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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실록 1 선덕여왕은 '실패한 지도자'였다!

浮萍草 2014. 2. 11. 06:00
    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신라부기여자, 처지왕위, 성난세지사, 국지불망행야)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있는 선덕여왕의 영정. 1990년대
    경북대 교수였던 유황 화백의 작품이다.

    ㆍ‘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국사의 기본 상식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여왕은 단 세 명 신라에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왕은 최초의 여왕이었던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입니다.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덕여왕은 대중의 인식 속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이라는 업적을 남긴 임금’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탤런트 이요원이 주연한 TV 드라마 ‘선덕여왕’(2009)에서는 ‘정적(政敵)과 싸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인물”로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포스터. /MBC 제공

    그렇다면 선덕여왕을 ‘한국 여성 지도자의 바람직한 롤모델’로 삼아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큰일날 소리다.” 왜냐하면 여왕의 재위 기간인 15년은 정치·외교·경제·사회적으로 신라가 커다란 위기에 몰린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 이룩했던 신라 중흥이 이 때에 이르러 빛을 잃었고 신라는 바야흐로 망국(亡國)을 코앞에 둔 누란(累卵)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몇몇 기록대로 개인적인 현명함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적인 곤경을 뒤집을 능력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ㆍ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즉위하다
    그러면 어떻게 선덕여왕, 본명 덕만(德曼)이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보다도 반 세기 전에 여성 군주로 즉위할 수 있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흥왕의 차남인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은 서기 576년에 즉위해 579년까지 왕위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정란황음·政亂荒淫)” 신하들에게 폐위당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 첫회에 등장하는 진지왕(임호 분). /MBC 제공

    드라마 ‘선덕여왕’에선 이 ‘진지왕 폐위 사건’이 한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진흥·진지·진평왕 등 신라 왕 3대(代)와 잇따라 육체적 관계를 맺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인물 심지어 나중엔 왕위에 오르기 전의 선덕여왕인 덕만 공주의 정적으로까지 묘사된 인물. 바로 미실(美室)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미실(고현정 분). 학계에선 대체로 미실이 실존 인물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MBC 제공

    고현정의 연기에 감명을 받았던 분들에겐 미안한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미실’은 학계에서 공인받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후대에 창작된 가공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定說)입니다. 진지왕 폐위 사건은 신라의 왕계(王系)에 핵폭풍과도 같은 여파를 몰고 옵니다. 신라 귀족 중에서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최고 클라스는 성골(聖骨)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지왕이 쫓겨나게 되자 그의 후손들은 한 단계 아래 계급인 진골(眞骨)로 강등됩니다. 왕이 될 자격을 상실해버린 것이죠.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이 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으로 즉위합니다. 진평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53년이나 됐습니다. 문제는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자의 ‘인력풀’이 사라진 것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진평왕(조민기 분). 50년 넘게 신라를 통치했던 인물을 '미실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인물'로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MBC 화면 캡처

    서기 632년에 진평왕이 죽자 신라의 화백회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성골 왕계를 그만 여기서 끝내고 다른 계급에서 새 왕을 선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성골 등극의 원칙’을 고수해 진평왕의 장녀 덕만을 추대해야 할 것인가? (드라마에선 덕만이 차녀로 나옵니다만 이것도 박창화 ‘화랑세기’에서만 나오는 얘깁니다. 덕만은 진평왕의 ‘장녀’라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후자를 택함으로써 ‘첫 여왕’인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왕 등극’은 철저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골 원칙을 깨뜨리는 것보다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서기 7세기의 신라는 철저한 남존여비 분위기의 사회는 아니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ㆍ‘복지와 사회통합’을 최우선 정책으로
    여왕 또한 ‘민심’을 얻는 데 상당한 공을 쏟았습니다. 선덕여왕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뒀던 것은 바로 ‘복지’였습니다. 여왕의 즉위는 서기 632년 1월.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여왕이 불과 9개월 뒤인 632년 10월에“나라 안의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진휼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돈’입니다. 다른 곳에 쓸 예산을 아껴서 지금의 ‘복지’와 유사한 분야로 돌렸던 것입니다. 이런 정책은 계속됩니다. 즉위 2년째인 633년 1월에는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주(州)와 군(郡)의 조세 1년치를 면제해 줍니다. 빈곤층과 차상위 계층에 대한 ‘복지’에서→중산층을 위한 ‘감세’까지 다방면으로 민심을 얻는 정책을 펼친 모습입니다. 그러나 ‘복지’와 ‘감세’라는 모순적인 정책을 취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634년에는 분황사가 건립됩니다. 종교의 힘으로 민심을 얻고 여론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635년에는 당나라 사신이 와 여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합니다. 여왕의 권위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경주 분황사 터에 남아있는 석탑(국보 30호).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절이다. /조선일보 DB

