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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폭파해버리자" 1962년 JP 폭탄발언 왜?

浮萍草 2014. 2. 10. 12:30
    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 구무항심, 방벽사치, 무불위이)
    백성은 떳떳이 살 수 있는 생업이 없으면 이로 인해 떳떳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일 떳떳한 마음이 없어진다면 방탕한 것 편벽한 것 사악한 것 사치스러운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粱惠王) 상(上)
    1964년 3월 28일, 한일회담의 막후 지원 활동을 벌이다 귀국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ㆍ독도 폭파론자’ 오명 쓴 JP
    ‘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1962년 11월 13일, 일본 하네다(羽田) 공항 귀빈실의 기자 간담회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이 기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참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로 JP는 이후 독도 문제에서 ‘폭파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 말은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한일회담에서 장애가 된다면 그깟 독도 따위의 섬은 폭파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할 수가 있느냐”며 분노하거나 규탄 성명을 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국 측 한일회담 외교문서 중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하네다 발언' 관련 내용. /조인원 기자

    현재의 국민 정서로 보면 이 발언은 대단히 부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영토를 폭파하자는 농담을 했다고? JP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요? 발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이 문제에 대한 JP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겠습니다. 1996년 3월 8일, 그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그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ㆍ36세 JP “혈기 왕성한 나이고 해서…”
    “그 당시에 내가 관여했던 것은 청구권 문제 하나 뿐이었다. 독도 문제는 회담과는 별도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85) 수상이 얘기하다가 먼저 꺼냈다. 자기 땅이라고 하도 우기길래 (당시 내가) 혈기왕성한 나이고 해서 ‘너희에게 줄 수 없다’는 의미로 ‘폭파해 버릴까’ 했고 그러자 이케다가 더욱 문제가 된다며 웃었던 것이 전부다.” 당시 그는 36세였습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1962년 '독도 폭파' 발언에 대한 해명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6년 3월 9일자 5면.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
    JP는 이것을 ‘별 것 아닌 농담’으로 일축했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발언이 실제로 있었던 것’을 시인은 한 셈입니다. JP는 이후 이 부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2010년 8월 2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수상과 합의가 다 끝나고 커피 한 잔 달라고 해서 마시며 얘기하는데 그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해야 겠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발끈했어. 그래서 이걸 당신 땅이라고 우기면 국제재판소에서 일본 거라고 판결나도 다 폭파해버리고 없애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네 손에 들어가게는 안 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폭파 소리가 나온 겁니다."
    ㆍ러스크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별 것 아닌 농담’이 ‘우국충정에서 나온 격한 말’로 재해석되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그런데 당시 JP가 과연 어떤 말을 했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는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JP의 독도 관련 발언은 조갑제 저 ‘박정희’ 6권에서 재인용) 1962년 10월 29일 미국 워싱턴에서 딘 러스크(Rusk·1909~1994) 미 국무장관과 가졌던 미국 측 회담록입니다. 여기서 JP는 도쿄(東京)에서 있었던 이케다·오히라와의 요담 내용을 러스크에게 설명하다가 독도 얘기를 합니다. 김종필: 독도 문제는 최근에 일본 측이 새롭게 제기한 것이다. 나는 총체적인 합의가 달성될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연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스크: 독도는 어떤 섬인가? 김종필: 갈매기들이 배설물을 떨어뜨리는 장소다. 나는 일본 측에 독도를 폭파시켜 버리자고 제안했다. 러스크: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김종필: 오히라는 내 말을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당이 이 문제로 자신을 맹공(猛攻)할 것이라 걱정했다.
