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37> 부산 돼지국밥집

浮萍草 2013. 12. 27. 21:20
    고단함 달래준 국물·허기 채워준 꾸미… 추억을 먹는 ‘솔푸드’
    사라져도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조방 교통부 보림극장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관광지도 아니고 중심가도 아니지만 범일동은 부산 사람들의 추억이 깊게 남아있는 곳이다. 추억과 함께 범일동 주변에는 부산 사람들의 영혼의 음식이라 부르는 돼지국밥집들이 오래전에 탄생해서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범일동은 경부선 철로가 한가운데를 지나는 탓에 나뉘어 있다. 지하철 범일역 주변에는 평화시장 국제시장 같은 도매시장들과 현대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는 1917년에 세워진 조선방직이 있던 자리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섬유산업 중심지였던 조방(朝紡·조선방직주식회사)은 196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조방이란 이름은 길 이름으로‘조방낙지’란 음식 문화로 남아있다. 철길 건너편에는 삼화고무(1934∼1992)가 중심에 있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부산 송정동의 ‘삼대국밥’, 50년 전통의 ‘할매국밥’집, 지금은 대형마트로 바뀐 보림극장이 있었던 부산 범일동 전경. 박정배 씨 제공
    유와 신발 같은 부산을 대표하는 경공업의 중심지였던 범일동 일대에는 젊은 노동자들이 넘쳐 났다. 6·25전쟁 이후에는 북한 출신의 실향민들까지 터를 잡았다. 보림극장 삼성극장 삼일극장 같은 범일동의 극장들은 눈을 뜨면 끼니를 걱정하던 실향민들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섬유와 고무신을 만들던 노동자들의 ‘꿈의 공장’이었다. 저녁이나 주말이면 극장에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영화 ‘친구’의 최고 명장면인 친구 네 명이 달려가는 신의 주 무대는 범일동에 있던 삼일극장(2006년 폐관)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범일동의 극장가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 섬유산업과 고무산업이 쇠퇴하면서 공장들이 떠나자 덩달아 쇠락한다. 하지만 보림 삼성 삼일 등의 범일동 극장 삼총사는 2000년대 중반까지 명맥을 이었다. 노동자와 실향민들이 모여들자 식당들이 들어섰다.
    ㆍ# 이북식 돼지국밥의 성지
    1956년 ‘할매국밥’은 삼화고무 공장 담벼락 앞에 작은 노점으로 장사를 시작한다. 가격이 저렴한 돼지머리를 고아 만든 돼지국밥은 가난한 노동자와 더 궁색한 실향민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평안도 실향민 출신의 고 최순복 창업주는 북한에서 먹던 방식인 돼지 살코기를 이용한 맑은 국물에 밥을 말아 팔았다. 살코기로 끓여낸 맑은 국물의 돼지국밥은 ‘이북식 돼지국밥’이라 부른다. 반대로 뼈로 끓여낸 탁한 국물의 돼지국밥은 ‘경상도식 돼지국밥’이라 칭한다. 할매국밥은 이북식 국밥의 전형이다. 할매국밥이란 식당 이름은 파는 사람이 아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 할매(할머니)’가 만든‘국밥’이란 보통 명사에 다른 식당과 구별하기 위해 ‘교통부’란 이름이 붙었다. 1950년부터 임시 수도의 교통부 청사가 범일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통부는 몇 년 만에 서울로 옮겨갔지만 이름은 남았다. 현재도 사람들은 누리마트(옛 보림극장) 뒤쪽에 있는 할매국밥집을 ‘교통부 할매국밥’이나 ‘보림극장 할매국밥’으로 부른다. 1955년에 문을 열고 1968년에 지금의 자리에 커다란 건물을 짓고 영업을 시작한 보림극장은 영화 상영은 물론 1970, 1980년대에는 하춘화·나훈아·조용필의 쇼를 공연하던 복합 극장이었다. 당대 슈퍼스타의 공연 때문에 보림극장은 부산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공간이었다. 2007년에 문을 닫은 보림극장은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이다. 정면에서 보면 창이 없는 커다란 앞면이 인상적이다. 수많은 영화와 쇼를 알리는 간판이 걸렸던 추억의 벽이다. 보림극장은 현재는 마트로 사용되고 있지만 버스정류장 이름으로 남아있다. 보림극장 뒷골목의 작은 언덕이 시작되는 곳에 할매국밥이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주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식재료와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여줄 만큼 이 집의 음식에 대한 생각은 개방적이고 자신감이 넘친다. 입구 광주리에 담긴 어른 팔뚝만 한 북한식 대창순대가 유독 눈에 띈다. 아침 10시 반, 점심 손님을 맞기 위해 두 분의 아주머니가 날렵한 솜씨로 수육을 썰고 있다. 그 뒤로 몇 개의 솥에서 돼지육수가 끓고 있다. 동행한 친구와 국밥 한 그릇과 ‘수백’ 1인분을 시켰다. 수백(수육백반의 준말)은 부산 돼지국밥집의 필수 메뉴다. 수백은 저렴한 가격에 수육과 국물,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메뉴다. 할매국밥의 돼지국밥 가격은 4500원으로 부산의 돼지국밥집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편이다. 