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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이토를 쏘지 않았다" 日서 나온 황당한 음모론, 왜?

浮萍草 2014. 2. 10. 10:25
    故世態如是不公耶? 嗚乎! 强奪隣邦, 殘害人命者, 如此欣躍, 少無忌憚, 無故仁弱之人種, 反如是陷困耶?
    (하고세태여시불공야? 오호! 강탈인방, 잔해인명자, 여차흔약, 소무기탄, 무고인약지인종, 반여시함곤야?)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안응칠 역사
    (安應七 歷史)’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하루 앞둔 2010년 3월 2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중근 특별전에서 한 시민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주완중 기자

    ㆍ‘진짜 저격자’는 안중근이 아니었다?
    “그 얘기 들은 적 있나? 안중근(安重根)이 쏜 게 아니라는데?” 한 유명 대학의 법대 교수는 몇 년 전 사석에서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한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제3의 인물’이었다는 얘깁니다. 이토가 맞은 총탄은 역사 2층에 숨어 있던 한 저격수가 쏜 것인데 일본이 이를 숨기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는 얼마 전에 일본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그저 해괴한 음모론일까? 그런 얘기가 왜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은폐되고 있는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나중에 찾아 보니 이 이야기는 일본판 ‘위키피디아’ 안중근 항목에도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음모설’이란 소제목으로 말입니다.
    '음모설'이란 소제목으로 안중근 의사의 '인신공양설'을 소개한 일본 위키피디아의 '안중근' 항목

    인신어공(人身御供) 그러니까 ‘인신공양’이란 말인데 안중근 의사가 누군가‘실제 거사를 일으킨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몸을 던져 저격자로 가장하고 희생됐다는 논리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저는 뤼순(旅順) 법정의 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을 등 지금까지의 자료를 근거로 그날의 상황을 복기해 봤습니다.
    ㆍ8연발 권총으로 모두 7발을 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 지니고 간 권총으로 모두 일곱 발을 쐈습니다. 권총은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8연발이었습니다. 웃지못할 일은 국내에 출간된 숱한 안중근 관련 서적에서 “안중근 의사는 모두 여섯 발을 쐈다”고 돼 있다는 점입니다. 일부 관련 학자들에게 물어보니“여섯 발 아니냐?” “여섯 발인지 일곱 발인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분명히 모를 수가 있느냐’ ‘학자들이 신문사 수습기자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권총과 같은 모델인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이 총은 보통 ‘7연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탄창에 탄환 일곱 발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실 안에 한 발을 더 장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8연발’이었던 것입니다.
    브라우닝 M1900 권총의 내부 구조. 탄창에 탄환 7발을 넣을 수 있지만 약실에 한 발을 더 끼울 수 있기 때문에 8연발이 된다.

     
    ▲ (左) 1907년 조선통감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우리에게 알려진 사진은 대부분 이렇게'흰 수염의 노인'의 이미지다./조선일보 DB  ▲ (右)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찾아낸 젊은 시절 사무라이풍의 이토 히로부미. 이 사진이야말로 이토라는 인물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는 평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총을 품고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총에 여덟 발을 모두 채웠습니다. 여기서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여서 총탄에 일부러 십자(+)를 새겼다는 얘기가 오랫동안 통설처럼 자리잡았고 최근에는‘총탄이 명중했을 때 회전하면서 살을 파고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랬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 기록을 보면 ‘총탄 완제품이 이미 그렇게 돼 있었다’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 검사가 안중근의 동지 우덕순(禹德淳)에게“총알의 십자 모양은 원래 그런 것이냐 안중근이 일부러 만든 것이냐”고 여러 번 묻습니다. 그러자 우덕순은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흔히 파는 것이며 블라디보스톡에서 구했다”고 답변합니다. 총탄에 십자 표시가 돼 있었던 것은 맞지만 안 의사가 ‘일부러’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일본은 ‘안중근이 이토 공을 잔인하게 살해하기 위해 일부러 총탄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진술을 끌어내려 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한일관계와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崔書勉·85)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지적입니다. 최 원장의 말은 조금 뒤에 다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월 26일 아침, 만 30세의 안중근 의사는 지금의 하얼빈역 북쪽 썬린가(森林街) 34호에 있던 동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저로 하여금 2000만 동포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검은색 모직 신사복 위에 반코트를 걸치고 납작한 모자를 쓴 안 의사는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꺼내 손수건을 닦은 뒤 오른쪽 속주머니에 넣습니다.
    ㆍ이토에게 쏜 네 발 중 한 발은 빗나가
    오전 7시, 안중근은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합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선 가운데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여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플랫폼이 잘 보이는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마셨습니다. 오전 9시, 초록색 특별귀빈열차가 서서히 하얼빈역으로 진입했습니다.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그 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플랫폼에 서 있던 일본인 환영단이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반자이(만세)!” “반자이!” 러시아 의장대가 ‘받들어 총’으로 경례를 했고, 장중한 군악이 연주됐습니다.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로 올라가 이토를 맞았습니다 9시 30분,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각국 사절과 인사를 나눈 이토는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시작합니다.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모자를 벗는 인물). /조선일보 DB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안중근은 찻집을 뛰쳐나와 플랫폼으로 나섭니다.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싹 붙어 선 안중근의 눈앞으로 이토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토가 안중근의 눈앞을 약간 지나쳤을 때 두 사람의 거리는 10보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사이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이토에게 네 발을 쐈습니다. 이 네 발 중에서 세 발은 명중했지만 안중근은 권총에 남아 있던 나머지 다섯 발을 다 쏘려 했습니다. 안중근은 옥중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에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수염이 흰 조그만 노인을 이토라고 판단해 단총을 뽑아들고 4발을 쏜 뒤,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젓해 보이는 다른 자에게 3발을 더 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플랫폼. 의거 현장임을 알리는 알림판은 전혀 없고 아무런 설명 없이 바닥에 타일 표시만 돼있다.
    왼쪽 하단의 삼각형(▷)타일로 표시된 곳이 안중근 의사가 총을쏜 지점이고, 역무원이 서있는 곳 바로 앞 마름모(◇) 타일로 표시해 놓은 지점이 이토 히로부미의 피격
    장소다. 두 지점의 거리는 약 6m다. /안용현 기자

