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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살로 바위 뚫은 飛將軍 이광<천수2>

浮萍草 2014. 1. 18. 06:00
    사마천 궁형사건의 진실 등이 담긴 사기 '本紀'를 훔쳐본 武帝, 사마천을 죽음으로 내몰다
    수는 한나라 때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렸던 이광(李廣)의 고향이다. 
    시내의 남쪽 석마평(石馬坪)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의관총(衣冠塚)이 있다. 
    쌀쌀한 날씨여서인지 찾는 사람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니 ‘비장군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편액이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비장군의 기운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가니 사당 뒤로 넓게 트인 곳에 그의 묘가 있다. 
    주변의 자갈을 이용하여 만든 봉분은 그렇지 크지는 않지만 비장군의 기상을 표현한 듯 단아하고 힘이 넘친다. 
    특히 봉분 앞의 묘비 석은 높다란 탑 모양이다. 
    비장군의 용맹한 담력과 동서로 번쩍이던 그의 무공을 표현한 듯하다
    이광

    이광은 대대로 무장(武將)집안에서 태어나 그 역시 문제와 경제 무제 시대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문제 때인 기원전 166년 흉노가 침입해오자 스스로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우고 왕을 호위하는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된다. 맹수사냥에서도 두려움 없이 가까이에서 잡는 용맹함을 보이자 문제는 ‘고황제 시절에 태어났으면 만호후(萬戶侯)가 되었을 것’이라며 극찬하였다. 이광은 명궁이었다. 사냥터에서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에 박힐 정도였다.
    이광의 묘

    경제 때에는 상군태수가 되어 기병 100여명으로 흉노와 전쟁을 벌였는데 흉노의 기병 수천이 포위하자 복병을 숨겨놓은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여 흉노군의 추격을 뿌리치기도 하였다. 두려움 속에서도 난국을 헤쳐 가는 초인적인 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특히 번개처럼 빠른 몸놀림은 흉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이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기원전 119년. 한무제의 흉노 공략에 이광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배재된다. 이에 항의하여 참전을 하지만 무제의 지시를 받은 대장군 위청은 이광을 후방으로 돌린다. 이광은 다른 길로 흉노 공략을 시도했으나 길을 잃고 전투에 늦게 도착한다. 위청이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그의 부하에게 따지자 이광은 후방부대로 배치한 위청의 전략을 비판하며 스스로 자결한다.
    ㆍ한무제와 이광 집안의 악연
    이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막내인 감(敢)만이 곽거병을 따라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광이 죽자 부친의 직위인 낭중령(郎中令)을 물려받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부친을 죽게 한 것에 분개하여 위청을 쳐서 부상을 입혔다. 마음 속 한 구석에 사죄의 마음이 있었을까. 위청은 이감을 용서했다. 하지만 곽거병은 달랐다. 무제가 궁궐에서 사냥을 할 때 배속했던 곽거병이 이감을 활로 쏘아 죽였다.
    한무제와 유비

