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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황제신화의 역사화와 '중화중심제국'의 건설<천수3>

浮萍草 2014. 1. 20. 06:00
    중국은 왜 무덤속에 공자를 꺼냈을까?
    ㆍ화하족의 조상, ‘黃帝’ 이도는 위수(渭水)의 기운을 받은 천수는 신화의 땅이다. 또한 상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이들은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제후국에게 영토를 분봉하는 정책을 폈는데 제후국들이 분열하자 260여년이 지난 기원전 771년에 북방 초원지대에 살던 융적(戎狄)에게 멸망한다. 이후 춘추시대에 제후국들이 융적을 공동으로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화하(華夏)’라고 칭하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때부터 자신들과 다른 이민족은 오랑캐라 하여 차별하였다. 그리고 진한(秦漢)제국시기를 거치면서 변경을 확장하고 이민족들을 한화(漢化)시켰다.
    황제
    화하족이 변경을 확장한 이유는 자원과 기후변화 때문이다. 특히 기후가 한랭건조하게 바뀌면서 생태계가 변화해 원시농업에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화하족과 주변 유목민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진한 통일시기를 거치며 한족을 형성한 화하족은 문자를 통일하고 그들만의 신화와 전설을 만든 뒤 이를‘역사’라고 기록 함으로써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문자가 없던 주변 유목민들은 한족과 자원을 공유하기 위해서도 한족의 역사를 빌려오고 이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한족으로 동화되고 만다. 한족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진한시기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는 수백 년에 걸쳐 통일된 제국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록이 이 시대에 쏟아져 나왔고 한족은 이러한 역사적 기억을 대대로 계승⋅발전시키며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대⋅전승하였다. 문자의 발명과 한 발 앞선 기록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는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실로 우리 문자인 한글을 발명한 세종의 위대한 고투(苦鬪)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민족을 배척하는 한족의 태도는 중국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우면서 서서히 바뀐다. 국민국가 건립에 가장 큰 문제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였다. 국민당 정부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소수민족으로 개편한 뒤,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함께 ‘중화민족(中華民族)’으로 재구성하였다.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에서는 사회경제적⋅민족적 갈등이 심하며 소수민족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하남성 신정에 위치한 황제릉

    지금도 김장감을 늦출 수 없는 티베트족 문제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신강성의 위구르족 문제 등은 향후 중국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4대 공정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역사왜곡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이다. 역사를 중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역사의 준엄한 가르침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치부를 가리기 위해 은밀히 조작하고 폭력을 행사하다가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만다. 이 또한 역사가 증명하고 시인들이 누누이 강조한 일이다. 이 땅을 밟으니 끝없는 회포가 솟아나고 經過此地無窮事 바라보니 왕조의 흥망사에 가슴이 미어진다 一望凄然感廢興 위수 터는 진나라의 중심지였고 渭水故都秦二世 함양 언덕 가을 풀밭엔 한나라 왕들 묻혀있네. 咸陽秋草漠諸陵 텅 빈 하늘엔 어디선가 기러기소리만 들리고 天空絶塞聞邊雁 흩날리는 낙엽 너머 외딴집 등불만 반짝이누나. 葉盡孤村見夜燈 검푸른 하늘 아래 새겨진 한은 그 얼마인가 風景蒼蒼多少限 언 산에 걸려있는 흰 구름만 처량하도다. 寒山半出白雲層
    비옥한 황하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이겨내려는 노력은 남성적인 힘의 결집을 필요로 하게 되고 마침내 거대한 군사력과 노동력을 동원하는 전제군주체제를 탄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화하족의 공동조상이자 지고의 신으로 숭배되는 황제(黃帝)가 탄생된다. 하늘의 아들인 황제는 천명을 받드는 신성한 존재를 자처하며 중원은 물론 오랑캐의 땅까지 절대적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ㆍ사마천에서 시작된 황제신화의 역사화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역사 이전의 시기를 다뤘다. 그는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남성신을 다루면서 황제를 맨 먼저 언급한다. 그의 작업을 통해 당시 중원에 흩어져 살던 다양한 종족들은 ‘화하공동체’로 편입되었고 모두가 황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사마천에 의해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순(堯․舜) 등 신화 속의 남성들이 덕망을 지닌 위대한 제왕이 되어 화하족의 정신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형상화된 것이다.
    사기오제본기