    총알 8탄 중에서 모두 7탄이 발사된 것입니다. 이토에게 쏜 4발 중에서 빗나간 1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토 바로 옆에 있던 일본의 주(駐)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습니다. 이어서 쏜 세 발은 ①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왼쪽 허리를 관통해 배에 박혔고 ②만철(滿鐵)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왼쪽 다리를 맞췄으며 ③나머지 한 발은 옷감 털이 십자 홈에 낀 채 플랫폼에서 발견됐습니다. 검찰관은 이 탄환이 만철 총재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의 외투와 바지를 뚫고→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의 바지를 관통해서 플랫폼에 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형 판결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압수한 탄피 일곱 개로 미뤄 볼 때 피고가 발사한 탄환의 수는 일곱 발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ㆍ“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 한 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권총 총신이 화약 연기로 검게 그을린 가운데 총구 안에 장전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혹시 자결하려고 한 발을 남겨놓은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 부분이고 법정에서도 실제로 그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얼빈역 의거 직후 체포돼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 /KBS화면 캡처

    그렇다면 마지막 제8탄을 남긴 이유는 주변의 러시아 병사들로부터 제압당했기 때문에 미처 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제7발이 유일하게 누구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플랫폼으로 떨어진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발을 쏠 때 이미 제압당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공판 기록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자료에서 명백히 드러난 저격 사건의 전말입니다.
    ㆍ‘무로다 옹의 이야기’라는 괴서(怪書) 한 권
    자, 그런데. 안중근이 아닌 ‘제3자’가 쏜 총에 이토가 맞았다고요? 이게 도대체 무슨 얘깁니까? 2009년 10월,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 될 무렵 저는 이 문제를 문의하기 위해 서울 신문로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며칠 전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곤란한데… 지금 도서관에서 연구중이라서 말이야.”
    2010년 5월 19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의 제1차 회의의 참석자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 인물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최순호 기자

    무로다 요시아야. 안중근 의거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이었다.
    단언컨대 제가 학술 담당 기자를 한 지 10년이 됐지만“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통화를 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이 분 밖에는 없었습니다. 최서면. 사실은 이 분 자체가 연구대상입니다. 해방 공간 연희전문대 시절 백범 김구 밑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장덕수 암살 사건에 연루돼 1948년 무기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6·25 전쟁 도중 석방된 뒤 1957년 도일합니다. 일본의 유력 정관계 인사와 인맥을 맺고 한·일 외교사의 이면에서 막후 활동을 합니다. 1950년대 후반 청년 정치 지망생 김대중씨를 장면 부통령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고 알려져 있고, 제3공화국 때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외교적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한·일 근대사 연구에 파고들어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고 1978년에는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는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북관대첩비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우리 정부가 돌려받았다가 2006년 북송함). 최 원장을 만나자마자 그 얘기를 물어봤습니다. “제3자 저격설… 그게 어떻게 된 얘깁니까? 공판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던데요.” 그는 “허허…”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그래도 내가 그 얘기를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잘 찾아왔군.” “그게 언제 어디서 나온 얘깁니까?” “진원지는 1942년에 나온 책 한 권입니다.” 그는 서가를 뒤지더니 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책 표지에는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란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발행처는 조요메이지(常陽明治) 기념회 도쿄(東京)지부. “무로다… 요시아야라고요?” 무로다 요시아야. 안중근 의거 때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쏜 일곱 번째 탄환이 입고 있던 바지를 아슬아슬하게 관통하는 바람에 화를 면한 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가 1942년까지 살아서 그 증언을 한 겁니까?” “아니죠. 무로다는 1847년에 태어나서 1938년에 죽었습니다. 무로다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그의 사후(死後)에 생전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공신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겁니까?”
    ㆍ프랑스제 기마총에서 발사된 탄환?
    그것은 이토 저격의 상황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토가 맞은 탄환은 안중근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이 아니라 프랑스제 기마총(騎馬銃)에서 발사됐다는 얘깁니다. 기마총이란 권총보다는 길고 소총보다는 짧은 카빈총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이 모두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무로다가 그렸다는 ‘이토 피격 진술도’도 남아있습니다.
    무로다 요사아야가 그렸다는 '이토 피격 진술도'.

