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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무제의 인기를 능가한 청년 장수 곽거병

浮萍草 2013. 12. 22. 06:00
    '사방은 경계가 없고, 백성은 다른 나라가 없다'
    상사는 알 수가 없다. 어제의 천덕꾸러기가 오늘 권좌에 오르고, 오늘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자가 내일은 비렁뱅이가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한 만큼의 결과이지만 대부분은 운명이라 치부한다. 그것이 당사자나 제삼자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기 때문일까. 가희(歌姬)인 위자부가 무제의 황후가 되자 그녀의 친척들도 속속 무제의 신임을 받는다. 동생인 위청(衛靑)과 아들들은 물론 조카인 곽거병(霍去病)까지도 포함된다. 특히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의 무용(武勇)이 맘에 쏙 들었는데 이들은 후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움으로서 무제의 사람 보는 안목이 적중했음을 입증해준다.
    ㆍ한나라와 흉노의 숙명 같은 전쟁
    무릉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청과 곽거병의 묘가 있다. 무제가 신임한 최고의 장수인 두 사람의 묘는 무릉의 배장묘(陪葬墓) 역할을 하고 있는데 곽거병묘가 오히려 무릉보다 정비와 보존이 잘되어 있다. ‘현대의 루쉰’으로 불리는 중국의 문화사학자 여추우(余秋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은 황제보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를 물리친 장군을 더욱 흠모하는 것 같다. 한나라의 흉노와의 전쟁은 고조 유방 때부터 치욕으로 일관됐다. 이때 흉노의 군주는 최전성기를 이끈 묵돌선우(冒頓單于)다. 그의 유인책에 걸린 고조의 군대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포위된다. 이 포위는 눈 내리는 한 겨울 일주일간이나 지속되었는데 고조는 선우의 부인에게 갖은 보화를 뇌물로 바치고 포위가 느슨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를 일러 ‘평성의 치욕’이라 한다.
    ㆍ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희롱 편지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편지와 여태후의 답신 기록

    고조 유방이 죽고 여태후(呂太后)가 정사를 돌보자 묵돌선우는 치욕스러운 편지를 보낸다. “ 한족의 황후여, 내가 사는 곳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해서 내 한 번 그대 나라로 놀러가고 싶습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그대도 과부이시니 아주 외롭다지요? 둘 다 불쌍한 처지인데 서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력이 쇠하여 이도, 머리카락도 모두 빠지고 걸음걷기도 힘든 늙은이일 뿐입니다. 선우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신분을 낮추시면서까지 저를 찾아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나라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선우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가 두 대와 준마 두 필을 바치오니 평소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기 바라옵니다.” 흉노에 대한 회유책은 제4대 황제인 경제(敬帝) 때까지 계속된다. 명주옷 비단외투 허리금속장식 갖가지 옷감 및 곡물 등을 매년 흉노에게 바쳤다. 황족의 딸도 흉노에게 시집보냈다.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무제는 오랫동안 계속된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제가 재위에 오른 지 7년(B.C135년). 두태후가 사망하자 스물두 살 젊은 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된다. 중앙집권을 강화한 무제는 그로 인해 든든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첫 번째 흉노공략은 실패한다. 지금의 산서성 대동 부근의 마읍(馬邑)으로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할 참이었는데 이를 간파한 흉노가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평성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공략이 ‘마읍의 수치’를 보탠 꼴이 되었다.
    ㆍ흉노설욕의 명장 곽거병
    본격적인 흉노설욕전은 그로부터 5년 후인 원광 6년(B.C.129)에 이뤄진다. 이 전투에서 일등공신은 위황후의 동생 위청이다. 그는 한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으로 진격하여 승전보를 올린 최초의 주인공이다. 위청은 10여 년간(B.C129-119) 모두 7번을 출병하여 흉노를 무찔렀는데 5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무제는 위청의 혁혁한 전과를 치하하여 그때마다 식읍을 내렸고 세 명의 어린 자식을 제후에 봉했다.
    무릉박물관 안의 곽거병묘

