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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옥도시 '장안', 선남선녀들의 해방구 '곡강지

浮萍草 2013. 12. 24. 06:00
    황제 당현종(唐玄宗)과 곡강(曲江)문화 <서안 5>
    안(西安)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특히 당나라 때의 유적인 자은사(慈恩寺) 화청지(華淸池) 흥경궁공원(興慶宮公園) 등은 서안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둘러보는 명소다. 그러나 정작 당대 문화의 꽃이던 곡강지(曲江池)는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호수가 있는 공원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곡강지는 대당제국의 최전성기인 현종 시기의 문화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곡강지 유적은 시내의 동남쪽 자은사에서 약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 곡강은 물이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황실의 원림(園林)인 부용원(芙蓉園)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곡강지로 구별된다. 곡강은 진한(秦漢)시대에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이궁(離宮)이나 황실의 원림으로 사용되었다.
    곡강지 입구
    진나라 때에는 의춘궁(宜春宮)을 지었고 한나라 때는 낙유원(樂遊原)을 만들었다. 장안에서 가장 높고 사방이 평탄한 곳이다. 수나라 때에는 지대가 높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하고 성 밖의 물을 끌어들여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원을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곡강지가 태동한 것은 수나라 때이지만 번성은 당나라 현종 때이다. 현종은 개원(開原) 연간(713~741)에 땅을 뚫어 막힌 물을 통하게 하고 자운루(紫雲樓)를 지어 명승지를 만들었다. 곡강지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장안성 안에서 가장 자유로움이 넘치는 낭만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곡강지에서 최고의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과거급제자들과의 곡강연회(曲江宴會)다.
    곡강지 풍경.
    오늘의 곡강지는 어떻게 변했을까. 먼저 부용원을 찾았다. 지금의 부용원은 곡강지와 함께 서안시가 관광지와 시민들의 휴식처로 개발하여 모두에게 개방하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웅장한 누각에 큼지막하게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이라고 쓴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니 탁 트인 공간에 넓은 호수가 자리 잡고 각종 누각과 아치형 다리가 연꽃과 버드나무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공폭포가 요란하게 포말을 만들어 주변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넓은 공간임에도 사람들이 분주하다. 외국인들도 상당수가 눈에 띤다. 부용원은 황실의 원림답게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답다. 호수에 비치는 누각, 연꽃과 버들가지의 손짓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조각배 등 그야말로 격조 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대당부용원-운무를 내뿜는 인공폭포

    당 제국이 번영한 원동력은 경제력뿐 아니라 적절한 인재 등용이었다. 태종 때부터 시행된 인재등용은 현종 시기에도 이어진다. 과거시험은 해마다 봄이면 시행되는데 전국의 수험생들은 가을부터 장안으로 모여든다. 시험시간은 하루 종일이며, 저녁때가 되어서도 답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3개의 초를 켜서 제한시간을 알린다. “3개의 초가 타면 수험생의 마음도 다 타버린다.”라는 말은 당시 과거응시생의 심정을 나타내는 실감나는 유행어다.
    ㆍ과거급제자들의 축제, 곡강연회(曲江宴會)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급제(及第)라 한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진사과를 중시했는데 이 때문에 진사과는 과거시험의 대명사가 된다. 진사과 응시자는 많을 때는 2,000명까지 몰렸고 적을 때에도 1,000명이 넘었지만 급제한 사람은 고작 30-40명에 불과하였다. 10명 미만일 경우도 있었으니 급제는 곧 최고의 영예인 셈이다. 급제한 진사는 ‘백의경상(白衣卿相)’이라 불렀는데 흰색 삼베 두루마기를 입고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급제한 진사들은 자색의 관복을 입고 이부(吏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인 석갈시(釋褐試)에 합격해야 비로소 관직을 받을 수 있다. 이때 1등한 사람을 장원(壯元)이라 한다. 진사들은 서로를 동년(同年)이라 부른다. 과거시험관은 지공거(知貢擧)라고 하는데 급제자들은 이들을 좌주(座主)라고 부르, 좌주는 급제자를 문생(門生)이라고 불렀다. 좌주와 문생은 부자관계처럼 평생 동안 지속되는데 학벌의 형성과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진사 급제는 개인의 영광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다. 조상의 덕을 빛내고 가문을 일으키며 ‘의관호(衣冠戶)’라 하여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 경제적 혜택까지도 누리기 때문이다. 곡강은 경치가 제일 빼어난 곳 曲江元勝地 봄 날씨마저 쾌청하구나. 春日更淸眞 진사들 몰려와 제명회를 여니 來作題名會 황제 은혜에 보답할 자들이로세. 俱爲報主身
    급제한 진사들을 위한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강연회다. 이는 급제한 진사들이 좌주와 문생의 예를 갖춘 뒤 여러 가지 연회를 베푸는 것이다. 황제가 직접 자운루에 와서 참관할 때도 있었고 공경(公卿)들은 사윗감을 고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또한, 그해 합격한 진사는 자은사 대안탑에서 잔치를 베풀고 탑에 이름을 썼는데 이를 ‘제명회(題名會)’라 한다.
    대당부용원.자은사 대안탑이 보인다.

