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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실록 3 <상> 진성여왕이 '음란'했다고? 마지막 모습만은 아름다웠다

浮萍草 2014. 2. 13. 10:45
    公慟哭三年旱 (우공통곡삼년한), 
    鄒衍含悲五月霜 (추연함비오월상), 
    今我幽愁還似古 (금아유수환사고), 
    皇天無語但蒼蒼 (황천무어단창창)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네
    지금 내 가슴 속 깊이 품은 근심은 옛날과 비슷한데
    하늘은 아무 말 없이 다만 푸르기만 하구나!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1(第十一)
    이광훈 감독의 영화 '천년호'(2003)에 등장하는 진성여왕(김혜리 분).

    ㆍ‘미소년’과 ‘음란행위’를 했다고?
    만약 차마 입밖으로 말하기 어려운 성적(性的) 판타지를 머릿속으로만 지니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러니까‘착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미소년’에 유독 관심이 많다면, 방대한 분량의 ‘삼국사기’를 통틀어 눈이 번쩍 뜨일만한 부분이 딱 한 곳 있습니다. 신라본기 진성왕(眞聖王) 2년의 기록. 이 해는 서기로 888년에 해당합니다. 숫자도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과연 무슨 내용이 쓰여져 있는 걸까요? 2012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온 ‘역주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진성여왕은) 젊은 미남자 2, 3명을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 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賞)과 벌(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신라 진성여왕 때를 배경으로 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의 포스터.
    음란(淫亂)에다 실정(失政)의 혐의까지 더해졌습니다. 바로 이 간략한 기록이 ‘세 번째 여왕이 섹스파티를 했다더라’는 풍문의 실체였던 셈입니다. 신라 51대 임금인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입니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단 세 명뿐이었던 여왕 중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진성여왕은 앞의 두 여왕과는 평가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신라의 망국(亡國)을 불러온 ‘팜므 파탈’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나라를 ‘말아먹은’ 임금이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말입니다…. 인사상의 불합리성은 일단 논외로 치자면 ‘미소년과 사통했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가중처벌적 비난’을 받을 일이었을까요? 조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물론 여왕의 그런 행위가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만약 통일신라시대(제 글에서‘통일신라’라는 것은‘삼국통일’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제와의 통일을 이뤘다는 뜻입니다)의 남성 군주가 두세 명의 ‘미소녀 후궁’을 데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어떤 사가 (史家)도 문제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진성여왕은 정치적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망국을 앞당겼다는 이유 때문에 ‘남자라면 받지 않았을 비난 ’까지 안게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ㆍ아버지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럼, 이 세 번째 여왕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오르게 됐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덕여왕이 승하한 것은 서기 654년의 일입니다. 무려 233년이 지난 뒤에야 새로운 여왕이 등장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선덕·진덕여왕 때와는 달리 ‘성골 등극의 원칙’ 같은 것은 무너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경문왕 설화를 소재로 한 그림책 '당나귀
    임금님'(청개구리 刊)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를 기억하시겠지요. 그 설화의 주인공이 신라 48대 경문왕(재위 861~875)입니다. 경문왕 6년인 서기 866년 신라에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찬 윤흥(允興)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됐는데 왕이 대산군(지금의 전북 정읍)까지 쫓아가 윤흥을 목 베어 죽이고 일족(一族)을 멸했다는 것입니다. 서영교 중원대 교수는 이 사건을 대단히 잔혹한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윤흥’은 ‘김윤흥’, 즉 진골 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피터지는 왕위 쟁탈전 와중에서 살육을 벌이던 근친 왕족들도 서로의 가족들만은 살려 줬다는 얘깁니다. 가족까지 죽인다면 ‘왕족’이라는 고귀한 혈통의 권위가 추락하고 백성들의 존경심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22세였던 경문왕은 이런 불문율까지도 깨 버립니다. 신라의 말기적 증상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경문왕 자신도 이후부터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윤흥의 난으로부터 얻은 상처가 컸다는 것이 됩니다. 주변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어두운 성격으로 변했고 곁에 호위무사가 없으면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바로 이 때 등장하는 것이 ‘삼국유사’의 설화입니다. <경문왕이 당나귀 귀를 가졌으며 밤에는 뱀들과 함께 잔다.> 그렇다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이렇게 언제 반란으로 목숨을 잃을지 몰라 벌벌 떨며 귀를 쫑긋 세워두던 가련한 군주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용무에 쓰이는 처용의 탈. 처용에 대해서는 동해안
