상',비단에 채색,,
    123×73㎝ 1924년, 정읍 무성서원 소장. ,
    조선일보 DB
    열여덟살 때 당나라 빈공과 시험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써 반란군 수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그 인물입니다. 문명(文名)이 이미 당나라 천하에 떨쳤다는 그는 정작 29세 때 신라로 돌아온 뒤 지방관과 하급직을 전전합니다. 6두품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894년 2월 ‘시무(始務)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립니다. ‘시무’란 ‘바로 지금 타이밍에 딱 맞춰 해야 할 개혁’이라는 의미입니다. 학자들은 그 내용에 대해 진골 중심의 골품제 타파 전제(專制) 왕권의 강화책(그러니까 여왕에게‘차라리 제대로 독재를 하라’고 권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호족 억압책 인사행정 개혁안 조세제도 개혁안 등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 시무책을 ‘귀족의 반대가 심해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적어도 여왕의 의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ㆍ“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그렇습니다. 진성여왕은 결코 최치원을 홀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아직도, 여전히 개혁을 하고 싶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계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아찬은 6두품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관직이지만 신라 관직 중 6등급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개혁을 하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 해도 골품제의 벽은 끝내 넘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시무책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최치원열전은 그 실패를 이렇게 암시합니다. “계속 혼란한 상황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아파해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어쩌면 이미 때를 놓쳤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이 바다를 떠도는 구름처럼 해변을 거닐었다는 해운대는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 /남강호 기자

    ㆍ‘삼대목’ 미스터리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책에 진성여왕의 ‘치적’으로 보이는 사항이 딱 하나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어 시간에 한 번쯤은 배웠을 책 ‘삼대목(三代目)’의 편찬입니다. 신라의 상대·중대·하대인 ‘삼대’를 통틀어 향가(鄕歌)를 집대성한 책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제 국어 선생님은 이 책을 설명하다가“만약 지금까지 남아있거나 발견된다면 값을 부를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다가 그만 “아으 미타찰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라는 양주동 선생이 풀이한 월명사의 ‘제망매가’ 마지막 부분을 멋들어지게 부르며 탄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때 만들어졌음이 확실한 향가 중에서 지금 전하는 것은 겨우 14수뿐이기 때문입니다. 여왕이 이것을 누구에게 편찬하도록 명했는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입니다. 대구 화상은 승려인데 각간 위홍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여왕의 정부(情夫)인 그 위홍입니다. 그런데 전 ‘삼대목’을 진성여왕이 편찬했다는 말이 좀 의아했습니다. 부정적으로 알려진 여왕인데 업적도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도 왜 그런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먼 지독한 상황에서 이 책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업’(사실 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이라거나 ‘향가의 인멸을 막기 위한 의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분당에서 일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곰곰이 생각하던 중 뭔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인멸을 막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향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우리나라 노래’란 뜻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가요’나 ‘K팝’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냥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신라 노래 즉 유행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사 중에서 불확실한 부분이 생겨났고 사람마다 다르게 부르는 부분도 있게 됐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그저 상상입니다. 혹시 이런 상황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연회에서 신하들과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던 진성여왕은, 당대 최고 인기가요였던 ‘헌화가’ ‘처용가’ ‘찬기파랑가’의 가사가 부르는 신하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경들은 어찌 그렇게 노래를 다르게 부르시오? 무엇이 맞는 가사인지 종잡을 수가 없잖소.” 여왕의 정부이자 실권자인 각간 위홍이 나섭니다.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이 책임지고 노래마다 무슨 가사가 맞는지 정리를 해서 바치겠나이다. 마침 사계의 권위자인 대구 화상이 왕도에 있으니 그와 함께 표준화 작업을 하겠습니다.” …만약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그 책의 용도는 명백합니다. ‘노래방 가사집’.