맑은 국 속에 토렴한 밥이 고기 몇 점과 잠자듯 숨어있고 그 위로 부추와 파와 양념장만이 얹어져 나온다. 고소하고 소박한 고기국물이 처음에는 평범한 듯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편안한 국물이다. 적당한 온도는 오랜 친구 같다. 단맛이 날 정도로 맛있고 부드러운 삼겹살 수육이 국물과 밥과 함께 이 집의 돼지국밥을 완성시킨다. 창업주가 살아 있을 때는 머리고기를 많이 사용했지만 사람들의 입맛 변화로 점차 삼겹살로 우려낸 국물을 내고 삶아낸 삼겹살을 꾸미로 낸다. 등뼈와 다리뼈를 넣고 끓인 육수에 삼겹살 덩어리를 넣고 한 번 더 끓여낸 국물로 만든 육수는 삼겹살에 많은 초점이 맞춰 있다. 진한 고기 맛이 나는 늙은 돼지고기를 섞어 끓이면 국물의 맛이 좀 더 깊어지고 진해진다. 현재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돼지국밥집으로 알려진 식당은 서면시장 돼지국밥 거리에 있는 ‘송정 삼대 국밥집’이다. 1946년에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동에서 1952년에 창업한 ‘하동집’과 토성동에 있는 ‘신창국밥’ 같은 노포(老鋪)들은 직간접적으로 실향민의 영향을 받고 있는 집들이다. 실향민과 연관 있는 돼지국밥집은 맑은 국물을 사용하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ㆍ# 경상도식 돼지국밥의 번성
    할매국밥이 있는 보림극장 주변에서 건너편 평화시장 주변으로 가려면 철길 위에 놓인 제법 긴 육교를 건너야 한다. 육교 밑에는 육교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오래된 빵집이 몇 개 있다. 제과기술을 배워 빵을 팔아오며 세월을 견딘 늙은 부부들이 운영하는 집의 빵은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화려한 빵보다 투박하지만 신선함과 빵을 만든 사람의 손자국이 그대로 묻어있는 수제빵이다. 바로 옆에 우뚝 선 현대백화점과 묘한 상생의 공존을 하고 있다. 그 너머는 커다란 시장들이 몇 개 자리 잡고 있다. 현대식 건물과 1980년대식의 오래된 상가와 그 사이에 섬처럼 남은 실용성이 강조된 박스처럼 생긴 낡은 상가들이 각자 따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뒤섞여 있다. 평화시장 공구상점 골목 입구는 조선방직의 정문이 있던 자리였다. 이런 공간 가운데 지금까지 남은 3곳의 돼지국밥집과 사라진 더 많은 돼지국밥집이 이곳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지금은 주변에 들어선 몇 개의 도매시장 상인들이 가장 많이 돼지국밥집을 이용하지만 이전에는 버스기사, 택시기사와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중요한 식객이었다. ‘마산식당’ ‘합천식당’ ‘하동식당’ 이곳에 남아있는 세 곳의 식당 이름이 모두 부산 주변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 길가에 늘어선 세 집 앞을 지나면 구수한 고기 냄새가 혀와 뇌를 동시에 자극한다. 국밥을 시키면 뚝배기에 식힌 밥과 잘라놓은 고기를 넣고 솥에서 국물을 퍼서 뚝배기에 담았다 뺐다를 반복한다. 24시간 끓여낸 사골국물이 솥에서 나와 뚝배기에 담겼다가 다시 그 국물이 솥으로 들어간다. 솥 속의 국물과 뚝배기의 국물이 서로 섞이는 과정 속에 고기국물이 식은 밥 속에 배어 들고 살코기에 섞여 들어 고기 밥 국이 한 몸이 되고 뚝배기와 솥 속의 사골국물이 다시 섞여야 돼지국밥 한 그릇이 완성된다. 어둡고 탁한 국물은 오랫동안 끓여낸 사골에서만 나는 인고의 색이다. 세 집 중 맨 끝에 있는 마산식당은 허영만의 국민 음식 만화 ‘식객’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오전 10시, 밥을 먹기 애매한 시간이지만 50대 중반의 아저씨 몇 분이 탁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있다. 이 집의 오랜 터줏대감인 택시기사들이다. 돼지국밥 한 그릇을 시키면 잘게 자른 고기가 밥과 함께 그 국물 속에 가득히 담겨 나온다. 돼지국밥은 ‘맛의 음식’이기에 앞서 ‘양의 음식’이다. 국과 함께 밥만 먹거나 살코기만 먹는 것은 이 집 국밥을 제대로 먹는 방법이 아니다. 식당 한쪽 벽면에 ‘한 숟갈에 고기 한 점이 없으면 돼지국밥이 아니다’란 문구가 붙어있다. 돼지국밥은 밥과 국 고기를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한국인의 밥상’의 패스트푸드형 축소판이다. 작은 식당이지만 예닐곱 명의 여인이 이 음식을 24시간 만들고 판다. 식당은 1960년대 말 마산 출신의 할머니가 처음 시작했다. 44년의 세월 동안 고향을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은 마산식당과 주변의 돼지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고향과 어머니와 따스한 밥 한 그릇의 기억을 문신처럼 몸에 남겼을 것이다. 먼 땅을 떠돌다가도 뇌 속에 남은 기억이 몸을 깨우면 사람들은 다시 고향을 찾아 국밥을 먹으며 세상을 살아왔다. 부산사람들이 왜 돼지국밥을 ‘솔푸드(soul food·영혼의 음식)’라 부르는지 이곳의 소박한 돼지국밥 한 그릇이 보여준다. 1960년대 중반에 지은 돼지국밥집들이 들어선 건물은 서부터미널에서 영업권을 받은 버스회사 사장이 지은 건물이다. 창업 당시에는 서너 개에 불과했던 돼지국밥집은 1970년을 지나면서 10여 개로 늘어났다. 서부터미널 주변은 교통의 요충지다. 대연동·해운대·사상 같은 부산 각 방면으로 가는 중심지이자 마산과 경남 일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점이었다. 1970년대 당시에는 터미널 주변에 오일장도 열렸다. 