    사마천은 신화 속의 오제가 실존했던 인물들이기를 바랐다. 괴이하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서술함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들이 오제를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사마천이 취사선택한 역사는 신화에서 비롯된 전통과 이를 뒷받침하는 하늘의 감응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시작된다. 황제는 이러한 신화적인 전통과 하늘의 덕을 받아 인간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황제로부터 역사를 풀어가고자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옛날 황제가 하늘과 땅을 본받자 4명의 성군이 차례로 그 뒤를 이어서 각각의 법도를 이루었다. 당요가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훌륭한 제왕의 공덕이 만세로 전해져야 할 것이기에 ‘오제본기’ 제1을 지었다.”
    ㆍ중국 중심의 천하관
    사마천에서 비롯된 오제의 역사화는 이후 중국인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교훈을 전달하는 메시아 역할을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사마천이 바라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황제는 화하족의 시조가 되어 중국 역사학자들과 위정자들의 품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고, 중화민국 초기에는 혁명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된다. 서쪽에서 온 황제가 치우를 이겼거 늘西來黃帝勝蚩尤 숲을 향해 자유를 묻지 마라. 莫向森林問自由 성스러운 땅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점령되었으니 聖地百年淪異族 석양에 홀로 서 이 땅을 슬퍼하네. 夕陽獨白弔神州 노예 노릇하는 것이 어찌 조상들의 뜻이랴 爲奴豈是先民志 역사 기록 오래 남아 후대에 치욕되리라. 紀事終遺後史羞
    청나라 말기의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의 통치를 끝장내기로 뜻을 모은다. 그리하여 반청혁명은 불타오르고 지식인들은 화하족의 시조인 황제가 치우를 물리쳤듯이 이민족을 물리치고 한족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근대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인 노신(魯迅)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피할 길 없이 신의 화살을 맞고靈臺無計逃神矢 비바람 몰아치는 바위처럼 조국은 어둡기만 하네.風雨如磐暗故園 찬 별에 뜻 전해도 향초는 이 마음 모르나니寄意寒星荃不察 나, 나의 뜨거운 피를 헌원 황제께 바치리라.我以我血薦軒轅
    중국인에게 있어서 황제 헌원은 정신적 고향이다. 중화 중심의 천하 그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이끌어 온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토록 우월한 문화를 창조한 중국이 근대로 접어들면서 서구의 군사적 침략으로 굴욕을 당한다. 중화 중심의 천하질서 운영이란 당위성이 깨진 것은 물론이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ㆍ大國崛起를 향한 중국의 ‘역사 기획’
    21세기, 개혁개방정책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화 제국의 전통을 잇기 위한 ‘강한 중국의 부활’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황제 헌원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부활한 황제는 신화로만 머물지 않고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나아가 한족은 물론이고 소수민족까지 아우르는 중국인의 공동조상으로 낙점되었다. 허구적 조작으로 만들어진 혈연관계는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소수민족까지 동일민족이라고 몰아가면서 중화 중심의 강력한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제신화는 뿌리가 다른 소수민족들을 하나의 제국에 편입하는 데 더없이 좋은 수단인 셈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화문명 5,000년’이란 황제기년(黃帝紀年)을 설정한 뒤, 민족대단결과 중화 자긍심 고취를 위한 또 하나의 야심찬 역사기획을 마련한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 그것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사마천에게서 비롯된 중화문명의 자긍심을 영원히 변치 않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짓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중국은 ‘과학적 고고’라는 미명 하에 하상주단대공정을 시작해 하(夏)나라의 역사 연대와 상(商)과 주(周)나라의 건국 시점을 확정한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마천도 확정하지 못한 연표를 무려 1,229년이나 앞당겨 기원전 2070년으로 확정한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 있던 하나라를 역사책에 올려놓음으로써 ‘중화문명 5,000년’이라는 명제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ㆍ중국, 거짓 고대사를 믿어야 하는 진흙탕에 빠지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까? 하나라의 존재를 입증하는 명문이나 출토문자가 있는가? 없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 “같은 시대의 문자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다면 여전히 의문이다.”라고 하였다. 과학적 연대측정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소망하는 것일 뿐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기년을 앞당긴 이유는 무엇일까? 하상주단대공정의 이론자인 이학근(李學勤)은 아예 달성목표를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연표(年表)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문명을 1,000년 정도 더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화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상주단대공정이 일단락되자 이제는 황제시대의 역사화 작업인‘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거침없이 그리고 대대적으로 시작된다. 1단계 5개년 연구가 끝난 때인 2005년에는 요순(堯舜)시기가 역사에 포함된다. 확정연도는 기원전 2500년이다. 신화전설의 역사화 작업은 더욱 박차를 가하고 그 결과 2010년에는 황제가 역사시대의 인물로 편입된다. 확정연도는 기원전 4000년. 중국의 역사 끌어올리기 프로젝트는 이제 삼황(三皇)과 반고(盤古)가 살았던 시대만 남겨놓고 있다. 중화 제국의 부활에 필요한 것이라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진실한 고대사에 의문을 던지고 거짓 고대사를 믿어야 하는(懷疑眞古 相信假古) 진흙탕에 빠졌다.”고 비판하지만 중국의 역사프로젝트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폭주(暴走)하고 있다.
    ㆍ중화중심제국을 위해 ‘골방의 공자’를 꺼내다
    중국의 역사 프로젝트는 ‘대국굴기’를 향한 것이다. 7세기 실크로드로 획득한 당대의 번영을 되찾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의 강역을 넘어서기 위한 국가적 비전인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을 변방으로 간주하거나 중화와 무관한 대상으로 확정하게 되면 한족과 관련이 없던 땅의 소수민족들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민족일체론’이라는 보다 확장된 중화제국이론 속으로 소수민족들을 포섭한다. 다민족일체론은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정립해야하는 이념과제인 것이다. 중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으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자