    독도의 괭이갈매기들. /조선일보 DB

    김석야의 저서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
    러스크의 발언에서는 당시‘독도 영유권 문제’가 한·일간의 분쟁 사안이 되는 것에 대해 미국이 상당히 골치아파 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1962년 10월 20일 JP가 오히라 외상과 1차 회담을 한 직후 배의환(裵義煥) 한일회담 수석대표(주일대표부 대사) 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히라 외상이 이 문제(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데 한국이 응해 달라고 하였음. 김 부장은 이 문제는 한일회담과는 별개 문제이므로 국교 정상화 후 시간을 가지고 해결하자고 말하였음.>
    ㆍ독도 논의 자체를 피하기 위한 발언인 듯
    JP의‘독도 폭파 발언’에 대한 가장 구체적 기록은 JP의 측근이었던 방송작가 김석야(金石野)가 쓴 ‘실록·박정희와 김종필’(1997)입니다. 이 책은 당시 JP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독도 문제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해결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독도를 한국 공군의 연습장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공군기를 동원하여 며칠간만 폭격하면 독도는 영원히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말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후세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 ‘독도는 일본 측에서 한일회담의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의 이름도 한일 두 나라에 영원히 남게 되겠군요.> 지금까지의 여러 기록과 진술들을 종합해 보면 대체적인 그림이 하나 그려집니다. ①JP는 한일회담의 청구권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으로 파견됩니다.→②이케다 총리 또는 오히라 외상(기록마다 다르게 나옴)이 예상치 못했던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③JP는 이 문제에 대해 ‘절대 한일회담의 내용으로 포함돼선 안 된다’고 판단하, 일본 측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④그리고 ‘한일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느니 차라리 독도를 폭파해 버리자’는 극언(極言)을 합니다. →⑤JP의 진의가 ‘논의 불가’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 측은 일단 독도 문제에 대한 언급을 중단합니다.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정말 폭파해 버리자는 제안이 아니라 일본이 더 이상 이 문제를 꺼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는 쪽이 온당할 것입니다.
    김종필-오히라 회담. /조선일보 DB

    한일회담 직전 독도 밀약의 주역이었다
    고 알려진 고노 이치로 일본 건설대신'고노
    담화'로 유명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의
    부친이다
    ㆍ‘독도 폭파론’은 日이 먼저 꺼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왜 JP는 한일회담에서 독도가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을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한일회담이야말로 독도 영유권 문제를 두 나라 사이에 확실히 매듭지어야 했을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 독도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이 저렇게 독도를 가지고 계속 도발하는 것 아니냐”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최근 학계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척이 됐습니다. 2005년부터 한·일 양국은 1960년대 한일회담 당시의 방대한 외교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문서가 3만 장, 일본 정부가 발표한 것은 6만 장 분량입니다. 이 방대한 외교문서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한 기관이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소장 이원덕)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 기관 소속이었던 최희식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일본학)는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2008년‘일본공간’5호에 발표한‘한일회담에서의 독도 문제’와 2009년‘국가전략’ 15권 4호에 발표한 ‘한일회담에서의 독도 영유권 문제’입니다. 여기서 무척 중요한 사실이 언급됩니다. ‘독도 폭파’ 문제를 먼저 꺼낸 건 한국이 아니라 일본 측이었다는 것입니다. 1962년 9월 3일,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담이었습니다. 한국 측 배의환 주일대표부 대사 최영택(崔榮澤) 주일대표부 참사관과 일본 측 이세키 유지로(二關佑二郞)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의 회담 내용 일부입니다. 이세키 : 청구권 문제가 해결될 가망성이 높은 단계에 가면 여러가지 문제를 토의하게 될 것인데 이 때 독도에 관한 문제도 토의 할 것이다.
    최영택 : 독도 문제를 왜 또 꺼내려고 하는가? 고노 이치로(河野一郞)씨는‘독도는 국교가 정상화되면 피차가 가지라고 하더라도 갖지 않을 정도의 섬’이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일본 측이 왜 이를 또 꺼내려고 하는가? 이세키: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중략) 섬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문제를) 내놓지 않을 수 없다. 배의환: 중요하지도 않은 섬이고 한일회담의 의제도 아니므로 국교 정상화 후에 토의한다는 식으로 별개 취급함이 어떤가?