    무제는 곽거병을 탓하지 않고 이감이 사슴에 받쳐 죽었다고 하였다. 최고의 장수가 사슴에게 받쳐 목숨을 잃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이지만 누구 하나 말하는 자가 없었다. 천하를 뒤흔드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 누가 목을 내놓겠는가.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 항거한 것이 조카가 삼촌에게 해코지한 자를 살인한 것보다 더 나쁜 행위라는'무제식 판결'을 보여준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무제가 애지중지하는 위황후의 동생이 위청이고 위청의 조카가 곽거병이었기 때문이다. 이릉(李陵)은 비장군 이광의 장손이다. 이릉 역시 집안의 내력답게 어렸을 때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젊은 나이에 근위기병대장이 된다. 기원전 99년. 한 무제는 잡시 쉬었던 흉노와의 전쟁을 재개한다. 이 전쟁에서 이릉은 이광리 부대의 물자운송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릉은 자신과 부하들이 일당백의 전사들이었기에 일선에서 흉노와의 전투에 배속되기를 바랐다. 특히, 할아버지 이광을 많이 닮은 그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조부의 울분을 풀어드리고도 싶었다. 이릉은 무제에게 탄원하여 5천의 보병군을 받는다. 그리고 고비사막을 종단하여 선우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실로 그때까지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릉
    이릉이 이끄는 별동대는 한 달간 고비사막을 건너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우가 이끄는 흉노군과 마주친다. 8만의 흉노군에 포위된 이릉의 별동대는 연일 계속되는 흉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되고 만다. 이릉이 포로가 된 곳은 한나라 군대가 집결한 거연새(居延塞)에서 불과 100여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야말로 구원부대가 오기만 하여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거리였다.
    ㆍ애첩에 눈먼 ‘무제’, 정치적 희생자 ‘이릉
    ’ 이릉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무제는 내심 기뻤다. 그 자신 답답한 정무를 이릉의 일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일이란 무엇인가. 이때 무제는 이부인(李夫人)을 총애하였다. 그녀의 큰 오라비인 이광리를 이사장군에 임명하고 3만 명의 기병을 주었건만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5천의 보병을 가진 이릉만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릉이 포로가 되었다고 하니 무제는 이광리의 문책까지도 덮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애첩에 눈이 먼 무제가 그의 심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마천에게 이릉의 일을 묻자,무제의 마음을 읽지 못한 사마천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마천
    "이릉은 효성이 지극하고 신의가 두터우며 언제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국사(國士)의 풍도를 지닌 훌륭한 무장입니다. 릉이 이번 거사에 있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해서 조정에서 일신의 보전만을 바라는 무리들이 이를 트집 잡아 이릉을 헐뜯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이릉이 보병 5천으로 수만의 흉노기병과 대전하여 그의 부하가 사력을 다해싸워 경이적인 전과를 거둔 것은 옛날의 어느 명장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니 그가 구원군이 오지 않아서 적의 손에 잡혔다 하더라도 흉노에게 큰 손실을 준 점만은 천하에 공표하여 송양(頌揚)할 만한 일이고 또 그가 죽지 않고 흉노 땅에 살아남은 것은 적당한 시기를 얻어 한실(漢室)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서 일 것입니다." 사마천의 답변을 듣는 무제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사마천이 거짓말로 이사장군을 헐뜯고 이릉을 변호한다며 대노하였다.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 또한 감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받는다. 허탈하기 그지없는 사마천이지만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럴수록 살아서 부친 때부터 준비해온 역사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남자로서 최고의 치욕인 궁형(宮刑)을 선택한다. ‘사기’는 이처럼 처절한 비통함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ㆍ자신의 本紀를 훔쳐본 무제, 사마천을 죽음으로 내몰다
    무제는 단지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그토록 죽이고 싶었을까.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라지만 자신이 의견을 묻고 그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분노하여 사형에 처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위촉오가 정립한 삼국시대의 역사책인 ‘삼국지’ ‘위서’ ‘왕숙전’에는 우리가 몰랐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숙전에 보이는 사마천 궁형의 내막

