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4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에 치솟아 오른 붉은 글씨

浮萍草 2013. 12. 23. 06:00
    唐代의 거대한 국제시장 西市에서 느낀 두통…
    1300년 전, 실크로드 장안의 서시에 서다 (서안4-당제국의 수도 장안과 서시)
    “도대체 교통신호는 왜 안 바뀌는 거야. 정말 엉터리 신호등이야.” 서안 시내의 남북을 가르는 주작대로를 지난다. 극심한 정체는 풀릴 줄 모른다. 운전기사마저 짜증을 낸다. 차에서 내려 걷고 싶지만 내가 보려는 ‘서시(西市)유적지’는 너무 멀다. 서안을 여행하려면 인내심과 함께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특히, 공항으로 향할 때는 출퇴근 시간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를 즈음, 노동남로에 도착한다. 당나라 때의 서시 현장에 온 것이다. 실크로드의 핵심은 시장(市場)이다. 당대의 시장은 동시(東市)와 서시가 대표적인데 동시가 주로 관료와 귀족들을 위한 시장이라면 서시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대중적인 시장이다. 특히, 외국인들은 모두 이곳 서시에서 거래를 하였으니 서시야말로 국제시장인 것이다. 서시에는 대략 4만여 개의 상점이 있었고 중국이 자랑하는 비단과 도자기 등이 하서주랑을 통하여 서역으로 나갔다. 서역에서는 유리와 보석, 향신료 등이 서시로 들어왔다.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당(唐) 장안성은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다. 제일 혁신적인 것은 궁전과 백성의 주거공간을 엄격히 구분한 것이다. 한나라 시기까지의 도성은 모두 궁전과 백성들의 주거공간이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대의 장안성은 제왕과 관료들의 공간과 서민들의 공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공공기능을 제고하고 유사시에 방어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ㆍ세계 최대의 도성 장안성
    이러한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길이다. 장안성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정방형 도성으로 동서 9,721m 남북 8,651m의 규모에 면적이 84㎢에 달한다. 이는 한(漢) 장안성의 2.4배에 이르고 현재 서안에 남아있는 명대(明代) 성곽의 10배 크기다.
    대당서시광장의 낙타와 서역 악단
    당 장안성은 주작대가를 기준으로 동서에 53방(坊)과 55방 총 108방을 두었다. 방은 정방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성벽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울타리를 쌓고 8개의 문을 만들어 통행하게 하였는데 방과 방 사이의 이동은 통제를 받았다. 북쪽에 위치한 황실궁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벽들이 미로처럼 방을 둘러싸고 있는 장안성은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울타리에 갇힌 짐승 꼴이었으니, 계획도시 장안성은 다름 아닌 황제와 권력자들이 백성의 생활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감옥과도 같은 도시였다. 당 고종(高宗)이 대명궁(大明宮)의 함원전(含元殿)에 올라 성안을 내려다보며“우리(檻)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한 것은 이를 잘 표현한 것이다. 황실과 주거공간의 구분 또한 유사시 효율적인 방어를 위한 것이라지만 이 또한 백성을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명궁 함원전터
    서시는 당시 최대의 국제무역 장소였다. 소그디아나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서역에서 온 상인들의 카라반 행렬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최대의 시장이었다. 중국 내의 물건은 물론 이국의 흥미로운 물건들로 넘쳐나는 상점 상인들과 이곳을 찾은 수많은 이들이 숙박하는 여관과 식당 술집 등도 즐비하였다. 서시가 세워진 것은 수(隋)나라 문제(文帝) 때인 582년이다. 처음 개설 당시에는 이인시(利人市)라 불렀고 나중에는 금시(金市)라고도 하였다. 서시는 2개의 방을 차지할 정도로 컸는데 그 면적이 1,000㎡가 넘었다. 서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외에도 유흥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는 바로 이국적인 고혹함을 갖춘 서역의 무희들을 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관대작의 젊은이들은 밤만 되면 달려왔다. 오릉의 젊은이들 금시의 동쪽으로 나가는데五陵年少金市東 은 안장에 흰 말 타고 봄바람을 헤치고 가네. 銀鞍白馬度春風. 지는 꽃 다 밟으며 어디 가서 노나 했더니만 落花踏盡遊何處
    미소로 유혹하는 호희의 술집으로 들어가네. 笑人胡姬酒肆中. -이백,〈소년행(少年行)
    곱슬머리 푸른 눈의 호희 鬈髮胡兒眼晴綠 조용한 밤 술집에서 피리부나니 高樓夜靜吹橫竹 그 소리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데 一聲似向天上來 달빛 아래 고운 그녀 고향 그리며 울고 있네 月下美人望鄕哭 -이하, <용야음(龍夜吟)>
    대당서시박물관 모습.