    중국은 21세기 대국굴기란 역사와 정치의 대국에서 문화의 대국에 있음을 알고 ‘문화대국’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문화대혁명 이후 골방에 처박혀있던 ‘공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중세봉건시대 아시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공자의 유교사상이 중국이 추진하는 ‘중화중심주의’에 절대적으로 부합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400여개의 ‘공자학원’을 개설하고 우리 돈으로 약 240억원을 투자하여 중화인본주의의 역사와 우수성을 알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ㆍ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고조선의 ‘요하문명’
    또한 황하문명의 탄생지인 앙소문화 유적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요하문명인 홍산문화 유적이 지금의 요녕성 하가점(下家店) 일대에서 발굴되자 이것은 황하문명이 동쪽 으로 퍼져나간 결과라고 억지를 부린다. 중국문명의 기원을 1000년을 더 높여 잡으려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은 우리의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동이족의 문명이다. 특히 하가점 일대의 유물 중에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나왔다. 5천년 가량 된 여신상도 발견되었는데 곰발바닥 모양의 형상이 함께 있었다. 단군왕검시대의 곰 토템신앙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요하 문물의 산실 홍산문화유적지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사례가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학계에선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쌓아온 아성이 무너질 것만 두려워하는 눈치다. 모든 것은 새로운 것에 의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중국은 학계를 동원하여 정치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판에 우리는 스스로 반도사관에 안주하고 있으니 실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하문명의 상징인 여신상과 곰발바닥

    ㆍ“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
    치국을 위한, 치국에 의한 치국에 복무하는 역사 자국에 불리한 역사는 빼고 유리한 것은 대대로 확대하며 타국의 역사는 편리하게 예단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기록방법 이다. 중국 역사학의 시작이 이곳에 있음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 중국뿐인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역시 우경화정책을 앞세운 군비재무장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날조하는 이웃들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 역사를 등한시함은 물론 영화나 방송매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위적이다. 인기몰이와 상업주의에 역사를 팽개친 꼴이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청소년의 정신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역사인식의 부재로 이어진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의 역사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주변국의 역사왜곡과 국가적 간섭으로부터 이를 능히 물리치는 철옹성이 되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역사를 아는 일에 모두가 앞장서야만 한다.
    하가점 출토 고조선 유물 비파형 청동검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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