    ㆍ“사회당이 떠들고 있으니…”
    이 대화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독도가 그다지 높은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피차가 가지라고 해도 갖지 않을 섬’ ‘사실상 무가치한 섬’이라는 복수의 발언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한일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들고 나왔던 것일까요? 그 실마리가 드러난 곳이 1963년 1월 11일의 회의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일본 측 수석대표의 발언입니다. “사실 독도 문제는 국교 정상 후에 천천히 토의해도 될 문제다. 그런데 사회당이 떠들고 있으니 독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국교 정상화의 국회 비준을 받기가 어렵다.” 당시 사회당 등 일본 혁신세력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미국의 냉전 논리에 편승해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수립을 통해 대(對) 공산권 봉쇄 정책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파악 하고 반대했습니다. 동시에 ‘다케시마(竹島·독도를 일본에서 부르는 말)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일본이 독도 문제를 회담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고집한 것은 ‘국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우파가 아니라 좌파의 눈치를 보기 위해 일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 상당히 의외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한국측은 자꾸만 이 문제를 ‘국교 정상화 이후에 토의하자’는 식으로 미루는 태도를 보였을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 독도는 이미 대한민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던 영토였기 때문입니다.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

    ㆍ1952년부터 ‘대한민국 실효 지배’ 시작
    1952년 1월 1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합니다. 바로 평화선(平和線), 일명 ‘이승만 라인’의 선포였습니다.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을 긋고 그곳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평화선 안에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히려 우리 영토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한국 정부는 1957년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 152척과 어민·선원 2025명을 나포했습니다. 이후 울릉도 주민 홍순칠(洪淳七) 등 민간인으로 이뤄진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서 경비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1954년 7월, 국회는 독도를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보전할 것을 결의했고 1955년 1월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상주하게 됩니다.
    독도 의용수비대의 모습. 사진에 1954년 8월 28일이라 적혀 있다. /조선일보 DB

    이미 확고한 ‘대한민국 영토’가 된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회담의 의제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독도 문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밀어붙여 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ㆍ박정희 “독도 문제 제기는 침략 상기시킬 것”
    미국에 갔던 JP가 다시 오히라 외상과의 2차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가던 길에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문병하던 1962년 11월 8일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은 JP에게 긴급 훈령을 내립니다. 그 훈령의 3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측에서 독도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경우에는 같은 문제가 한일회담의 현안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는 동시에 일본 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민에게 일본의 대한(對韓) 침략의 결과를 상기시킴으로써 회담의 분위기를 경화(硬化)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할 것.>
    중앙정보부를 시찰해 김종필 중정부장과 악수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독도 문제를 회담에서 절대 꺼내지도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ㆍJP, 돌연 ‘제3국 조정안’ 제기
    정작 11월 12일의 김-오히라 2차 회담에서 JP는 새로운 얘기를 꺼냅니다. 박정희의 훈령에 따라 오히라에 맞서던 JP는 오히라가 집요하게 ‘다른 해결 방안이 없는가’라며 묻자 돌연 ‘제3국 조정안’을 내세웁니다. 오히라는 ‘제3국’으로는 미국이 좋을 것 같다며 검토해보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외무부는 이 회담을 이렇게 정리해서 보고합니다. “김 부장의 의도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일 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하여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으로 시사한 것 이라고 생각됨.” 그러니까 JP의 ‘제3국 조정안 제시’는 전혀 협의나 조율이 되지 않은 다시 말해 박정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독단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최희식 교수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일본과의 협상에 유연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행위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1~2차에 걸친 김-오히라 회담의 전략적 목표가 청구권 문제의 타결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측에 독도 문제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청구권 협상에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전술적 판단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에 과연 어떻게 됐느냐는 것입니다. 한·일 양국이 미국에 ‘제3국 조정’을 해 달라고 요청했을까요?
