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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금의 나라 신라는 '서역인의 지상천국'이었다

浮萍草 2014. 1. 13. 06:00
    어째서 무슬림은 공자를 존경하게 되었을까 <서안 9>
    대의 장안은 열린 도시였다. 
    서시(西市)는 외국 상인들의 점포가 밀집된 곳이지만 교역만 하는 곳은 아니었다. 
    로마 그리스 비잔틴 인도 등 여러 문명이 각기 독특한 풍취를 내뿜으며 공존하는 융합공간이었다. 
    생업은 물론 그들의 언어, 문화 종교까지 인정함으로써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당나라를 건국한 세력이 북방유목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아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안을 찾는 서역인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종교도 전해진다. 
    경교(景敎)와 마니교(摩尼敎),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그것인데 중국인들은 이를 삼이교(三夷敎)라 부른다.
    ㆍ삼이교(三夷敎)의 중국 전래
    삼이교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조로아스터교다. 중국에서는 이를 ‘천교(祆敎)’라고 불렀는데 631년 숭화방(崇化坊)에 천교의 사원인 천사(祆祠)가 건립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어둠을 몰아내고 더러운 것을 태워 정화시키는 불을 숭배하였기에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린다. 조로아스터교의 교세가 삼이교 가운데 가장 컸는데 그 이유는 동서교역을 담당하던 서역인들이 가장 중시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당 황실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서역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세운 살보부(薩寶府)라는 관청을 이들의 사원인 천사(祆祠) 안에 두었다.
    경주 원성왕릉의 서역인 무역상
    마니교 또한 페르시아에서 들어왔는데 당시 소개된 많은 종교의 교리가 혼합되어 만들어졌다. 마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측천무후 집권기인 694년이다. 마니교의 경전을 검토한 현종은‘불교의 교리를 함부로 사용한 사교(邪敎)’라고 규정한 후 서역인의 신앙으로만 허용 하고 중국인에게는 엄격히 금지하였다. 한족과는 달리 위구르는 마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생활습속마저 바꾼다. 위구르는 국가경영에 있어서 마니교를 믿는 소그드인들의 도움이 절실하였기 때문에 마니교 우대정책을 펴고 이를 대외관계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니교를 국교화한 위구르는 당나라에도 적극 추천하기에 이르렀고 안사의 난을 진압할 때 위구르의 도움을 받았던 당나라는 마니교의 포교를 허락한다. 대종(代宗) 때인 768년 장안에 마니교 사원인 ‘대운광명사(大云光明寺)’가 건립되고 낙양(洛陽)과 진강(鎭江) 등에도 사찰이 세워진다. 경교는 기독교의 사제인 네스토리우스의 교설(敎說)을 따르는 일파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어 마리아를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가 이단으로 몰렸다. 이러한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35년이다. 이때는 당 태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역 경영에 주력하여 실크로드를 번성시키던 때다. 당나라 때에 로마제국을 ‘대진국(大秦國)’이라고 하였기에 태종은 장안 시내 의령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를 세워 주고 승려의 신분을 부여하여 선교활동에 종사하도록 허가하였다. 당나라는 타림분지의 동쪽으로 빠지는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한 고창국(高昌國)을 점령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 치하여 서쪽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돌궐이 차지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중앙아시아로 교세를 급속히 확장하고 있던 경교가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당으로서는 그곳 정보에 정통한 경교 사제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대진경교 유행 중국비
    명나라 때인 1625년, 경교의 중국 전래 과정을 세세히 적어 놓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 되었다. 이 비에는 경교의 교리가 전래되는 과정과 이를 수용한 당 황실의 공덕을 찬양하고 경교를 선양한 사제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만주어와 한자가 혼용된 비로 비림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국제적인 비석이다. 이 비는 고대 중원과 유럽, 중앙아시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런 까닭에 1867년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외국인이 은 3,000냥으로 이 비를 복제품과 바꿔치기 하려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복제품만 가져갔다고 한다. 영국뿐만 아니라 몇 개국에 복제품이 더 있다는데 이것만 보아도 이 비석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ㆍ경교 유적지엔 염불당이 들어서고
    진눈깨비를 뚫고 대진사를 찾아간다. 대진사는 서안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주지현(周至縣)에 있다. 대진사에 이르니 7층의 경교탑만 우뚝하다. 그 옆에는 진품을 모방하여 만든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있다. 경교탑을 둘러본다.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다. 향이 아직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좀 전에 다녀간 듯하다. 그런데, 기도를 올린 곳에는 경교의 조각상은 없고 불상들만 둥그렇게 앉아 있다. 대진사를 사찰로 착각하여 이처럼 꾸며놓은 것인가. 그 답은 경교탑 옆에 있었다. 3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데 건물 한가운데에 ‘염불당(念佛堂)’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이 당나라 때부터 내려온 유명한 곳이기에 어느 불승이 이곳에 불당을 짓고 영험한 곳이라는 소문과 함께 돈을 벌어보려는 냄새가 흥건하다.
    대진사 경교탑 내부

