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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文字의 소멸은 '國魂의 滅亡'< 은천1 >

浮萍草 2014. 1. 21. 06:00
    잊혀진 왕국 서하는 중원과 대등한 제국이었다
    
    ㆍ文字를 보존하는 민족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ㆍ西夏王國을 찾아서
    라진 왕국 서하(西夏)를 찾아간다. 
    서하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중국의 서북부지역을 통치한 티베트계 민족의 왕조다. 
    영토는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이었는데 동쪽으로는 황하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옥문관 남쪽으로는 소관(蕭關) 북으로는 고비사막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중국인은 서쪽 오랑캐를 서융(西戎)이라 하였다.
    서융 가운데 가장 번성한 것이 강(羌)과 저(氐)였다. 
    강과 저는 갑골문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상(商)나라 때부터 존재하였던 것 같다.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강은 서융으로 양종(羊種)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을 치는 유목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저는 농경 위주의 정착민족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저인들이 주로 살았던 천수(天水), 농서(隴西)지방은 산에 숲과 나무가 많아 사람들이 판자로 집을 지었다.”고 하였다.
    논과 늪지가 많은 은천의 모습

    서하는 강족의 일파인 당항(党項)족 탁발씨(拓拔氏)의 후예인 이원호(李元昊)가 1038년에 건립한 국가다. 송 요 금과 정립하며 1227년에 멸망할 때까지 195년이나 이어온 국가다. 국호를 ‘대하(大夏)’라고 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요와 금의 서쪽에 있었기에 ‘서하’라고 불렀다. 서하왕국의 도읍지는 영하회족자치구의 은천(銀川)이다. 은천으로 향하는 야간기차를 탔다. 밤에 이동하는 것은 잠자리도 해결하고 시간도 번 것이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여행 중에 기차를 이용하려면 항상 시간이 불투명하였다. 정시에 출발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연착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출발시간을 지킨다. 이젠 기차여행도 일정에 맞춰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니 중국에서의 여행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편이다. 자리를 잡아 짐을 푼 다음 저녁식사도 할 겸 식당 칸으로 향했다. 식당 칸은 썰렁하다. 서너 명이 앉아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메뉴를 보니 간단한 밥과 반찬뿐인데 가격이 엄청 비싸다. 마침 옆 좌석에 음식이 나왔는데 별반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폭리를 취하려는 요량이다. 식당 칸이 썰렁한 이유를 알겠다. 조금 싼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표정이 굳어지며 퉁명하게 한마디 한다. “당신들 자리에 가서 먹어요.” “네? 여기서 먹으면 안 되나요?” “도시락은 여기서 먹을 수 없으니 당신들 자리로 가란 말이야!” 탁자 앞에 놓여 있던 젓가락마저도 바람처럼 집어간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지만 서비스는 아직도 엉망이니 장거리 기차여행에서의 먹을거리는 스스로 챙겨야 할 일이다.
    ㆍ서하왕국의 위상, “동방의 피라미드”
    은천의 아침은 평화롭다. 8차선의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고 도로 양 옆으로는 다양한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일직선의 도로를 달리노라니 호수들이 많이 보인다. 고비사막과 산맥을 접하고 있는 도시에 웬 호수가 이렇게 많을까 의아할 정도다. 이는 은천에서 1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황하의 물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은천은 사막의 도시가 아닌 비옥한 평원과 호수의 도시가 되어 서하왕국의 수도가 된 것이리라. 호수 근처에는 논이 보인다.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하여 벼농사까지 짓고 있으니 가히 왕도(王都)가 될 만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웅장한 서하왕릉.

    서하왕국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는 왕릉(王陵)으로 향한다. 은천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진 하란산(賀蘭山) 남쪽 드넓은 평원에 서하의 역대 제왕과 귀족들의 왕릉이 있다. 총 9개의 왕릉과 250여개에 이르는 배장묘(陪葬墓)가 왕릉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팔각형이나 원형으로 쌓았다. 서하만의 독특한 능묘인 것인데 지금 보아도 기세가 등등하다. 가히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하왕국의 힘을 느끼기에 충분하며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서하시기는 중원의 송(宋)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과 몽골의 칭기즈칸이 상호 각축을 벌이던 시대다.
    ㆍ“그깟 비단옷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러한 제국들에 맞서 서하를 당당한 독립국가로 발전시킨 이가 곧 원호(元昊)다. 그는 당과 송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씨인 이(李)와 조(趙)씨를 버리고 자신의 성인 외명(嵬名)을 복원시켰다. 이름도 ‘올졸(兀卒)’이라 하였는데 이는 당항어의 중국식 발음을 음차한 것으로 ‘청천자(靑天子)’란 의미다. ‘황천자(黃天子)’라고 하는 송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임을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호의 칭제와 건국의 시도는 태자 시절부터 확고하였다. 부친인 덕명(德明)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족의 복식을 받아들이자 원호는 민족의 전통과 본성을 지키는 것이 송으로부터 자립하는 것이고 나아가 패권을 차지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털옷을 입고 목축에 종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타고난 천성입니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해야 할 뿐입니다. 송나라로부터 받은 그깟 비단옷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ㆍ‘西夏’, 宋遼金과 대등한 황제국이 되다
    원호의 독립과 건국정신은 계속 이어진다. 칭제에 따른 연호의 사용 복식과 군병제(軍兵制)의 정비 예악(禮樂)의 제정 등을 통해 독립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당항족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스스로 대머리 모양의 독발(禿髮)을 하고 모든 당항인들로 하여금 당항족의 풍속인 독발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항족의 의지와 기상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이다.
    벽화에 보이는 서하소년들의 독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도 가장 획기적인 것은 문자의 제정이었다. 서하문자는 한자를 모방해 만든 것이지만 6000여 자에 이르는 독특한 글자는 서하의 주체성을 드높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를 보급하기 위해 각종 문서는 물론 불경과 비문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문화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제정은 민족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지키며 전통을 이어가는 근원이기에 정치적 독립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원호는 정치적 독립만으로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자를 만든 것이다. 문자를 창제한 민족은 많지 않다. 그러하기에 문자를 만든 민족은 자신들의 민족정신을 지키며 역사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자신들만의 문자체계가 없는 민족은 외래문자의 차용으로 고유의 풍속마저 외래의 것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기층민과의 언어소통도 어려워져 이원적인 언어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다. 서하는 물론 서하와 관련 있는 국가들은 모두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요는 거란문자, 금은 여진문자, 몽골은 파스파문자를 썼다. 이들 국가들 모두 칭제를 하며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들 국가의 번영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힘이 곧 ‘문자의 창제’였다.
    서하문자로된 불경

