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6 '대당서역기'는 서역정벌을 위한 '1급 보고서'였다

浮萍草 2013. 12. 25. 06:00
    당태종, 버선발로 현장을 맞이하다 <서안 6>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축(天竺)까지 가야 한다.” 약 1,400년 전 20대 청년 현장(玄藏)이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성을 몰래 빠져나간다. 지방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3세에 승려가 되고 21세에는 승려로서 습득해야 할 체계적인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현장의 갈증은 여전하였다. 그 이유는 경전의 일부만이 번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 용어들 가운데는 도교의 용어와 개념을 빌려와 번역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은 스스로 천축에 가서 경전을 구해오기로 마음먹고 각종 언어를 공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승려는 공무가 아니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심(佛心)으로 무장한 현장은 기회를 노리다가 드디어 목숨을 건 머나먼 여행을 시작한다.
    ㆍ장안성을 몰래 빠져나간 청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 한(漢) 명제(明帝) 시기 이전이다. 범엽(范曄)의 ‘후한서’에 보면 명제가 꿈에 ‘금빛 몸을 한 1장 6척의 신인(神人)’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로부터 꿈속의 신인이 ‘서쪽의 성인인 부처’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렇게 부처의 존재가 한나라에 이미 알려져 있었으니 불교는 적어도 명제 이전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불경을 전한 승려들은 대부분 서역과 인도 승려들이다. 외국인이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오역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르고 분파도 제각각이어서 번역가들 사이에서도 불경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므로 불경의 내용이 혼란스러웠고 심지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승려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혹스럽고 난해하기까지 하였으니 불경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도(佛道)를 밝혀 중생을 구제하고자 나선다. 이른바 ‘서천취경(西天取經)’ 즉 서쪽의 천축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험난한 ‘서천취경(西天取經)’의 길 위진남북조시대에 정치․사회가 혼란해지자 불교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경을 구하려는 승려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중 두각을 나타낸 승려는 법현(法顯)이다. 399년 65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서역으로 향한 법현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천축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서 불모지였던 중국의 원본 불경 번역계를 개척 하였다. “서역을 향해 사막을 지날 때 머리 위로 새 한 마리 땅에 짐승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아득히 펼쳐진 사막에서 도대체 어디쯤 사람 사는 곳이 있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저 태양을 방위 삼고 해골을 이정표로 삼을 뿐이었다. 사막의 열풍과 악귀들이 여러 차례 출현하면서 우리 앞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국기.

    법현은 15년 동안 애타게 갈구하던 바로 그 불경을 가지고 바닷길을 통해 귀국한다. 그리고 ‘불국기(佛國記)’를 지어 당시 자신이 지나온 국가와 지역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러한 법현의 성과를 이어받은 이가 현장이다.
    ㆍ당태종은 버선발로 현장을 맞이하고
    당태종 정관 19년(645년) 현장은 17년 만에 서역여행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장안을 출발할 때는 정식 출국허가 없이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태종이 버선발로 맞이할 정도였다. 태종의 시급한 과제는 서북 변경지역을 위협하던 돌궐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돌궐을 이간시켜 동서로 나뉘게 하고 몽골지역의 동돌궐을 제압한 뒤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공략에 치중하고 있던 차였다. 이런 때에 이 지역을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현장이 귀국하니 태종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장도 제국을 확장하려는 태종의 야심을 알고 있기에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
    당태종

    “폐하는 천자가 되실 상서로운 기운을 타고나시어 사해(四海)를 다스리고서부터 성덕(聖德)과 인(仁)은 모든 곳에 미치고, 순풍(淳風)은 남쪽의 열대에까지 불고 천자의 위엄은 파미르고원 밖에까지 떨쳤나이다.” 현장의 찬사에 태종은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부처님의 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서 지금까지도 신령한 사적(史跡)과 교의(敎義)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없소. 법사는 최근에 이 모두를 보았으니 새로운 정보를 담은 책을 쓰도록 하시오.”
    ㆍ서역국가 1급 정보 보고서를 만들다
    현장은 불경 번역을 제쳐 두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집필한다. 태종은 현장을 구법승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켜 줄 1급 정보원으로 간주하였다. 현장 또한 황제의 제국 건설에 찬사를 보내며 서역 정벌에 필요한 자료를 충실하게 정리하였으니 일차적인 목표가 불경의 획득이었다 해도 결국 황제의 눈귀와 손발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대당서역기

    이렇게 볼 때 현장의 행동은“멀리로는 여래(如來)를 따르고 가까이로는 유법(遺法)을 빛내는 승려가 되겠다.”라던 자신의 말과 배치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속 세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황제의 갈증을 채워주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렸으니 말이다. 가는 길은 달라도 이미 둘 사이에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믿음이 통하였던가. 불도를 따르는 승려 현장도 조국의 땅덩이를 넓히는데 일조하는 충실한 신민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승려가 되기 전에 현장은 유교적 소양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자라났으니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효(孝)와 덕(德)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충(忠)과 입신양명 (立身揚名)의 정신이 현장의 무의식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황제가 나라의 번영과 영토 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즉시 서역 국가들의 상세한 정보를 정리하여 바친 것이다. 현장의 본심이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행적만 따지고 보면 귀국한 뒤에 적극적인 현실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이해타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현장은 1년 반 만에 12권의 방대한 저작인 ‘대당서역기’를 완성한다.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장은 이 책을 통하여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동안 직접 보거나 들은 138개국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국토와 인문지리 등 그야말로 소소한 내용까지 상세하게 다루었다.
    자은사 입구 현장상