    이슬람교는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다. 알라신의 가르침이 지브라일(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는 종교다.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고종 때인 651년이다. 13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에까지 교세를 확장한다. 중국에서의 이슬람교는 순탄하게 발전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무슬림의 숫자가 대폭 늘어났다. 중국문화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도 나아갈 정도였다.
    ㆍ이슬람의 愛國愛敎 정신은 공자의 忠義와 일맥상통
    이슬람교가 중국에 들어올 무렵에는 유불도(儒彿道)가 이미 제각기 상황에 맞게 자리를 잡은 때다. 이슬람교가 중국의 주류문화로 편입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회족과 기타 소수민족에게 전파된다. 이처럼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도 이슬람교가 번성하게 된 것은 유교에 대한 태도와 수용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불상이나 그 어떤 형상도 숭배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그런데 공자는 매우 존경한다. 그들은 공자의 윤리도덕을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나아가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한 사람이 많다. 어째서 무슬림은 공자를 존경하게 되었을까.
    대진사 경교탑과 염불당

    이슬람교는 응집력이 강한 정교합일(政敎合一)제다. 특히 신도인 무슬림은‘애국애교(愛國愛敎)’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국가에 충성하고 알라신께 충성하는 이슬람교의 사상은 공자로 대변되는 중국의 유가적 윤리사상과 잘 어울린다. 이슬람교가 중국에서의 전파를 위해 나름대로 중국의 제도와 풍습을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충의(忠義)’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이슬람 교리와도 일맥상통함을 알았던 것 이리라. 이슬람 사원은 모스크(mosque)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청진사(淸眞寺)라고 부른다. 이때의 ‘청(淸)’은 ‘맑고 깨끗함’을 ‘진(眞)’은 ‘진실되고 유일함’을 뜻한다. 청진사에서는 종교 교육이나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중국에서의 이슬람교는 불교나 도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경전인 ‘코란’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유교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이슬람교가 중국문화에 안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안 시내의 고루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화각(化覺)골목이 나타난다. 식당과 가게가 즐비한 골목을 지나 청진사에 도착하니 눈도 그치고 사람도 없는 것이 그야말로 고요한 사원의 모습이다. 서안 청진사는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큰 사원이다. 중국의 전통양식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것으로 현재까지도 보존이 잘되어 있다. 이 사원은 당 현종이 천보 원년(742년)에 편액을 하사하여 건축한 이래로 시대를 내려오면서 규모가 확장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국 4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중국식 정원에 온 듯하다. 나무로 만든 패루(牌樓) 가운데에 ‘도법삼천지(道法參天地)’라는 글씨가 보인다. ‘도법’은 이슬람교를 뜻한다고 하니 ‘이슬람이 온 천지에 가득하라’는 의미다.
    송대 서예가 미불이 쓴 도법삼천지