    ㆍ民族繁榮의 源動力 ‘文字의 創製’
    우리도 문자를 창제한 민족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사용하는 민족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인정받은 한글. 이는 문자 자체의 탁월성의 입증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소멸하지 않고 사용되는 한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조선의 세종도 서하를 건국한 원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이제까지 답습되어 온 중국의 습속에서 탈피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주체성과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이면 누구나 쉽게 쓰고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든 것이다. 글자마다 일정한 뜻을 가지도 있는 ‘표의(表意)’문자를 대신하여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쓸 수 있는‘표음(表音)’문자로 바꾼다. 이는 이제까지 한자 사용으로 인한 상하층민의 이원적인 불통(不通)을 깨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문자체계로의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종이 얼마나 영명하고 위대한 임금인가를 잘 깨우치지 못한다. 그저 '한글을 만든 왕'정도로만 이해한다. 대국인 중국의 감시 아래 문자를 창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최만리와 같은 유림집단의 내부적인 반발도 대단하였다. 이 모든 위험요소를 이겨내고 민족의 자존과 전통을 보존한 것이니 실로 얼마나 위대한 임금인가. 이러한 세종의 진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ㆍ집현전 직제학 양성지,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다
    "신이 듣건대 서하는 자신의 예법과 풍속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원호는 영웅으로서 "금의옥식(錦衣玉食)은 우리에게 편리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중략) 우리나라는 요수 동쪽에 대대로 기거하며 만리(萬里)의 영토를 가진 나라로 일컬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 쪽은 산을 등진 형세로 경계가 스스로 나뉘어 고유한 풍속도 다릅니다. 단군 이래로 관청을 설치하고 주(州)를 두어서 우리만의 독특한 덕과 교화를 펼쳐왔습니다. 태조는 훈요(訓要)를 지어서 백성의 의관과 언어는 우리의 것을 준수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해지지 않아서 제나라 사람이 노나라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을 제외하고 중국을 본받지 못하게 할 것이며 언어 또한 통역관 이외에는 옛 풍속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 세조 때인 1455년.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가 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해야함을 역설한 것이다. 사대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단군으로부터 계승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과 문화건설에 힘쓸 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양성지의 상소문

    자국어를 지킨 국가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대등한 국권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못한 국가들은 스스로의 문화조차 소멸되고 말았다. 우리는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어인 한글을 꿋꿋이 지켜냈고 우리의 문화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글은 어떠한가. 국어보다는 영어가 중시되어 언어활동조차 어려운 간난아이를 영어 학원부터 보낸다.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영어부터 가르치면 그 아이의 영어실력은 뛰어날까. 아니다. 어떤 외국어도 모국어의 구사능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실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영어가 모국어인양 한글을 제치고 배우고 있으니 이는 곧 민족주체성의 포기요 대대로 이어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망각하는 일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진정 필요한 만큼의 배움이 소중한 것이니 눌재의 간언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문자의 소멸은 국가의 멸망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유문자의 보존은 국가가 멸망하여도 다시 뭉치는 힘이 된다. 신강성의 위구르족이나 서장자치구의 티베트족 등은 아직도 그들만의 문자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강력한 독립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제국을 건설하였던 요 금 서하는 그들의 고유문자도 사라졌기에 과거의 역사만을 간직한 채 모래바람 속의 폐허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서하왕릉은 원호의 릉인 3호릉만 개방해 놓았다. 흙을 산처럼 높게 쌓아 만든 릉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부서지고 무너졌지만 아직도 하란산을 배경으로 웅장함을 잃지 않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7층으로 지어졌는데 층마다 기와 파편이 즐비하다. 릉을 화려한 누각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서하의 문화는 흙 속의 기와파편 마냥 잠들어 있다. 원호가 그토록 중시했던 서하인만의 풍속도 사라진지 오래다. 칭기즈칸이 몽골에 항거하였다는 이유로 서하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하문자의 소멸이 서하를 역사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게 할 뿐이다.
    ㆍ“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한줄기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왕릉 앞을 지나친다. 원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민족주체성도 저처럼 잡을 수 없는 한줄기 바람이었던가. 아니 모두의 나태와 안일함이 저처럼 바람이 되게 한 것은 아닌가. 서하왕릉에서 원호를 조문한 어느 시인의 감회가 내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대하왕국을 선포한 원호황제를 떠올리나니 拓土開疆忆昊王 이곳에 왕도 세우고 기세 또한 등등하였건만 興州定鼎勢豪强. 화려한 궁전과 전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當年殿閣今何在 황량한 무덤만 외로이 석양을 짝하고 있구나 几處荒陵伴夕陽
    서하왕릉 복원모형.

    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국가도 그렇고 문자도 그렇고 풍속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치열하게 지켜야 한다. 국가를 지키고, 문자를 지키고 풍속을 지키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모두의 존재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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