    ㆍ신라판 1·21 사태, ‘여근곡 매복 사건’
    즉위 5년째인 636년부터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 “3월에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 효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에 신라의 국방은 크게 흔들립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영묘사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국인(國人·단순히 ‘나라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던 ‘중앙 귀족’에 가까운 개념)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신라 17관등 중 1등급 관직) 알천·필탄 등을 시켜 ‘정예 병사 2천 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 죽여라’고 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이를 포위해 쏴 죽였다.” 나중에 신하들이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곳에 백제군이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여왕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개구리는 노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은 여자의 생식기다. 여자는 음(陰)이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좌청룡 우백호’라고 할 때‘우’는 서쪽을 말합니다―필자 註).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는 '여근곡'. 경북 경주시 건천읍의 경부고속도로 경주IC 근처에 있다. /박종인 기자

    선덕여왕의 얼굴을 그린 '여근곡 산책로 안내도'

    선덕여왕이 개구리를 보고 백제군의 침공을 알아챘다는
    이야기를 다룬 어린이 동화책의 한 장면.
    이 이야기는 유명한‘선덕여왕이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옛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일화와 함께 나오는 얘기입니다. 숱한 어린이용 전기와 역사서에, 절대로 자세히 쓰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쓰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기록은 겉보기에는 ‘여왕의 총명함과 신라의 빛나는 군사적 승리’를 서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여근곡’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지금의 경주시 서면 건천읍 신평리의 서쪽 약 5㎞에 있는 단석산의 북쪽 기슭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 경주IC 에서 영주 쪽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등산객들에겐 ‘건천 오봉산’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는 지금 ‘여근곡 산책로’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도인 금성(金城·지금의 경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점인 여근곡에 백제군의 특공대 500명이 국경을 넘어 잠입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특공대장격인 백제 장군 우소가 고개만 하나 넘으면 왕궁이 있는 경주 남산에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신라판 김신조 사건’이라 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신하들과 웃으며 지혜를 자랑할 상황이 아니라, 정말 간담이 서늘해져 앓아 누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ㆍ동요하는 민심과 ‘대야성 함락’의 충격
    이 무렵부터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선덕여왕 7년인 638년 3월에는“칠중성(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주변)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 옮겨갔다”는 기록이 등장하더니 7개월 뒤에는 실제로 고구려군이 침공하자 놀란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피난을 갑니다. 같은 해 9월에는 “누런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2년 뒤인 639년에는“동쪽 바닷물이 붉게 되고 더워져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고 기록됐습니다. 옛 사서에서 이런 일들이 연속해서 나오면 보통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해석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바닷물이 붉어지고 누런 꽃비가 내린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안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 불안은 오래지 않아 커다란 군사적 재앙으로 나타납니다. 선덕여왕 11년인 서기 642년 8월.
    백제군의 대야성 함락을 그린 드라마 '계백'의 한 장면. /MBC 화면 캡처