    ㆍ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곳으로
    부용원을 나와서 조금 떨어진 곡강지로 향한다. ‘곡강지유지공원(曲江池遗址公园)’이란 푯말을 지나니 커다란 바위에 안진경(顔眞卿) 글씨체로‘곡강지’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곡강지는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숲이 어우러져 있는데 여느 공원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곡강지는 남녀노소 사람들로 넘쳐난다. 곡강지는 상류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일반 서민들도 누구나 찾아와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황제인 현종도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현종도 집권 초기에는 검약하였다. “덕은 옛 사람을 따를 수 없지만 검약함은 옛 철인도 부럽지 않노라.”며 사치와 낭비를 없앴다. 그가 이렇게 선언한 것은 정쟁의 대상이었던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개원 18년(730년) 정치적 입지가 안정되고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치자 현종은 더 많은 욕심이 생긴다.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자신 또한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를 위하여 현종은 곡강을 명승지로 개발하여 관료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자신의 치적을 알리기로 작정한다. 황제는 이를 위하여 과거에 합격한 진사들을 모아 곡강연회를 개최함으로서 태평성대를 이룬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줌과 동시에 신진관료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부여해 충성스런 군신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여기에는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린 자신의 모습을 천하에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다.
    자운루의 모습.

    이러한 의도가 내재된 연회이기에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하여 전혀 걱정될 것이 없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로움은 모든 백성들에게 사치와 향락을 즐기게 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행락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곡강지는 차츰 향락과 사치문화의 대명사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국가에서 치르는 공식 연회와 상관없이 음력 이월초하룻날의 중화절(中和節) 음력 삼월삼짇날의 상사절(上巳節) 음력 구월구일날의 중양절(重陽節)에는 너나없이 곡강지를 찾았다.
    ㆍ곡강지는 감옥도시 장안의 해방구
    당시 백성들은 왜 이토록 곡강지를 사랑했을까? 장안성은 수나라 때부터 당나라 초기까지 해질 무렵부터 통행이 금지되었다. 성 안에 만들어진 108개의 방은 각각 3m 높이의 방벽(坊壁)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백성들은 그 안에서 북소리와 종소리에 따라 일상생활을 하였다. 백성들은 바둑판처럼 잘 짜인 감시의 틀 속에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만약 이러한 규칙을 거부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세계적인 도시 장안도 따지고 보면 황제의 의도 아래 만들어진 감옥 같은 도시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곡강지는 장안 백성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특히, 선남선녀들에게 있어서 곡강지는 필수적인 해방구였다. 날씨도 상쾌한 삼월 삼짇날 三月三日天氣新 곡강지 물가에 미인들이 모였네 長安水邊多麗人 농염한 자태 뽐내며 정숙하고 순진한 것이 態濃意遠淑且眞 보드라운 살결에 균형 잡힌 몸매로다 肌理細膩骨肉勻
    봄과 꽃, 시와 음주가무, 선남선녀의 사랑 등이 어우러진 곡강지. 하지만 이 또한 황제가 만들어낸 축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곡강지는 과거급제자 청춘남녀 관료나 귀족 기생 상인 일반백성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진 개방형 문화 향유의 장소였다. 이처럼 복합적인 성격을 띤 곡강지는 당대의 장안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곡강 문화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크게 위축된다. 곡강지를 에워쌌던 수많은 정자는 불타고 남은 정자들도 각종 건축물의 재목으로 조달된다. 훼손된 곡강지를 본 두보(杜甫)는〈애강두(哀江頭)〉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읊었다. 소릉 밖 늙은이 소리 없이 흐느끼며 少陵野老吞聲哭 봄날 남몰래 곡강가로 나아가니 春日潛行曲江曲 강어귀 궁전은 모든 문이 닫혔는데 江頭宮殿鎖千門 버들가지 새로운 창포는 누굴 위해 푸르른가 細柳新蒲爲誰綠
    ㆍ곡강문화의 부활을 위하여
    두보는 부용원터를 거닐며 보았다. 얼마 전까지 환락의 축제로 들썩이던 자리가 이제는 폐허로 변한 것을. 쓸쓸한 바람에 휘날리는 버들만 있는 것에 진정 가슴이 아팠다.
    대당부용원-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다.

    엄동설한에 다시 부용원과 곡강지를 찾았다. 온통 뿌연 하늘은 진눈깨비를 흩뿌리고 있다. 오늘 곡강지와 부용원을 찾은 나는 두보와는 또 다른 감회에 쌓인다. 이제 도시의 풍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명물로 재탄생함과 동시에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명소로 탈바꿈하였으니 역사를 재현하고 나아가 경제발전에도 이바지하는 일석삼조 의 곡강지가 된 것이다. 송나라 이후 폐허가 되었던 곡강지가 오늘날 이처럼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니, 이 모두가 그 옛날의 화려한 곡강문화를 되찾고 싶은 중국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겨울임에도 부용원 입구에는 외국인들이 어수선하다. 그 입구 너머로 힘차게 운무를 내품던 인공폭포가 봄이 오기만을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다. 힘차게 피어오르는 운무에 황룡을 태우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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