    현장이 ‘대당서역기’를 완성하여 태종에게 바쳤을 때 태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제국 확장을 위한 결정적 자료를 손에 쥐었으니 말이다. 책을 받아 든 태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장의 사업을 적극적이고 대대적으로 후원하라고 지시한다. 현장은 태종이 원하는 것을 줌으로써 이후 19년에 걸쳐 1,347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 번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648년 말, 현장의 불경 번역을 위한 대자은사(大慈恩寺)가 완성된다. 현장으로 인해 불교에 대한 당 황실의 미온적인 태도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바뀐 것이다.
    ㆍ자은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다
    현장은 대자은사에서 밤낮으로 불경 번역에 매진한다. 현장은 바쁜 상황에서도 황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면서 더 큰 관심과 많은 후원을 해줄 것을 바랐다. 이런 현장의 바람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 완성되어 태종에게 아뢰는 대목에 잘 나타난다. “저 현장은 홍복사에 존상(尊像)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 폐하께서 친히 가마에서 내리셔서 그 푸른 연꽃과 같은 눈을 개안(開眼)하셨던 것을 보았나이다. 지금 번역된 경론은 이 위대한 왕조의 새로운 글이옵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전에 홍복사에서 하셨던 인연처럼 폐하께서 높으신 글씨로 서문을 써 주시옵소서.” 이런 현장의 요청에 태종은 흔쾌히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썼으리라. 현장은 또한 고종에게도 “폐하의 글씨가 아니면 해와 달처럼 빛나는 이 글을 나타낼 수 없나이다.”라는 표문을 올렸다. 부친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고종도 글을 내려 주었으니 이것이 곧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이다. 경전 번역본의 발간을 앞두고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추천사를 받고자 애쓰는 삼장법사 현장의 모습이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진다.
    자은사 대안탑1

    자은사는 당 고조 때 폐허가 된 수나라 무루사(無漏寺)의 옛터에 고종이 자기 어머니 문덕(文德)황후를 위해 648년에 세운 절이다. 현장은 이곳에서 11년 동안 경전 번역에 힘쓴다. 이 절은 누각식으로 지은 대안탑(大雁塔)으로 유명한데 현장이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 등을 보관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건설한 것이다. 대안탑은 처음에는 5층으로 지어졌으나 현장이 죽은 뒤 701년부터 704년 사이에 개조되어 10층으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전란과 지진 등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7층탑이 되었다.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이 많은데 대부분은 탑에 올라갈 수가 있다. 나선형의 계단을 돌아 64미터 높이의 정상에 오르니 서안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은사 대안탑2

    북두칠성은 북쪽 문에 있고七星在北戶 은하수는 소리 내며 서쪽으로 흐른다.河漢聲西流 희화는 밝은 해를 채찍질하고羲和鞭白日 소호는 맑은 가을을 운행한다.少昊行淸秋 진산은 갑자기 조각조각 부서지고秦山忽破碎 경수와 위수는 찾을 수가 없구나.涇渭不可求 굽어보니 단지 하나의 기운,俯視但一氣 어찌 천자의 도읍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焉能辯皇州
    탑 내부의 남쪽 감실(龕室)에는 당 태종이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書)’와 당 고종이 쓴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書記)’가 기록된 석비가 있다. 대안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당대의 화가인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보현상(普賢像)이 그것이다. 오도자는 가난했지만 천재적인 그림솜씨로 ‘오대당풍((吳帶當風)’이라는 독특한 화법을 창시하여 화성(畵聖)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화법은 운필이 빠르면서도 대담한 기세와 포용력을 함께 갖춘 점이 특징인데 특히 인물화에 있어서 의대(衣帶)가 바람에 나부껴 올라가도록 표현함으로써 선 자체가 살아 숨 쉬면서 화면에 생동감과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독특한 화법이다. 이는 소그디아나 출신의 서역화가인 조중달(曹仲達)이 옷매무새가 마치 물속에서 방금 나와서 몸의 선이 보이는 듯하게 그리던 ‘조의출수(曹衣出水)’에서 탈피한 것이다.
    현장의 서전취경을 묘사한 부급도

    ㆍ중국인의 뛰어난 상술(商術)
    오도자의 보현상이 판각된 벽화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게 철조망으로 가려 놓았다. 결국 오도자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탁본을 구입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탁본도 제대로 된 것이면 값어치가 있다. “보현상 탁본한 것이 있나요?” “물론 있지요. 근데 귀한 것이라서 비싸요. 살건가요?” “물건을 봐야 결정하지요.” “1,800위안입니다. 깎을 수 없습니다.” 서랍의 깊은 곳에서 꺼내더니, 보여주지도 않고 가격부터 부른다. “진품인지 먼저 확인을 해야지요.” “보나마나 물건 하난 확실합니다.” 언뜻 접혀진 뒷면을 보니 탁본 흔적이 없다. “보여줄 필요 없어요. 안삽니다.”
    오도자의 보현상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던가. 주인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화선지의 뒷면을 가리키며 탁본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싸게 준다며 다짜고짜 손목을 잡는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상인은 소그드인이지만 중국 상인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에 거대한 화상(華商)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업전략이 축적된 결과이니 이제 다시 소그드 상인과 거래하면 누가 손해를 볼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큰 이문(利文)을 남길 것이리라.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