    위 명제가 왕숙에게 “사마천이 궁형을 받자 이에 원한을 품고 ‘사기’를 지어 무제를 비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갈도록 하지 않았는가?”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되 찬미하거나 나쁜 것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유향과 양웅은 그의 서술에 탄복하여 훌륭한 사관의 소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제는 그가 ‘사기’를 저술한다는 것을 알고 경제와 자신의 본기를 함부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엄청 분노하여 두 편을 삭제 파기해 버렸습니다. 현재 이 두 편의 본기는 목록만 있고 내용은 없습니다. 후에 이릉의 사건이 나고 사마천은 궁형에 처해졌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원한을 품은 것은 무제였지 사마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형을 당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 사마천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던 무제가 이릉사건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과연 얼마가 진실일까. 진실된 역사의 복원은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ㆍ조국에의 충정이 도리어 죄가 되어
    이릉이 흉노의 포로가 된 지 1년. 무제는 다시 흉노토벌을 위한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한다. 이전의 출전 때보다도 훨씬 많은 기병 7만 보병 14만의 병력이었다. 원정대가 아니라 총공격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 원정대의 총괄도 이광리였다. 엄청난 군대를 동원한 원정대는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회군한다. 인우장군 공손오에게는 이릉을 구출해오라는 임무가 주어졌으나 흉노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퇴각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공손오는 변명한다. "흉노 포로가 자백하기를 이릉이 선우에게 전술을 가르쳐서 한나라 군사에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군의 전과가 크지 못하옵니다." 대규모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무제와 조정은 치욕감에 사로잡힌다. 병력과 무기도 예전보다 우수하거늘 어째서 이길 수 없는가. 패전에 대한 책임을 따져 처벌하자니 이 또한 무제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패전의 책임은 물론 그 원인까지도 해결할 묘수가 생긴 것이다. '이릉이 선우에게 우리의 전술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한서’ ‘이릉전’에는 해답을 찾은 무제의 즉각적인 조치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이릉의 가족을 죽이라 명했고 어머니, 동생, 처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농서의 사대부는 이씨를 수치로 여겼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몇몇 참모의 감언이설과 최고실력자의 달콤한 눈감음. 오늘도 역사는 그렇게 써지고 있으며 그 기록에 맹신하니 역사의 행간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나는 한나라를 위해 보병 5천을 이끌고 흉노와 싸웠지만 원군이 오지 않아 패하였다. 이것이 어찌 한을 배신한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 가족을 참수하다니…." 이릉은 한의 사신으로부터 가족이 몰살당한 비보를 듣는다. 이릉이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증오심으로 타올랐다. 조국 한에 대한 미련도 없어졌다. 이릉의 비극을 안 선우는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고 우교왕에 임명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무제는 이릉과 그의 가족을 자신의 정국 돌파의 한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이광리가 그의 소원인 흉노를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흉노는 건재했다. 오히려 이릉이 가족의 비보를 들을 즈음, 이광리도 흉노의 포로가 되어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이릉은 흉노의 땅 막북(漠北)에서 20여년을 살았다. 하지만 수구초심이라 하였던가. 한나라를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싶어도 아련한 정이 솟구쳐 올라 눈시울을 적셨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이릉. 술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을까. 만 리를 지나 사막을 건너 徑萬里兮渡沙漠 군장이 되어 흉노를 떨게 했네. 爲君將兮奮匈奴. 길은 막히고 활과 칼 꺾였으니 路窮絶兮矢刃摧 병사들은 죽고 내 이름은 더렵혀졌네. 士衆滅兮名己隤. 노모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老母已死 어찌 은혜 갚으러 돌아간단 말이냐 雖欲報恩將安歸.
    ㆍ무제와 유비, 領土보다 더 큰 心德의 차이
    촉한을 건설한 유비는 관우를 잃자 오나라를 총공격한다. 이때 황권이 선발대로 출정하고자 하였지만 유비는 북방의 방어임무를 맡기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한다. 하지만 유비군은 이릉에서 대패하고 황권도 퇴로를 차단당하여 위군에 항복하고 만다. 황권이 위에 항복하자 촉의 신하들이 그의 처와 자식들을 가두려 하였지만 유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배신한 것은 나지 황권이 아니다.”
    이광 묘입구

    남북조시대의 학자로 삼국지의 주석을 단 배송지(裵松之)는 이 부분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무제는 터무니없는 말만 믿고 이릉의 가족을 참수했지만 유비는 사법관의 주장을 듣지 않고 황권의 가족을 살렸다. 두 군주의 잃음과 얻음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이광 가문은 이릉을 비롯하여 아들들이 모두 죽임을 당함으로서 안타깝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오늘, 이광의 의관총만 남아 이들 가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사마천은 목숨을 담보한 기록으로 이릉을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었고 오늘도 떳떳하게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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