    지방의 호족이라는 설과 이슬람 상인이라는 설이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더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당나귀 임금’이 진성여왕의 부친입니다. 경문왕의 사후 태자인 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이 왕위에 오릅니다. 저 유명한 ‘처용가’ 얘기가 등장하는 것이 헌강왕 때의 일입니다. 헌강왕이 죽자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헌강왕의 동생인 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이 승계합니다. 그가 즉위 1년만에 죽자 신라의 왕위 계승에 총체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강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ㆍ‘골상이 남자처럼 생긴’ 여인
    다시 분석해 보죠. 헌강왕이 죽었을 시점에 그 아들 요(嶢·훗날의 효공왕)는 서자인데다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래서 왕위는 그 동생인 정강왕에게 넘어갑니다. 정강왕이 죽었을 때는 아들도 남동생도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왕위 계승의 1순위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정강왕의 숙부이자 경문왕의 동생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올라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 이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설명할 것이므로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정강왕은 삼촌을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골품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골(骨)은 족(族)으로 다시 가(家)로 분해돼 ‘가’에서 왕위를 독점하려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른 가계의 남자 성원보다는 ‘직계 내’의 구성원 중에서 왕을 배출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는 것 입니다. 만약 한 번도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진성여왕의 즉위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이미 여왕 두 명이 즉위했던 선례가 있다’는 것이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 나온 진성여왕
    (노현희 분)과 위홍(김주영 분). /KBS 사진
    물론 진성여왕의 즉위 자체가 헌강왕의 서자 요가 장성해서 왕위를 계승하기까지 취해진 임시 조치라는 설도 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간 대권(大權)은 그 자체로 힘을 얻고 스스로 성장하기 때문에 회수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됩니다. ‘삼국사기’는 정강왕의 유언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누이 만(曼·진성여왕의 본명)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남자와 비슷하니 경들은 마땅히 선덕과 진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아무리 읽어봐도 미모가 뛰어났다는 얘기 같지는 않습니다만 과연 예사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성을 왕위에 세우는 일을 200여년 만에 단행하기는 어려웠겠죠.
    ㆍ천년 만에 밝혀진 ‘여왕 남편의 정체’
    진성여왕은 그 ‘파트너’의 존재가 정사(正史)에 유일하게 기록돼 있는 여왕이기도 합니다. 각간 벼슬로서 진성여왕 초기 실권자(實權者)였던 위홍(魏弘)입니다.
    ‘삼국사기’는“왕은 평소 각간 위홍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이때 이르러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 ‘삼국유사’는 아예 ‘여왕의 남편[匹]’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뭐 그랬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1972년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선덕여왕이 건립한 신라 최대 규모의 문화재인 황룡사 9층탑은 경문왕 때인 872년에 대규모 수리 공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진 데다 벼락을 맞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사가 873년에 끝나고 그 중수(重修)의 내력을 사리함에 새깁니다. 이것이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입니다. 이후 황룡사탑은 재난을 맞습니다. 고려 고종 때인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탑이 모두 불탄 것입니다. 하지만 찰주본기는 화를 면했는데, 탑 맨 아래 중심 초석인 심초석 안에 봉안돼서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그 심초석 위에 집을 짓고 살았거 이 집이 1964년 철거됐습니다. 그 직후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도굴당한 것입니다. 다행히 2년 뒤에 그 사리함은 회수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사리함을 자세히 살펴보니 ‘찰주본기’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처음에는 녹이 두껍게 덮여 있어서 몇 글자만 겨우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1972년, 복원 작업을 통해 총 74행 905개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게 되는데…. 황룡사탑 중수의 감독관의 이름과 신분도 나왔습니다. 김위홍(金魏弘). 그는 다름아닌 경문왕의 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진덕여왕의 정부(情夫)라고 기록된 그 인물 그리고 그가 바로 정강왕 사망 당시 왕위계승 1순위였던 ‘삼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왕의 ‘배필’은 다름아닌 친삼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삼촌’은 또한 여왕의 유모의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뭔가 좀 복잡한 것 같죠?
    김성모 만화의 한 장면.