    향가집 '삼대목'의 진짜 용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ㆍ무너진 국가 기강을 ‘홍보’로 감추다
    ‘삼대목’의 업적과는 완전히 별도로 당시 신라의 상황은 끔찍할 지경이었습니다. 최치원은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진성여왕 즉위 불과 8년 전인 서기 880년‘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은 기가 막힙니다. 서울(경주)의 민가에는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고 짚이 아닌 기와로만 지붕을 덮으며 나무가 아닌 숯으로만 밥을 짓는다는 얘깁니다. 전국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오직 ‘수도’에 사는 사람들만 유리벽을 친 쇼케이스처럼 상대적으로 호화롭게 생활했다는 것이 되는데 마치 요즘의 북한을 연상케 합니다. 옛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효녀 지은 이야기’가 기억나시나요? 그 얘기가 바로 진덕여왕 때의 스토리입니다. 시집도 안 가고 홀로 눈먼 노모를 봉양하던 효녀가 나라에서 포상 대상이 된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그 효녀는 상을 받아야 마땅했겠지요. 그런데 ‘삼국유사’에 실린 이 기사를 좀 다른 시각으로 꼼꼼이 뜯어 보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반란군이 도처에 들끓는 상황인데도 화랑들은 고급 향락지인 포석정(제사의식을 지내던 곳이라는 최근 설도 있지만 정설은 아닌데다 해석 자체가 좀 가증스런 면도 있습니다)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걸식하던 일반 농민들이 부잣집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이건 중산층 몰락을 연상케 하는 사회 계층 구조의 심각한 변화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효자가 있더라’는 말을 들으면 담당 공무원이 출동해 집 한 채와 경비병력을 주고‘효양(孝養) 마을’이라고 적은 문을 세워서 백성에게 일부러 홍보하고 선양해야 할 정도로 나라 전체의 질서와 규범이 문란해진 상태였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효녀 지은의 이야기를 그린 현대 회화.

    시대가 좀 앞선 흥덕왕 때 일이긴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좀 의심스런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효자 손순의 이야기입니다. 모량리(지금의 경주 건천)에 손순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살았는데 어린 자식이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자 자식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땅을 파다가 기이하게 생긴 석종 (石鐘)을 얻습니다. 나무에 걸고 두드려 봤더니 소리가 은은했습니다. 대궐에까지 이 소리가 들려 왕이 조사를 명하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집 한 채와 연간 벼 50석의 상금을 내립니다. 그런데 만약 ‘효행’까지만 사실이고 ‘석종이 땅에서 나왔다’는 것은 효행을 선양 홍보하기 위한 정부의 프로파간다 술책이었다면?
    ㆍ과연 모든 것이 그녀 탓이었을까
    그런데 이런 안간힘조차도 무너지는 듯한 상징적인 사건이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에 일어납니다. 후백제 방향인 서남쪽으로부터 도적들이 진격해 옵니다. 보통 궁예나 견훤의 정규군조차 신라 입장에서 ‘도적’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많습니다만 이 해의 기록은 ‘정말 도적떼’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남다른 패션감각을 보여준 도적, 바지를 붉은 색으로 물들인 적고적(赤袴賊)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서라벌 인근 모량리까지 출몰해 바로 그 ‘석종’까지 노략질해 갑니다. ‘국가적 기강 살리기 정책’의 상징물조차 노략질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진성여왕의 ‘음란’과 ‘실정’ 때문이었을까요? 학자들은 신라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분석합니다.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경영 소농의 몰락 장기간의 평화로 인한 국민정신의 타락 ‘통일’을 하고서도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았던 지역적 폐쇄성…. 신라 하대(下代) 100여년의 세월에 걸쳐 서서히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진성여왕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물론 여왕의 ‘개혁책’이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것은 분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여왕은 무능했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후계자가 비담의 난 진압을 계기로 반전(反轉)을 노릴 수 있었던 선덕여왕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서기 892년(진성여왕 6년)의 후백제 건국과 901년(효공왕 5년)의 후고구려 건국으로 후삼국시대가 열렸고, 신라의 영역은 영남 지방 일부로 축소됐다.

