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5〉 미얀마 ⑤

浮萍草 2014. 2. 10. 09:39
    홀가분하게 짊어지고 가는 죽음
    얀마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죽음까지 궁금해졌는데 그들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임종’이라며 당연한 듯 말한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정답이지만 실제 맞닥뜨렸을 때 당사자도 가족도 행하기 어려운 것이 불교적 임종이기에 지극한 불심의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윤회를 확고하게 믿는 그들의 내세관에서 우리와 뚜렷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죽은 즉시 다음 생에 태어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49일이라는 중음(中陰)의 기간이 없을뿐더러, 남은 자들이 삼보의 가피에 기대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사십구재도 없다.
    다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려주는 시다림이 있을 뿐이다. 
    중음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전 업에 따라 다음 생을 받는 윤회의 원리가 중요하건만, 중생심이 발동하여 그들의 생사관을 짐작해본다.
    숨을 거둠과 동시에 태어남은 생사가 물 흐르듯 이어진 게 아닌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음생의 출발점’이 된다면 참으로 임종이 소중하게 여겨질 법하다. 
    그렇기에 임종 때 좋은 생각, 기쁜 마음을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삶은 소풍 왔다 가는 것 임종은 다음생의 출발점 선업 지으며 즐겁게 살길
    기쁘고 환희롭게 태어나야 새로운 삶의 길이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남아있는 인연이나 재산에 연연하지 않은 채 선한 마음으로 눈을 감아야 하고 가족은 곁에서 울거나 슬퍼하지 않은 채 생전에 그가 좋은 일을 많이 했음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또 숨을 거둠과 동시에 태어난다는 것은 죽고 나는 원리를 철저히 자력에 두는 것이다. 중음의 시기에 남은 자들이 망자를 위해 공덕을 지음으로써 보다 좋은 내세를 기약하는 타력의 구제가 없기 때문이다. ‘지은대로 받는’ 과보의 법칙을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그리고 참으로 윤회를 믿기에 그들의 삶이 그토록 맑은 것일까.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미얀마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탐내는 이들을 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종교적 삶이 몸과 마음에 배었지만 그리 심각하고 무거워 보이진 않는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없을뿐더러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쳐다보다가, 조그만 반응에도 싱긋 웃으며 응해준다. 이 세상에 소풍 나온 듯 무심하게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어쩌면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살다가 무겁게 죽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삶은 놀이이고 잠시 소풍을 온 것이건만 소유하고 집착하며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이다. 임종 무렵에 연락이 오면 무조건 달려간다는 어느 한국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죽을 때 아미타불을 열 번 염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평소에 지극정성으로 불법을 따르고 수행하는 자세가 돼 있어야 그런 순간에 그런 말들이 저절로 나오는 법이죠.” 매순간 인과의 법칙이 준엄한데 하물며 생사의 문제에 있어서야 오죽하겠는가. 전생으로부터 홀연히, 환희롭게 이승에 태어났으니 즐겁게 살아야 하리라. 삼척동자도 알지만 여든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한 일 행하는 것이라 했던가. 미얀마 불자들을 보면 선업을 짓는 삶이 가장 가볍고 단순한 것임을 그리고 죽음조차 스스로 홀가분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된다.
    ☞ 불교신문 Vol 2983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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