    신라 서부 최대의 요충지 백제군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었던 대야성(大耶城)이 윤충(允忠)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공격으로 함락됩니다. 당시 대야성은 금성(경주) 다음가는 신라 제2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신라 정계의 실력자였던 여왕의 조카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성주 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모두 백제군의 칼에 참변을 당했습니다(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 선덕여왕의 여동생). 이것은 백제가 신라의 목덜미에 칼을 겨눈 형국을 만들었습니다. 신라는 서부 국경지대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대(對) 백제 방어선은 지금의 경북 경산인 압량(押梁)까지 후퇴 했습니다. 압량에서 서라벌, 그러니까 왕궁이 있는 금성까지는 불과 40㎞도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군사적 공격을 계속해 옛 가야 지역으로 추정되는 40여개 성을 한꺼번에 빼앗습니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백제와 신라 사이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만약 그 후의 역사에서 외부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오래지 않아 멸망할 나라는 백제가 아니라 신라였을 것이라고 관측됩니다. 한 세기 전 동맹을 파기한 신라에게 밀려 한강 유역을 빼앗겼던 백제로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을 보내며 군사력을 키운 끝에 형세를 역전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ㆍ여왕, 대규모 토목공사에 나서다
    이미 6년 전 ‘여근곡 게릴라 침투 사건’을 겪었던 선덕여왕이 이후 백제의 군사적 움직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또다시 커다란 군사적 실책을 저지르고 만 셈 입니다.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은 선덕여왕은 두 가지 방면에서 긴급 대책을 마련합니다. 하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김춘추가 주도한 전방위 외교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습니다. 대야성 함락 바로 다음 해인 서기 643년(선덕여왕 12년), 선덕여왕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세워진 적이 없었던 대규모 건축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보통 ‘선덕여왕의 치적’ 쯤으로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이었습니다.
    <박진호 유라시아디지털문화유산연구소장이 디지털로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왼쪽)의 모습. 현대 건물 25층 높이의 규모다. /font>