    “이 그림을 보면 총탄이 위에서 아래로 뚫고 지나간 것처럼 돼 있지 않습니까?” “제1탄의 경우에는 어깨로 들어와 가슴 젖꼭지 아래 머물렀다는 얘긴데… 이 그림대로라면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위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무로다가 했다는 그 책의 진술은 결국 안중근 의사가 아닌 하얼빈역 2층 식당에 숨어있던 정체 모를 ‘진범’이 비스듬히 이토를 내리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로다 옹의 이야기’란 책에서는 “그 식당은 격자 구조로 돼 있어 아래로 쏘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는 자못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대략 이런 개념입니다
    무로다의 주장을 그림으로 표현한 '제3자 저격설' 개념도. 물음표와 점선으로 그린 부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ㆍ무로다는 총탄을 볼 수 없었다
    “이토를 옆에서 수행했던 무로다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라고 받아들여졌을텐데요.” 여기서 최 원장은 잘라 말했습니다. “천만에요. 전혀 근거 없는 날조입니다.” 왜? 무로다는 이토의 몸에 맞은 총탄이 과연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가 사망하자 러시아측은 이토의 부검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토 공(公)의 몸에 어떻게 감히 칼을 댈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차에 이토의 시신을 실은 채 그대로 하얼빈을 떠났습니다. 열차가 일본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수행 의사, 다롄병원장, 관동군 군의관이 모여 긴급 회의를 했습니다. 이토의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탄환을 꺼내자면 수술을 해야 하니… 그대로 덮어 두자!” 결국 이토 몸 속의 탄환은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가 쏜 탄환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한 발 남아 있습니다. 이토 옆에 있다가 총탄을 맞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 왼쪽 다리를 부상당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는 자신의 다리를 맞춘 총탄을 법정에 제출했다가 돌려받습니다. 그의 사후, 유족은 이 총탄을 도쿄 헌정기념관에 기증합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총탄인지를 보면, ‘제3자 저격설’의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권총에서 나온 총탄인지 카빈총 총탄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 헌정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 의사 고야마 젠
    이 작성한 이토의 사망진단서에 수록된
    그림.총탄이 수평으로 관통하고 있다.
    카빈총이 아닌 권총 탄환이었습니다. 최 원장이 말을 이었습니다. “일본 르포작가 한 명이 무로다 책을 보고 총알 감식을 의뢰해서 그 결과를 책으로 펴내기도 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리 입을 놀려도 권총알이 카빈총알로 둔갑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ㆍ주치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발견
    “하지만… 무로다가 그렸다는 그 피격 진술도는…” “무로다는 이토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토는 총을 맞고 곧바로 열차로 옮겨져 30분 만에 사망합니다. 무로다는 이토가 쓰러진 순간 부축해서 열차로 옮길 때까지만 수행했습니다. 이토의 상처를 제대로 본 사람은 주치의인 고야마 젠(小山善)이었습니다. 고야마는 솜으로 이토의 출혈을 막았고, 이토의 시신과 함께 다롄까지 갔습니다. 더구나, 바로 이 문서를 보세요.” 그것은 최서면 원장이 인터뷰 직전 일본 외무성에서 발굴한 새로운 자료였습니다. ‘이토 공작 만주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 별책 제1권 메이지(明治) 사십이(四十二)’. “이 문건에 이토의 사망진단서가 나옵니다. 바로 주치의인 고야마가 작성한 것이죠.” 주치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그림에는 ①제1탄은 오른쪽 팔뚝 위쪽을 관통해 오른쪽 갈빗대 부분을 거쳐 심장 아래 ②제2탄은 오른쪽 팔꿈치→흉막→왼쪽 늑골 아래 ③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좌측 복근에 박혔음을 명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 발 모두 ‘수평으로 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스듬히 쏜 총탄에 맞았다’는 것은 이토의 사망 현장에도 없었고 총알은 물론 이토가 총을 맞은 몸도 보지 못했으며 담당 의사도 아니었던 무로다가 했다는 말을 무로다가 죽은 지 4년 뒤에 등장한, 저자도 누군지 모르는 책에서 쓴 얘기였던 것입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안중근 기념관에 전시된 의거 당시의 모형. 이렇게 '수평으로 권총을 쏜' 것이 모든 증거에 부합된다. /유석재 기자