    ㆍ‘사법재판소 제소’라는 日 정책이 흔들렸다
    아닙니다.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일본 쪽이었습니다. 1963년 1월 11일의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22차 회의에서 일본의 우시로쿠 도라오(後宮虎郞) 아시아국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3국의 조정 결정에는 순종한다는 조건을 부쳐 구속력을 인정하는 식의 절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일본 정부로서는 국제사법재판소 소송이 문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결말이 난다는 확증을 얻는 것이 문제다.” 우시로쿠는 1963년 7월 9일 일본 외무차관 등과의 회합에서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영유권 문제를 당분간 보류하고 공동 이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1974년 9월 19일 주한일본대사 시절의 우시로쿠 도라오(왼쪽). 육영수 여사 시해범 문세광이 일본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한일 관계가 불편해지자,
    일본 정부가 시에나 에쓰사부로(가운데)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했다. 시에나 특사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고개를 숙인 상황이다. /조선일보 DB

    노 다니엘 저 '독도 밀약'.
    그러나 이에 대한 한국 측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외무부 본부대사 최규하(崔圭夏·훗날 10대 대통령)는“독도 문제는 당초 한일회담의 의제에 들어있지 않던 것을 일본 측이 공연히 끄집어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JP의 ‘제3국 조정안’ 같은 것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일본으로선 무척 당황할 노릇이었습니다. 정리를 해 보자면 JP가 독단적인‘제3국 조정안’을 제안한 이후 일본에서는“어 뭐지?”라는 반응과 함께 다양한 대안들이 나오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당초의 일관된 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손자(孫子)’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난이취지(亂而取之)’ 즉 ‘적을 혼란시켜서 취한다’는 전략을 연상케 합니다만 이것이 JP를 비롯한 한국 측 회담 당사자들이 처음부터 면밀하게 계획한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쨌든 일본은 ‘한일회담에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 대신“한·일간의 현안을 일괄 타결할 때 반드시 독도 처리에 관해서도 명백한 처리 방안에 합의돼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합니다.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이라는 형태로 독도 영유권 문제에 여지를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계속 독도 문제에 관해 평행선을 달리던 한·일 양국이 왜 돌연 ‘교환 공문’에 대한 교섭을 시작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ㆍ‘독도 밀약설’의 대두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증언이 최근에 등장합니다. 바로 ‘독도 밀약설’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독도 밀약’에 대해“박정희가 한일회담 때 독도를 팔아먹었는데 그 문서가 없어졌다더라”는 말을 비롯한 유언비어가 난무합니다.
    도대체 무슨 밀약이 이뤄졌다는 것일까요? 정치경제학 박사 노 대니얼이 2007년에 밝힌 취재 내용에 따르면, 한국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과 일본 건설대신 고노 이치로 사이에 막후 협상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정일권과 고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사람은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金鍾珞·대한야구협회 회장·대한체육회 부회장 등 역임)과 요미우리(讀賣)신문 서울 특파원 시마모토 겐로(嶋元謙郞)였다는 것입니다. 1965년 1월 11일 성사된 이 밀약의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독도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4개 항목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①독도는 앞으로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②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하는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③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④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문제는 증언만 있을 뿐, 이 문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종락은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뒤 전두환의 기세가 두려워 밀약이 쓰여진 종이를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문서가 확인되지 않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밀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드물게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한 최장근 대구대 교수(일본학)는 2010년의 논문 <현 일본정부의 ‘죽도문제’ 본질에 대한 오해―독도밀약설과 한일협정 비준국회의 논점을 중심으로>에서“비밀문서의 법적 구속력은 없고 한일협정에 있어서 독도 문제는 한국의 의지대로 실효적 지배에 의한 영토 주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분석 합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독도에 접안시설을 설치했을 때 일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완공됐다는 점은 설사 ‘독도 밀약’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해도 이후의 한일관계사에서 효력을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1997년 4월 독도 접안시설의 확장 공사 모습. /조선일보 DB