    위청의 무용이 식어갈 무렵 곽거병이라는 또 한 명의 용장(勇壯)이 나타난다. 곽거병은 위황후의 조카였으니 위청은 숙부가 된다. 위청의 성격이 진실되고 중후했다면 곽거병은 과묵하면서 재기가 넘치고 민첩했다. 곽거병은 숙부인 대장군 위청을 따라 두 차례 종군했는데 위험한 적진을 마다않고 뛰어들어 공을 세웠다. 그의 용맹은 천하를 진동시켜 나이 18세에 벌써 제후로 봉해질 정도였다. “용감한 것도 좋지만 병법도 공부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새삼스레 낡은 병법을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했노라.”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을 꾸미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ㆍ곽거병을 너무도 사랑한 무제
    무제는 곽거병을 아주 사랑했다. 글도 모르고 우직하기만한 위청보다 재기발랄한 곽거병이 무제의 마음에 들었다.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은 또다시 성공을 거둔다. 표기장군(票騎將軍)에 오른 스무 살의 곽거병은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흉노의 거점인 기련산(祁連山)까지 진격하여 흉노군을 격파하자 패전의 문책이 두려웠던 혼야왕 (渾邪王)은 수 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투항한다. 36세의 황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곽거병에게 대장군 위청과 동등하게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한다. 대장군 위청의 시대가 가고 표기장군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거병의 흉노정벌로 감숙성의 하서지역은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흉노는 막북(漠北) 즉 고비사막 이북으로 달아나 더 이상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흉노는 천지가 뒤집히고 억장이 끊어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한나라가 언제까지나 발아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나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중요한 요충지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흉노는 노래로서 슬픈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우리 이제 기련산을 빼앗겨 가축들을 먹일 곳이 없네. 우리 이제 언지산을 잃어버려 여인들은 화장도 할 수가 없네. 흉노정벌이 완성되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감숙성을 얻게 되자 최고 공로자인 곽거병이 24살로 요절한다. 곽거병의 죽음은 서역정벌을 구상한 무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제는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철갑군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자신의 능으로 조성하던 무릉(武陵)까지 행렬하도록 했다. 이처럼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었을 정도였다. 무제는 곽거병에게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무용을 드높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이다. 분묘도 그가 흉노와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기련산의 모양을 본뜨게 했다.
    무릉박물관 입구.
    ㆍ곽거병묘 정상에 올라야 위청의 묘가 보이고
    무릉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기련산 모양을 한 곽거병 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통로 좌우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4100여 점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곽거병 묘 앞에는 거대한 동물 석상들이 많은데 이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을 조각한 ‘마답흉노 (馬踏匈奴)’상이다. 흉노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공적을 알리려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진시황 이후 한고조 유방의 치욕을 설욕 하고자했던 무제가 흉노에 대한 원한을 두고두고 갚아주려고 표현한 것이기도 하리라. 무제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땅에는 사방의 경계가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 중국적 논리가 숨어 있다. 즉 중원 땅은 물론 오랑캐의 영토까지도 황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총명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까닭도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과 신하의 지극한 충성만이 용납되는 통치방식이 유교의 기본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곽거병묘(오른쪽)와 위청묘.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왼쪽에 있는데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곽거병의 묘 정상에 올라야만 보인다. 이곳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곽거병을 더 사랑한 무제의 마음을 알려주려고 관람객의 동선(動線)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하지만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정상에서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무릉박물관을 나와 옆길로 들어서야만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대장군 위청은 항상 진중한 자세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곽거병이 쉽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숙부인 위청의 용맹이 흉노에게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함부로 하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묘가 조카의 묘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의 크고 작음이 무슨 대단한 일이던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장군 위청의 진중하고 과묵한 얼굴이 햇살에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한 가닥이 청량한 바람을 타고 곽거병묘 너머로 흘러간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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