    높이 약 80m로 추정되는 이 초대형 목탑은 오늘날의 건축물과 비교하면 25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습니다. 1300년 전의 기술력으로 이 거대한 탑을 만든다? 그야말로 국력이 기울어질 정도의 대형 공사였습니다. ‘이웃 나라로부터의 시달림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탑마다 나라 이름을 붙였지만 주적(主敵)은 그 명단에는 없는 나라, 당연히 백제였습니다. 건립 기간 2년, 참여 장인(匠人)만 200명이었으니 관련된 동원 인원은 수천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당연히 국고(國庫)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즉위 초기부터 진행된 복지 정책으로 인해 이미 많은 예산을 쓴 상황에서 예산을 잡아먹을 구멍이 또 하나 커진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공사의 총감독이 백제 출신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인 것에 대해 “경제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군사비 지출을 막으려는 백제의 계책이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서기 5세기 고구려에 크게 패해 목숨을 잃었던 백제 21대 개로왕의 경우 ‘궁궐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피폐 하게 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경우는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요? 결국 예산의 대부분을 부유층에게서 걷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기존 귀족 세력의 불만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친(親)여왕파는 진골 귀족인 김춘추와 가야 출신인 김유신(金庾信) 세력이었으나 김춘추는 외교 때문에 장기 해외출장이 잦았고 무장인 김유신은 전장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 여왕의 곁에 빈 자리가 많이 생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ㆍ‘여왕 폐위론’의 일파만파
    김춘추의 외교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으면 오랫동안 대립 관계에 있던 고구려를 찾아가 동맹을 요청했으나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은“죽령과 조령 이북의 영토를 반환하라”며 김춘추를 일시 감금하기까지 합니다. 저 유명한 ‘토끼의 간’ 이야기의 원형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김춘추가 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나를 돌려보내 주면 왕과 의논해 땅을 돌려주겠다”고 속여 탈출했다는 얘깁니다. 물론 이것은 당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연개소문이 신라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돌려보낼 구실을 만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신라로서는 고구려와의 동맹이 영영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춘추는 또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백제의 전통적인 동맹국이던 왜(倭)에까지 건너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나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기 643년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은 김춘추가 아니었고, 역사서에 ‘용렬한 자’라고 묘사되는 익명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장안성에 갔을 때 당 태종(太宗)은 전혀 뜻밖의 발언을 합니다. “그대 나라는 여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주인을 잃고 도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 “내 친족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낼 테니 임금으로 삼으면 어떻겠느냐.” 불과 8년 전 신라왕으로 인정했을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였습니다. 신라가 군사적인 실패를 겪고 있는 것을 본 뒤 당나라도 신라를 깔보게 됐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여왕 폐위론’이었습니다. 그것도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여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됐습니다. 그와 대척 관계에 있던 귀족 세력이 그냥 이 말을 흘려보낼 리가 없었습니다. 이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 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면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다른 나라에서도 정변이 일어나는 ‘쿠데타 도미노 현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642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세웠고 645년에는 일본에서 나카노 오에(中大兄) 왕자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유력 세력인 소가씨(蘇我氏)를 몰아낸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났습니다. 647년(선덕여왕 16년), 드디어 신라의 차례가 왔습니다.
    ㆍ쿠데타 와중에 사망… 그리고 기막힌 반전
    이 해 정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합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영의정의 반란을 일으킨 셈입니다. 나라가 거의 반쪽으로 갈라져 있던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이 때 비담이 내세운 명분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선덕여왕 즉위년인 632년이 아니라 15년이나 지난 647년에 나온 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자는 원래 안된다’는 선험적인 편견이 아니라 ‘15년 동안 여왕의 정치를 지켜본 결과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경험에서 나온 발언인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이 ‘비담의 난’이 채 끝나기 전인 1월 8일에 사망합니다.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①반군에 의해 시해됐다는 ‘피살설’ ②이미 중병이 들어 사망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반란이 일어났다는‘자연사설’ ③반란의 충격으로 인해 죽었다는 ‘쇼크사설’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비담의 반란’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사촌 여동생 승만(勝曼)을 세워 성골 원칙을 유지하려던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구귀족 제거를 위해 선수를 치고 나선 ‘친위 쿠데타’라는 설도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 마지막회의 한 장면. /MBC 제공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善德王)조에서 김부식은 이렇게 말합니다.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 (신라부기여자, 처지왕위, 성난세지사, 국지불망행야)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이것은 분명 편견으로 가득찬 발언입니다. 그러나 만일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성공한 지도자였다면 이런 악평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빈곤층의 ‘복지’와 중산층의 ‘감세’를 확대하는 정책을 썼고 종교를 통한 민심 통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국내의 여러 세력과 소통(疎通)에 실패해 반발을 샀으며 백제로부터 치명적인 군사적 위협을 당하고서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강대국으로부터 ‘폐위론’이 나왔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규모 토목 공사로 국가에 커다란 부담을 안겼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끝내 민심의 동요를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친위 세력과 귀족 세력 사이의 정변이 일어났고 본인은 그 난리통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체적 실패였습니다. 비운의 군주였다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롤모델이 될 지도자의 리더십’은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운명은 본인이 죽은 직후에 기막힌 반전을 맞게 됩니다. 여왕 사망 9일 후에 끝난 정변이 김춘추·김유신 세력의 승리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정치적 실패와 무능에도 불구하고 정변 최종 승리 세력의 사후 옹호 때문에 ‘현명한 군주’로 추앙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러면 신라의 여왕 세 명은 모두 실패한 지도자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회에선 ‘굴욕을 참고 나라를 멸망에서 구한 두 번째 여왕’의 실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7세기 신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진짜 중흥 군주는 바로 그녀였습니다.
    Premium Chosun      유석재·문화부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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