    최희식 교수는“독도 밀약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당시 한일 교섭 당사자에게까지 그 내용이 전달됐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만약 전달됐다면 외교문서에서 그 존재를 의심할만한 내용이 공개됐거나 그 정황을 의심케 할 만한 부분이 비공개 처리됐을 것이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독도 밀약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정치 상층부 내의 암묵적 합의에 머물렀을 뿐이지 한·일 외무 관료에까지 침투된 것이라는 보기 힘들다”는 분석입니다. 다만 한·일 양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잠정적 타결’을 추구해 국교 정상화의 결림돌을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으리라는 개연성은 존재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ㆍ日, ‘교환 공문’으로 덫에 걸리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바로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 교섭이었습니다. 1965년 6월 22일에 이 공문은 발표됩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달리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조정 절차 또는 중재 절차에 의하여 그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 ‘독도’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독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려는 한국 측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이 끝까지 일본 측을 압박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본조약에 대한) 서명을 연기해도 좋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언론 발표 시점 직전에서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가 정치적 결단을 내려 ‘독도’를 뺐습니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회담 조인식. 이동원(왼쪽에서 두 번째)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그 오른쪽) 등 양국 대표들이 조인
    을 마치고 건배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이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한일 기본조약이 가조인된 6월 22일 당일에 주일대사가 본국에 보낸 긴급 전보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양해 사항을 한 것은 일본이 종래에 주장한 독도라는 문구 삭제를 통해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으로, 당초 일본이 요구하였던 절차상 합의에 대한 시간적 구속 법적 구속, (상대국 제소) 결정에 대한 (아측의) 복종의무 등을 완전히 해소시킨 것임. 따라서 아국의 합의가 없는 한 중재 수속은 물론 조정 수속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독도 문제의 해결은 실질적으로 아측의 합의 없이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임.>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측 외교문서인 ‘이동원 외무부 장관 일본 방문 1965’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환 공문에서 말하는 ‘양국 간의 분쟁’에 독도 문제가 포함되지 않으며 장래에 있을 분쟁만을 의미하며 우리 정부가 장래의 문제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경우 이에 대하여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사토 수상으로부터 보장받았다.” 그러니까, 한일회담 이후 일본이 무슨 말로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런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ㆍ‘실효적 지배’가 없었더라면?
    결국 한일회담은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한국의 독도 실효적 지배’라는 현상 유지를 더욱 고착화시켰고 일본이 이를 타개할 모든 방법을 봉쇄해 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끝까지 회담에서 독도 문제가 나오지 않도록 함으로써 일본으로선 지금까지도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독도 도발’ 밖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일본이 도발을 해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항산(恒産)이면 항심(恒心)이란 건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유지된다, 항심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마음씨를 지적한 것이다.” 이는 ‘맹자(孟子)’ 양혜왕(粱惠王) 상(上)의 이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 구무항심, 방벽사치, 무불위이) 백성은 떳떳이 살 수 있는 생업이 없으면 이로 인해 떳떳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일 떳떳한 마음이 없어진다면 방탕한 것, 편벽한 것, 사악한 것 사치스러운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경제력이 바탕이 돼야 민주주의와 자유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자칫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국가 주도적 압축 성장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후퇴시킨 것에 대한 합리화로서 ‘맹자’의 한 구절을 해석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른 측면에서‘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란 말을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물질적인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정책이나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을 논의한다는 것이 사실상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 인터넷에 대해 논의할 수 없고 자동차가 없는 사람이 전자상가에 가서 내비게이션을 고를 리가 없습니다. 만일 1952년의 평화선 선포와 독도 영유권 확보가 없었다면 그래서 일본이 먼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했다면 한일회담을 앞두고 독도를 의제에 올리자고 집요하게 주장했을 쪽은 한국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대단히 공허한 논의가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일회담을 전후한 ‘한국의 집요한 침묵’이 독도를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5·16의 주역들이 활동하기보다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우리의 영토 주권을 지키려고 했던 선구적인 노력에서 비롯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상의 인물을 비판해야 할 때 비판하더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Premium Chosun      유석재·문화부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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