장날이면 경남의 장돌뱅이와 할머니들이 몰려들었고 주변에서는 서커스 공연도 열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교통수단이 집중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택시 연료인 LPG충전소가 인근에 있었고 차를 대기에 편한 여러 가지 장점 덕에 택시기사들은 이곳의 돼지국밥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게다가 택시기사 자신을 위한 실리적 필요성도 한몫을 했다. 태울 손님이 많은 환경에 저렴한 가격에 밥과 국 고기를 한꺼번에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돼지국밥은 시간을 먹고 사는 기사들에게는 맞춤형 음식이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택시는 버스만큼 중요한 대중교통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마이카 붐이 일기 전에 택시는 개인 공간이 확보된 약간 고급스러운 대중교통이었다. 택시기사들은 속이 든든해야 일이 잘된다 하면서 국밥집을 찾았다. 같은 식당을 하루에 두세 번 오는 택시기사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통금시간을 제외하고 마산식당의 문은 닫힌 적이 없다. 새벽이나 밤늦게 찾아오는 운전기사를 빈속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 서부터미널은 부산의 서쪽 끝인 사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십여 개가 넘던 돼지국밥집은 이때 터미널을 따라 대부분 사상으로 옮겨간다. 사상의 서부터미널 주변에 번성 중인 커다란 돼지국밥 식당들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오랫동안 범일동에서 장사를 해오던 지금의 세 집은 남았다. 버스기사들이 떠난 자리를 시장 상인과 일반인들이 채웠다. 1981년 통행금지가 풀리자 술을 먹은 취객이 허기를 달래며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기에 돼지국밥은 이상적인 음식이었다. 돼지 꾸미는 안주로, 국물은 해장으로,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돼지국밥은 급하게 달려온 1970년대와 함께 성장한 거친 ‘야성’을 지닌 음식이었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돼지국밥은 돼지 누린내가 좀 심해서 술과 함께 먹거나 냄새에 익숙한 사람들이 먹던 남자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소개팅이나 미팅을 한 여자가 맘에 안 들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거칠고 냄새 나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미팅을 나온 여자들 누구라도 돼지국밥집은 자신이 맘에 안 든다는 남자의 메시지를 알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이별이 돼지국밥 언저리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십수 년 전부터 육수를 낼 때부터 다양한 기술의 발전이 이뤄지면서 지금은 냄새가 심한 돼지국밥집은 거의 없다. 부산의 돼지국밥집은 2013년 4월 현재 710여 개에 달한다. 경남 전체의 돼지국밥집 수인 795개와 견줄 만하고 대구의 324개 경북의 281개, 경기 84개에 비교해 보면 부산 사람들이 돼지국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다. 유통, 냉장기술의 발달과 조리법의 평준화로 전국의 음식 문화가 비슷해지는데 유독 돼지국밥 문화만은 부산과 경상도에서 성행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돼지국밥은 특정 계층이 먹던 음식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음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돼지머리나 뼈, 내장 같은 값싼 돼지 부속물을 이용한 서민적인 음식이었던 돼지국밥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삼겹살은 물론 돼지고기 중 가장 비싼 항정살을 이용한 돼지국밥이 등장하면서 진화, 발전하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돼지국밥집에 가보면 젊은이는 물론 아이와 젊은 아줌마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겉으로 무뚝뚝해 보이는 부산 사람들의 입맛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음식 파워 블로거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도 부산이다. 고기 문화가 급속도로 탕 문화에서 구이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시대에 부산 범일동의 돼지국밥 문화의 견고함은 오래된 것의 특이한 승리다. 겨울이 깊어지니 구수한 돼지국밥 한 그릇이 그리워진다. 영화 ‘변호인’에서 부산 사나이 송강호를 키운 건 단언컨대 돼지국밥이었다.
    Munhwa         박정배 음식컬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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