    서역인들의 문화와 습속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모자를 포함한 복식은 물론 빵, 술 등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호풍(胡風)은 현종 때가 절정기였다. 한족 여인과 결혼도 잦아져 바야흐로 호한문화(胡漢文化)의 융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니'호인은 한인의 모자를 쓰고 한인은 호인의 모자를 쓴다'는 말처럼 장안성 안 에서는 일상이 된다. 당나라가 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한 원동력도 다름 아닌 호한문화의 융합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미 당대에 글로벌 마인드가 정착된 것이다.
    ㆍ서시의 盛衰
    서시는 300년간 동서무역의 번성을 이끌어오다가 904년경에 쇠퇴한다. 그로부터 1,100여 년이 지난 2006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는 당나라 때의 서시 터를 발굴하고 그 위에 ‘대당서시박물관’을 지었다.
    대당서시박물관에 있는 서역 비단.
    광장을 들어서니 제일 먼저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이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와 함께 날개를 펼친 듯 좌우 대칭의 하늘다리로 연결한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광장 좌우로는 실크로드 교역을 상징하는 동물인 낙타상이 있다. 낙타를 타고 온 서역 상인들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춤추는 무희와 악단을 실은 낙타상도 있다. 상업과 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 일대는 서안시 정부가 황성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30만평의 면적에 서시광장과 박물관 실크로드 풍경거리 전통호텔 등을 만들어 서시의 역사적 복원과 실크로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장을 지나 박물관으로 향한다. 대당서시박물관은 서시의 유적 중 배수로라든가 십자교차로 터를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시물도 다양하다. 당대인과 서역인의 다양한 모습을 빚은 당삼채(唐三彩)가 눈에 띠는데 특히 서역상인들의 모습을 빚은 토용(土俑)이 인상적이다. 서시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물은 동서양 교류의 상징인 동전과 비단이다.
    ㆍ웅장한 광장
    당 현종시기에 만든 ‘개원통보(開元通寶)’라 쓰인 금화와 지금의 이란지역인 파샤의 금화와 은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이를 보니 1300여 년 전의 실크로드 도시 장안에 있는 듯하다. 또한 서역의 비단을 볼 때에는 부리부리한 눈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서역인과 술잔을 부딪치며 실크로드 이야기로 맘껏 취한 듯하다. 관람객이 없어 여유롭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광장으로 나오는데, 인적 뜸한 광장의 웅장함이 미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당서시박물관에 있는 당대 파샤(이란)의 금화.
    이제 대당서시광장은 서역인들이 오가고 상품이 대량으로 판매되는 그런 장소는 아니다. 관광지로서 그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때의 웅장한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형식을 중시하는 우리네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치적을 보여주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는가. ‘현실적인’ 중국인이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곳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중국인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광장의 웅장함이 지금은 왠지 형식적이고 속 빈 강정처럼 보이지만 저들은 이러한 허세를 문화적 자긍심이라는 골재로 보강해 과거보다 더 튼실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라는 긴장감마저 든다. 개혁개방에 따른 경제발전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실크로드 전성기의 재현을 위한 중국인들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색하고 부끄러울지라도 그럴수록 더 노력하여 목적달성을 앞당기자는 생각이 강렬한 것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제국 운영의 경험을 적극 활용하여 나라의 비전과 방향을 수립 한다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3억이 넘는 국민을 단결시켜 비전 달성을 향해 전진한다면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람 없는 대당서시광장에 홀로 서서 이런 생각에 이르자 왠지 모를 서늘함이 온몸을 감싼다.
    ㆍ뜨거워지는 광장
    스산하던 광장이 뜨겁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광장과 건물에 가득하다. 상점골목마다 호객행위 사이로 돈을 세며 미소 짓는 중국인들이 보인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고량주를 마시며 중국의 서커스 공연에 혼이 빠져 모두 기립박수를 치며 열광하고 있다. ‘대당서시광장’이라고 쓰인 글씨는 간 곳 없고 그 자리에 ‘중화중심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순간, 나는 두통 끼를 느끼며 광장을 빠져나온다. 그럼에도 두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대당서시광장 뒤편에 웅크리고 잠자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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