    ㆍ스스로 왕위를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다
    하지만, 세 번째 여왕이 참혹한 최후를 마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위 11년째인 897년 6월, 여왕은 신하 앞에서 비장한 선언을 합니다. “근년 이래로 백성은 곤궁하고 도적들은 벌떼같이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 어진 이에게 자리를 비켜 왕위를 양보하고자 하는 나의 뜻은 결정됐다.” 이것은 적고적의 모량리 약탈 사건 다음 해의 일로 이 사건이 신라 권력층에 미쳤던 충격을 시사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봐야만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걸까요? 여왕은 헌강왕의 서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태자 요(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해인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궁(北宮)으로 들어갑니다. 그녀는 6개월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자신의 정치적 실패를 인정하고 하야(下野)를 통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신라 천년 역사 56명의 임금 중에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임금은 자신의 퇴위가 곧 국가 멸망을 의미했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을 제외하면 진성여왕이 유일 합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밑바닥까지 추락했지만 개인적인 결말로만 보면 귀족의 반란 와중에 사망한 선덕여왕에 비해 나은 점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뒷모습만큼은 나름대로 아름답고 깔끔했던 겁니다. 진성여왕을 ‘폭군’이나 ‘성군’ 같은 한마디 말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녀는 난세에 권좌에 올라 상황을 타개하려 애썼으나 끝내 실패했던 불행한 군주였습니다. 사실 실패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사에서 그런 왕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만약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음란’과 ‘실정’을 꾸짖은 사관(史官)의 모멸찬 붓끝이 그 앞에서 조금은 누그러지지는 않았을까요. 어쨌든 그 뒤로 1116년 동안 한국사에서 여성 지도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4회에 걸쳐 세 명의 여왕을 다뤘던 ‘여왕실록’은 여기서 끝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 서기 883년 조성된 국내 최고(最古) 목불(木佛)이다.이 두 불상의 규모가 똑같다는 사실은 최근 실측 결과 밝혀지게 됐고,처음
    부터 쌍둥이 불상으로 만들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조선일보 2005년 7월 11일자 A2면 보도>.불상 안에서는"대각간과 두 부인의 등신불을 만들었다"는 글자도
    발견됐다.이 때문에 이 쌍둥이 불상이 각간 위홍과 그 정부(情婦)인 진덕여왕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한때 나오기도 했다.해인사는 진덕여왕이 왕위
    에서 물러난 뒤 거처했다는 북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해인사 제공

    ㆍ사족
    저는 지금까지 신라의 여왕 세 명에 대해 각기 다른 평가를 내렸습니다. (1) 선덕여왕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치·군사·외교적인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고 권위가 실추됐으며 토목공사로 경제난을 가중시켰고 사회 통합에도 실패해 결국 대규모 반란의 와중에 사망했던 ‘실패한 지도자’였다. (2) 진덕여왕은 굴욕을 감수하고 나당연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신라를 망국에서 구했으며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3) 진성여왕은 음란과 실정으로 망국을 초래한 군주로 인식되지만 나름대로 개혁의 의지가 있었는데도 끝내 실패했던 것이며 최후에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 세 여왕에 대한 네 편의 글은 결코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닙니다. 특히 현 대통령을 빗대서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만약 제가 정말로 현 대통령을 빗대서 쓴 것이라면 여왕 세 명 중에서 과연 누구를 비유해서 쓴 것일까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 임기 1년 지났을 뿐인데 성패(成敗)를 논하거나 어떤 역사적 인물에 비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제 의도는 한국사에서 매우 희귀한 전통인 여성 지도자의 리더십이 역사에서 어떤 시대적 과제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공과 실패는 어떠했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이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거나 ‘여성 지도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 통설과 다른 비판을 했습니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실패했다’거니‘어떤 이도 이와 같이 실패할 것이다’라는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황룡사탑과 오늘날의 빌딩 크기를 비교한 것을 보고 ‘그림에서 현대 빌딩을 보인 것은 MB를 빗댄 것이고 곧 현 대통령을 빗댄 것이다’라는 의견을 주셨는데 참으로 일부 독자분들의 탁월한 상상력에 기가 막힌 나머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이번 3회를 두고서도 혹시나‘그럼 현 대통령보고 하야하란 얘기냐’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저건 나라가 두세 조각으로 쪼개져 망국(亡國)을 목전에 두고 있던 지도자가 취한 행동입니다. 지금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전란과 기아와 약탈을 걱정하지 않고 단잠을 이뤄도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Premium Chosun     유석재 문화부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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