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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3000궁녀도 모자라 아들의 여자까지 빼앗은 당현종

浮萍草 2014. 1. 11. 06:00
    현종, 경국지색 '양귀비'를 품다 <서안 8>
    구름 같은 머릿결, 꽃 같은 얼굴에 금보요 팔랑 雲髮花顔金步搖 부용 휘장 하늘대는 침실, 황홀한 봄 지새우노라니 芙蓉帳暖度春宵 봄밤은 짧디 짧아 한 낮에야 눈을 뜨고 春宵苦短日高起 이로부터 임금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네. 從此君王不早朝 든 왕은 호색가다. 여인들의 숲에 있으니 그렇다. 현종은 특히 더하였다. 삼천의 궁녀로도 성이 안차 아들의 여자를 빼앗았다. 그녀가 바로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치열하여 피를 부른다. 현종은 여자를 차지하는 것에서도 아들과 다퉜다. 현종은 양귀비를 품고 살았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다. 정치도 싫고, 인사도 싫었다. 알아서 다 해주길 바랐다. 현종은 오직 황제의 침실에서 양귀비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태평성대였다. 도대체 양귀비가 어떤 여인이기에 현종은 이처럼 헤어나질 못한 것인가.
    목욕하고 나온 양비비를 그린 '화청출욕도'

    양귀비는 현종 개원 6년(718년)경에 태어났다.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태어날 때 왼팔에 옥고리 문양이 있고 고리에는 ‘태진’이라는 글씨가 있어서 ‘옥환’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출생부터 심하게 미화(美化)되어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한 술 더 뜬다. “귀비는 어머니 태내에 13개월 동안 있었는데 태어날 때에는 방에 향기가 감돌았고 탯줄은 연꽃과 같았다. 3일 동안 눈을 뜨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신인(神人)이 손으로 아이의 눈을 쓰다듬는 꿈을 꾸고 나서야 눈을 떴다. 피부는 옥과 같고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용모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

    천하일색이니 탄생부터 신비롭지 않으면 어찌 황제가 관심을 갖겠는가. 따지고 보면 양귀비의 집안이나 태생에 대하여 밝힐 만한 것이 없으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에 가까운 양귀비는 어떤 여인인가? ‘구당서’ ‘양귀비 열전’에 보면 그녀의 부친은 지금의 사천성인 촉주(蜀州)의 사호참군(司戶參軍)을 지낸 양현염(楊玄琰)이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숙부인 양현요(楊玄邀)가 길렀다고 한다. 현종 때의 일을 정리한 책인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도 양현염이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로 정할 때 내려진 비문인 ‘책수왕양비문(冊壽王楊妃文)’에는 하남부 사조참군(河南府 士曹參軍) 양현요의 장녀로 되어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2

    ㆍ“양귀비의 족보를 고쳐라”
    둘 다 역사적 사료인데 왜 다른 것일까? 어떤 자료가 보다 사실에 가까울까? 비문이 1차적 사료이니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황제가 내린 것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황제의 비문과는 달리 역사서에서는 모두 양현염을 부친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수왕의 비가 될 때의 양귀비는 숙부에게서 양녀로 키워졌으니 양현요의 장녀로 표기하였는데 현종이 빼어난 미모에 반해 아들로부터 빼앗으려니 세간의 이목이 걸렸던 것 이다. 그래서 원래의 친아버지인 양현염을 내세우고 양부(養父)는 없앤 것이다. 현종이 아들로부터 양귀비를 빼앗을 때도 잠시 도교의 여도사가 되게 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필요하다면 족보나 가계를 위조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에 며느리를 빼앗고자 혈안이 된 황제의 명령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화청지의 양귀비상

    오늘날의 미인은 가는 허리에 늘씬한 풍모를 지닌 여성이지만 당나라 때의 미인상은 풍만한 육체에 이국적인 풍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양귀비가 바로 이러한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가무와 음률에도 뛰어난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음악과 문학 등 예술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현종이 이러한 양귀비에 어찌 매료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종도 염치는 있었던가. 도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현종은 양귀비를 도사로 삼는 방책을 만들어 세간의 관심이 멀어지기를 기다린다. 황녀(皇女)들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일은 있었지만 황자의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여도사가 되는 것은 있을 수도 허용되지도 않는 일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5년간 도사생활을 지내게 한 뒤 궁궐로 데려온다.
    ㆍ화청지, 현종과 양귀비의 파라다이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도덕한 사랑놀이는 화청궁(華淸宮)에서 이뤄진다. 장안 동쪽 여산(驪山)에 있는 화청궁은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지역인데 특히 수도인 장안과 가까워 황제의 요양지로 애용된 곳이다.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면서부터 신년 조회도 화청궁에서 할 정도가 되었으니 정무를 보는 관청뿐 아니라 귀족의 저택이 화청궁에 즐비하게 들어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온천탕은 또 얼마나 요란했을까. 양귀비가 목욕하던 부용탕(芙蓉湯) 현종의 욕실이 있던 구룡전(九龍殿)은 물론이고 옥녀탕(玉女湯) 소양탕(少陽湯) 연화탕(蓮花湯) 의춘탕(宜春湯) 태자탕(太子湯)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옥으로 장식된 화청궁은 그야말로 환락의 궁전이었다.
    화청지 전경

