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39> 신촌 다방

浮萍草 2014. 1. 10. 19:12
    첫 미팅·첫 블랙커피·첫 詩作… 가장 저렴했던 ‘영혼의 쉼터’
    내가 태어난 해는 1960년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 생)의 가운데 쯤이다. 성장기 내내 살인적인 경쟁과 줄서기에 시달리며 경마장에서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앞으로만 일로매진하다가 대학에 입학한 나 또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긴급한 선결과제는 짝을 만나는 것이었다. 천만다행하게도 그것은 이미 ‘미팅’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원시 부족의 성인식처럼 엄숙하고 무거운 의미가 깃든 나의 ‘첫 미팅’은 입학식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하는 미팅에 결원이 생겨서 대타로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첫 미팅이 이루어진 장소가 바로 대학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독수리다방’이었다
    대학생들의 단체 미팅 장소로 유명했던 서울 서대문구 신촌 독수리다방의 1970년대 모습. 지난해 1월 재개점한 독다방 갤러리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1970∼80년대 초창기 독수리다방 사람들. 독다방 갤러리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했다. 김동훈 기자
    얼음이 낀 듯 긴장된 분위기에서 남녀 각 다섯 명이 마주 앉았다. 남학생들의 주머니에 든 물건을 여학생이 선택함으로써 일단 자리가 정해졌다. 서로 얼굴도 마주 보지 못하고 내외하듯 어색하게 앉아 있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상대 여학생이 내가 그때까지 보았던 어떤 여학생보다 아름답고 지성적이며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여학생 역시 첫 미팅임이 분명했다. 다방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 앞의 네 커플이 모두 “커피”를 주문했다. 그때 난데없이 타고난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하는 바람에“난 홍차”라고 하고 말았다. 고맙게도 내 상대가 “저도 홍차”라고 호응해 주었다. 이윽고 찻잔이 각자의 앞에 놓였다. 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서 마실 수 있게는 되어 있었으나 누구도 거기에 손을 뻗지 못했다. 손이 떨려서 쏟을까봐. 문제는 내 앞 탁자 위에 뜨거운 맹물이 든 찻잔과 스푼 약봉지처럼 자그마한 종이봉지가 날라져 와 있다는 것이었다. 평생 처음 마시는 블랙커피를 목마른 염소처럼 들이켜는 친구들 사이에서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종이봉지를 뜯고 안에 들어 있는 찻잎을 잔 속으로 투하했다. 찻잎이 미역국의 미역줄기처럼 불어나도록 스푼으로 휘저었다. 내 상대가 된 여학생은 잠시 멈칫하더니 나처럼 종이봉지를 찢고는 차를 찻잔에 넣었다. 나는 우물가에서 버들잎이 들어 있는 물바가지를 받아든 고려 태조 왕건처럼 찻잎을 후후 불어가며 홍차를 마셨다. 참을 수 없이 떫고 썼다. 얼이 빠져서 무슨 말을 못할 정도였다. 나의 첫 미팅은 그렇게 떨떠름하고 씁쓸하게 끝나 버렸고 자격지심에 다시 만나자는 기약 - ‘애프터’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어 있던 - 또한 신청하지 못했다. 첫 미팅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혹시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1학년 1학기 내내 50번의 미팅을 치러냈다. 하지만 첫 미팅처럼 긴장되고 짜릿한 느낌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토록 아름답고 상대를 배려해주는 여학생 또한 만나지 못했다. 다만 남들보다 더 많은, 다양한 형태의 다방을 경험할 수는 있었다. 나중에 이상(李箱)처럼 다방을 차릴 것도 아니면서. 당시 신촌에서 미팅이 잘 이뤄지는 다방의 대표선수는 ‘독수리다방’이었다. 여기에는 미팅으로 첫사랑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순진한 부류가 드나들곤 했다. 가벼운 록음악에서 경음악을 비롯한 이지 리스닝 음악이 흘러나왔고 장소가 넓고 사람들이 많아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경우 미팅을 할 때 더러 경양식집에 갈 때도 있었으나 첫 미팅을 했다는 상징성 독수리다방이 가진 지명도 때문에 절대 다수의 미팅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미팅과 상관없이 어쩌다 혼자 들르게 되었다가 마음에 들어서 다시 가게 되는 다방도 있었다. 그런 다방의 대표적인 곳이 지금은 없어진 ‘캠퍼스다방’이었다. 내 마음에 들면 내 친구 마음에도 들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단골로 출입하게 되었다. 주인은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멀지 않은 이화여대의 ‘메이 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리의 열렬한 흠모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늘 계산대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곤 했다. 계산을 할 때나 그녀의 눈을 들게 만들 수 있었다. 