    20세기에 ‘음란함’이 또 하나 추가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선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항변’을 해 왔습니다. ‘자꾸 지금의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 사이의 근친혼(近親婚)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는 자기 고모와 결혼합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인 동시에 사위였습니다. 동륜태자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진흥왕은 할아버지인 동시에 외삼촌이 되고 김유신의 누이동생(문희)은 김유신의 아들에게 고모인 동시에 외할머니가 된다…. 이렇듯 도무지 촌수를 따지기 어렵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미소년을 불러들였다’는 기록은 위홍 사망 직후의 일입니다. 즉 ‘(사실상의)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다’는 얘깁니다.
    ㆍ‘왕거인 사건’과 지식인 계층의 동요
    200여년 만의 여성 군주 즉위는 물론 정치적인 모험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선덕여왕 초기의 시책을 모방합니다. 그것은 ‘민심 통합’과 ‘감세(減稅)’ 조치였습니다.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주(州)와 군(郡)의 조세를 1년 동안 면제해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미소년 등용 이후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고 기록한 즉위 2년째인 서기 888년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왕거인(王巨人) 사건’입니다.
    왕거인 사건을 다룬 어린이 그림책의 한 장면.
    지금의 합천인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던 왕거인이라는 선비가 전격 체포돼 서라벌(경주)로 압송됩니다. 누군가 여왕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붙여놓았고 ‘문인(文人)으로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범인임이 분명하다’는 진언에 따라‘뜻을 펴지 못한 불만세력 1순위’인 왕거인이 붙잡힌 것입니다. 왕거인은 분한 마음에 감옥 벽에 이런 시를 적었다고 합니다.’ 于公慟哭三年旱,- (우공통곡삼년한) 鄒衍含悲五月霜, - (추연함비오월상) 今我幽愁還似古, - (금아유수환사고) 皇天無語但蒼蒼. - (황천무어단창창)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네 지금 내 가슴 속 깊이 품은 근심은 옛날과 비슷한데 하늘은 아무 말 없이 다만 푸르기만 하구나!
    제자백가 중 음양가의 대표적 인물인
    전국시대 사상가 추연.
    ‘우공’과 ‘추연’은 과연 누구인가? 우공은 중국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지방의 재판관이었습니다. 한 효부(孝婦)가 시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됐습니다. 우공의 변호에도 끝내 효부는 처형당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그 지역은 가뭄에 시달립니다.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한 뒤 우공의 진원을 듣고 효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니 그제서야 비가 왔다는 얘깁니다. 추연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입니다. 제자백가 중 음양가(陰陽家)의 대표적인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연(燕)나라에 있을 때 혜왕(惠王)이 참소를 듣고 추연을 옥에 가두자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는데 한여름(음력 5월 )이었는데도 서리가 내렸다고 합니다.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금아유수환사고, 황천무어단창창). 이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 읽으면 읽을수록 어느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정서가 확연합니다. 답답한 세상을 향해 토로하는 지식인의 절규입니다. “이런 난세(亂世)에 나는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저 정신머리없는 하늘은 왜 이렇게도 푸른 것이냐!” 이런 생각 한 번이라도 해 보지 않으신 분 계세요? 왕거인의 정체는 ‘6두품’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진골 귀족 다음으로 높은 계층이고 풍운의 뜻을 안고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유학생과 학승(學僧)이 즐비했던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실력으로야 자신 있지만, 신분 제도의 한계 때문에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고 불만을 품은 인물! 합천에 은거했으면서도 서울에서 다 그 이름을 알 정도였으니 왕거인이야말로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왕거인 체포는 대대적인 지식인 탄압, 즉 사화(士禍)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왕거인이 그 시를 쓴 이후의 상황이 주목됩니다. 다시 ‘삼국사기’입니다. “그날 저녁에 구름과 안개가 끼고 천둥이 쳤으며 우박이 내렸다. 왕이 두려워해 거인을 석방하고 돌려보냈다.”
    이것이 888년 2월의 상황이었습니다. 기록은 곧바로 그 다음 달인 3월로 이어집니다. “초하루 무술(戊戌)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환이 들어 죄수의 정상을 살펴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6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니 왕의 병이 나았다.” 뭔가 투옥과 탄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여왕은 이 와중에 병들어 누웠으며 왕가인 뿐만 아니라 다른 시국사범도 풀어줘야 할 정도로 사태가 여왕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거인 사건은 파국의 전조(前兆)와도 같았습니다. 본격적인 파국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 해인 889년이었습니다.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오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됐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했다.” 불과 2년 전의 감세 조치가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됐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런 감세 조치는 국가 재정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방 호족 세력의 힘이 강해져 중앙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독촉’이야말로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점화(點火)나 다름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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