    ㆍ‘바카야로 유언’도 날조였다!
    그런데 그 괴서(怪書),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중대한 왜곡을 합니다. “유 기자, 이토가 죽을 때 뭐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거… ‘바카야로’(바보)라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었나요?” “그 얘기도 바로 이 책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토가 총에 맞고 죽기 직전“범인은 누군가?”라고 묻자 수행원이“조선인입니다”라고 대답하자“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내뱉고 숨을 거뒀다는 얘기는 상당히 많은 국내 전기에서조차 정설처럼 쓰여 있는 얘깁니다.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나를 죽이다니’ 또는 ‘내가 살아있어야 조선이 아주 멸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이제 너희들은 망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얘깁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을사늑약 이후 한일강제병합까지 5년이란 시간이 지체된 것은 만주의 이권을 둘러싼 일본·러시아·미국의 각축전 때문이었을 뿐” 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대한제국은 내정 관할권과 군대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09년 10월에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가 그런 말을 한 것도 거짓말이라니? 우선, 앞에서 나온 것처럼 이토는 열차 안에서 죽었는데 무로다는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무로다가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 한인이라는 사실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뒤에야 밝혀졌습니다.” 이토는 죽는 순간까지도 저격자의 국적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최 원장은 1984년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로부터 “할아버지는 총격 직후 사망해 유언은 한 마디도 없었다”는 확인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근거 없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무로다 옹의 이야기’라는 책은 이렇듯 황망한 이야기들을 싣고 있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토의 ‘제3자 저격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쓴 엽기적인 소설이 전후(戰後) 일본에서 3종이나 나왔고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무렵 또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는 것입니다.
    ㆍ“한국인이 감히 그랬을 리가 없다”이제 남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황당무계한 음모론을 들고 나왔던 것일까요? 생각을 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음모론은 그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고 싶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1977년 이후에도 생존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사실 ‘엘비스가 그렇게 일찍 죽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1969년의 달 착륙이 조작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실 ‘미국의 우주과학기술이 그렇게 일찍 발전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NASA가 '달 착륙 음모론'을 반박하기 위해 공개한 달 표면 사진. 아폴로 17호에서 내린 우주인들이 남긴 달 표면 탐사차량(LRV)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NASA 사진

    그러면, ‘이토 히로부미 공을 안중근이 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 일본인들의 심리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최서면 원장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약하고 활기 없는 민족이 어떻게 감히 이토 공을 쏠 수 있었겠느냐는 거죠. 민족적인 멸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토를 쏜 자는 러시아의 비밀조직원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아무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죠.” 그러니까 일본인들의 속내는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에 대해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총살”을 했던 안중근 의사의 당당한 거사는 일본인의 입장에선 대단히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일이었으며 자신들이 저질렀던 침략과 수탈의 과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당혹스럽고 수치 스런 계기가 됐다는 실토가 되는 것입니다.
    ㆍ“빼앗고 해치는 자가 왜 날뛰어야 하는가”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何故世態如是不公耶? 嗚乎! 强奪隣邦, 殘害人命者, 如此欣躍, 少無忌憚, 無故仁弱之人種, 反如是陷困耶? (하고세태여시불공야? 오호! 강탈인방, 잔해인명자, 여차흔약, 소무기탄, 무고인약지인종, 반여시함곤야?)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1909년 10월 26일 의거 직후 체포돼 촬영된 안중근 의사 사진.당당하고도
    의연한 표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DB

    이것은 하얼빈역 찻집에 앉아 저격의 시간을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던 안 의사가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오고 군악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그 순간에 머릿속에서 치솟아 오른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안 의사는 그리고 나서 곧바로 밖으로 박차고 나가 총을 쏩니다. 이 인물이, 러시아의 비밀조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저격자 행세를 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안 의사의 이 절규는 10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아주 특이한 현 일본 정권의 일부 정치인에게만 해당된다고 굳게 믿고 싶습니다만 일본 관방장관이“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마구 내뱉는 배경에는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쳤던 과오에 대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그들의 근본적인 ‘수준’이 드러납니다. 장 자크 루소는 “과실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정녕 ‘보통국가’가 되려면, 지금의 일본 위정자들은 자위대 파견 따위의 일에 힘쓸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분명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모습부터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Premium Chosun      유석재·문화부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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