당시의 하루 용돈이 대략 1000원이었다. 담뱃값이 300원 식대가 300원 왕복 합쳐 100원 남짓 했던 버스비를 빼고 나면 나머지가 커피값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왼쪽에는 바람과 햇빛이 들어오고 늘 물 새는 소리가 나는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작은 거울만 한 유리를 단 문이 나왔다. 들어가자마자 작은 DJ 박스가 나왔으나 DJ는 없었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비지스나 나나 무스쿠리 아바처럼 듣기 편하고 조용한 곡들이었다. 리어카에서 파는 한때의 인기 가수들 가령 조르주 무스타키나 레너드 코언이며 앙리코 마시아스의 테이프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와서 각자 무슨 이야기를 하거나 낙서를 하거나 여주인의 초상을 그리면서 헛되이 시간을 흘려 보냈다. 기껏해야 다른 테이블의 이성을 훔쳐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듣는 게 다였다. 그러니 ‘청춘사업’의 수확도 없고 다방 역시 당장 망할 것처럼 경쟁력이 없었으나 하루라도 가지 않으면 교양필수 과목 수업을 빼먹은 것 같았다. 거기서 끄적거리던 낙서 중 일부는 시가 되었고 그 다방에서 열린 아마추어 시낭송회에서 읽히기도 했다. 비가 와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지하다방도 있었다. 클래식 음악다방이었다. 이름이 ‘징검다리’였던가. 거기서 베토벤의 첼로소나타를 듣고는 클래식 음악이며 음반 오디오 커피 맛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시를 쓴 곳도 거기였다.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술과 장미의 나날’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이층에 있던 ‘미네르바’는 격조 있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를 사이폰 커피로 내놓는 곳이었다. 하루 1000원의 용돈으로는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운 곳이어서 아르바이트비를 받거나 근처의 직장에 다니는 누나의 월급날에나 갈 수 있었다. 복학생과 직장인처럼 보이는 남녀가 ‘소개팅’을 하고 있기도 해서 예습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네르바와 징검다리 중간쯤에 있던‘복지다방’은 넓고 싸고 사람 많고 시끌벅적하면서 별다른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의 대표 격인 다방이었다. 얼마나 부담이 없었느냐 하면 축제 때 술에 취해 패싸움을 하다가 잘 모르는 상대의 주먹에 맞아 이가 부러진 친구를 위해 각서를 쓰고 치료비가 오가고 하는 합의를 보는 데도(단지 내가 법학과에 다닌다는 이유로) 복지다방을 이용할 정도였다. 불 붙은 담배로 소파에 구멍을 내는 이들의 악행이 아니더라도 싸구려 비닐 소파는 처음부터 고물이었고 나이가 좀 많은 남자들 ‘노땅’이나 ‘노털’로 불리던 사내들이 종일 뭉개는 바람에 가운데가 푹 꺼져 있었다. 집에 괜찮은 오디오가 없는 처지라 다방에서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들으려면 역시 여자대학 앞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화여대 정문 곁에 있던 ‘파리다방’은 미녀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음악을 듣는 데 심대한 장애로 작용했다. 파리다방 길 건너편 이층에 있던 ‘미뇽다방’은 ‘Mignon’이라는 말뜻 그대로 작고 예뻤다. 골목 안쪽의 ‘올리브’는 신생 다방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오디오를 당시에는 최고급으로 알려진 기기로 들여놓았다. 음반도 다른 곳에 없는 것이 많았다. 내가 들어본 음악 가운데 가장 지루하고 어려운 바흐의 ‘푸가의 예술(Die Kunst der Fuge)’을 신청해 들은 곳도 그곳이다. 같이 간 친구가(그때는 친구가 아니라 군대 선후배로서 휴가를 나왔었다) 어떻게 그런 곡을 다 아느냐고 깜짝 놀라는 것을 즐기기 위해. 미팅은 1학년 1학기 이후 하지 않았지만 다방 출입은 계속되었다. 친구들과 만나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해 듣기도 하고 난데없이 습격해온 센티멘털리즘을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 안전하게 처리하기도 하고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예술 사상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들의 명단을 대학노트 뒷장에 작성하고 그것에 대해 몇 시간 동안 격하게 토론한 뒤 재떨이에 불태우기도 했다. 다방은 우리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강의실이자 영혼의 쉼터였다. 청춘의 어느 순간, 공간은 솔(soul) 푸드처럼 살아가는 내내 그때 그 시공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영혼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던 곳 내 인생의 한 장면이 만들어지던 신촌의 다방에 얽힌 추억은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처럼 대뇌피질에 남아 있다. 내 말에 조용히 동조해줄 여학생, 지금쯤 어디서 누구의 목도리를 뜨개질하고 있을까.
    Munhwa         성석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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