    ㆍ서역인의 지상천국, ‘신라’
    우리나라와 이슬람이 교류한 것은 신라 때부터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혜초나 원측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서 공부를 하였고 서시에는 신라방을 개설하여 무역에도 힘을 쏟았다. 신라와 당의 활발한 교역은 상호 인적교류를 증진시켜 장안에 들어와 있던 많은 외국인들이 신라로도 건너오게 된다.
    청진사 내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원성왕릉 앞에는 문인과 무인의 석인상이 각각 2구씩 있다. 그런데 무인상의 모습이 특이하다. 부리부리하고 커다란 눈 높다란 코 얼굴을 온통 가리다시피한 수염. 게다가 한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싸울 기세로 서 있다. 마치 무서운 맹수처럼 용맹한 모습이다. 이는 회회(回回)인이라고 부르는 아라비아 무슬림을 표현한 것이다. 신라의 역사문헌에는 기록이 없지만 같은 시기의 무슬림 학자들이 기록한 문헌을 보면 신라시대에 이미 회회인들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9세기에 이븐 쿠르다지바의 기록을 보면,“중국의 맨 끝 광주의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있는 나라가 있는데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는 금이 많아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산다.”고 하였다.
    청진사 예배당

    ㆍ11세기 글로벌 왕국, ‘고려’
    고려시대에는 더 많은 외국인이 살게 되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고려 초기인 현종 15년(1024년) 16년 두 차례에 걸쳐 대식국에서 100여명의 사절단이 토산물을 가지고 내방한다. 대식국은 아라비아의 중국식 표기다. 이 지역에서 대형사절단이 내방하는 것은 양 국가가 서로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인데 이는 대식국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 이다. 아라비아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고려시대에 와서는 그들의 문화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고 문학작품으로도 표현되기에 이른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꼭 쥐네. 이 말이 가게 밖으로 새나가면 조그만 새끼광대 네가 그런 것으로 알리라. 그 곳에 나도 자러 가고 싶구나. (자고나보니) 잔 곳 같이 지저분한 곳이 없더라.
    악장가사에 기록된 쌍화점

    ‘악장가사’에 소개된 고려가요 ‘쌍화점’을 통하여 아라비아인이 쌍화 가게를 하며 고려여인을 희롱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쌍화(雙花)’는 흔히 만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쌍화는 원래 ‘상화(霜花)’를 의미한다. 만두가 밀가루를 얇게 반죽하여 그 속에 여러 가지 소를 넣어 국물에 익히는 것이라면 상화는 가루반죽을 발효시켜서 거피팥소를 넣고 쪄내는 음식이다. 상화는 고려 때 전래된 음식인데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직접 상화를 만들어 대접하였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다. ‘상화(霜花)’의 우리말 고어 표기는 ‘솽화’다. 그런데 한자로 음차를 하다 보니 ‘쌍화(雙花)’가 된 듯하다. 쌍화를 위구르 말로는 ‘만투(mantu)’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한자어로 ‘만두(饅頭)’가 생겨나고 이 말이 곧 역으로 ‘쌍화=만두’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이다.
    ㆍ귀신도 속을 중국인의 상술
    간단한 요기를 할 요량으로 위구르 식당에 들렀다. 상화는 찾을 수 없지만 위구르인들이 즐겨먹는 양고기꼬치와 낭 빵을 시켰다. ‘낭’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빵으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피자 판처럼 둥그렇게 만든 후 화덕에 구워서 먹는데 실크로드의 민족들에게는 주식과도 같은 것이다. 낭 빵 가운데에는 독특한 문양을 새기는데 이는 만드는 곳마다 고유한 문양을 가지고 있어서 맛과 역사를 나타내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꼬치와 빵을 맛있게 먹는데 건너편 좌판에 ‘노파병(老婆餠)’이라고 쓴 과자가 보인다. “할머니 과자라. 할머니들만 먹으라는 과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름이 노파병이지?” 알고 보니 이 과자는 일명 ‘마누라 과자’로 총각이 매일 이것을 먹으면 조만간에 좋은 배필을 만난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술이 아닐 수 없다. 단지 밀가루에 호박을 으깨어 넣고 깨를 뿌려 만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좋다니 중국은 참으로 속이기 쉬운 나라다. 중국에서는 배고파도 음식에 신경을 써야한다. 가짜고기도 만들고 가짜계란도 만들어내는 가짜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재료는 진짜를 쓰고 이름만 가짜인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꼬치와 낭 빵을 배부르게 먹는다. 아직도 보아야 할 곳은 많고 가야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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