    화청지는 서안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여산의 산기슭에 위치한 곳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미인들이 있는 연회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현종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풍만한 몸매를 특별히 부각시켜 놓았다. 연둣빛을 내뿜는 연못은 늘어진 버들가지와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있다. 연못 안에는 막 온천을 마치고 나오는 순백의 양귀비상이 요염한 자태를 하고 있다. 호수를 돌아가면 석류나무 한 그루가 고목인 채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모두들 이 나무 앞에서 무언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불로목(不老木)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양귀비가 얼굴을 기댄 나무라하여 오늘도 미인이 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반질반질한 나무둥치에 얼굴을 비비려고 서있는 것 이다. 뜬금없는 소문이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양귀비가 목욕을 즐긴 부용탕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자 그녀의 집안사람들도 덩달아 득세한다. 그중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양씨 집안을 대표한다. 젊은 시절 주색잡기에 빠져 천대 받으며 살던 그는 장부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던 그가 양귀비의 후광으로 재상까지 오르더니 40여 가지의 직무를 겸직한다. 현종을 주무르는 양귀비 덕에 날아가던 새도 내려않지 않으면 안 될 권세를 누린 것이다. 세상이 시끌벅적해도 현종은 양귀비만 있으면 평안하였다. 세상이 태평하다고 여겼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현종의 일상은 양귀비가 웃고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다름 아니다. 양귀비가 장안에서 수천 리 떨어진 남방에서만 나는 과일인 여지(荔枝)가 먹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여지전용도로를 개통한다. 여지는 3-4일이 지나면 맛과 색이 변하는 과일이다. 신선한 여지를 장안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역참을 설치하였는데 여지를 나르는 파발마가 지나가면 누구든 뽀얀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으리라.
    ㆍ“고력사 이놈! 냉큼 와서 내 신발을 벗겨라”
    장안이 온통 모란축제로 들썩이는 봄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에서 주연을 열다가 궁정시인인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한다. 술 취한 이백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쌓인 현종이 미웠던 것일까. 현종의 최측근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다. 당시 신발을 벗기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고력사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신발을 벗기자 이백은 일필휘지로〈청평조사淸平調詞〉를 짓는다. 요염한 꽃가지에 향기 머금은 이슬一枝濃艶露凝香 무산의 사랑도 부질없이 애만 끊나니雲雨巫山枉斷腸 묻노라, 누가 한나라 황후와 비교하는가借問漢宮誰得似 가련한 비연은 화장으로 다듬은 미인인 것을可憐飛燕倚新粧 아름다운 꽃과 양귀비가 서로 반기니名花傾國兩相歡 임금은 언제까지나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데常得君王帶笑看 봄바람의 끝없는 시샘을 녹이려는 듯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 있네沈香亭北倚闌于
    흥경궁 공원의 침향정과 이백상

    흥경궁공원은 서안시내의 동쪽, 서안교통대학 앞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만 현종시기에는 그야말로 현종과 양귀비만을 위한 궁전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인공호수를 지나 침향정에 이른다. 침향정은 모란을 좋아한 양귀비가 모란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지금도 주변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다. 정자 앞에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이백이 머리를 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이백취와상’이 있다. 현종과 양귀비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하게 취한 모습을 보였을까. 이백의 호탕한 성격에 미루어볼 때 충분히 그랬으리라.
    ㆍ양귀비의 양자 안록산, 반란을 일으키다
    화청궁과 흥경궁을 오가던 현종은 점점 정사를 멀리한다. 그러자 재상 이임보와 양국충 고력사 등이 서로 이익을 다투며 정사를 주무른다. 그리하여 모든 이권과 자리는 그들의 사람으로 채워진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번장(番將) 안록산도 상황판단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우둔한 척하며 감언이설로 교활함을 감추고 당나라 전체 병력의 1/3을 휘하에 거느리는 최고의 절도사로 성장한다. 안록산이 권력을 장악할수록 양국충과의 알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침내 755년 양귀비의 양자로서 현종을 향한 일편단심만을 외치던 안록산이 드디어 칼을 빼어든다. 명분은 양국충의 죄상을 밝히고 처단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해 온 안록산이었기에 진격은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순식간에 낙양성이 함락된다. 756년 6월 13일 부슬비 내리는 새벽. 현종 일행은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극비리에 장안을 벗어나 촉 땅으로 몽진(蒙塵)한다. 장안을 떠나기 전날, 현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안록산군을 정벌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한다. 현종의 발표는 피신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거역하거나 배반하는 황제는 이미 황제가 아니다. 현종은 천심과도 같은 민심을 배반하면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수도 장안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이탈자가 속출한다. 아울러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한다.
    양귀비묘 전경

    “천하가 도탄에 빠져 백성들은 도산하고 황제마저 수도를 버린 상황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흉인 양국충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ㆍ“어쩔 수 없구나, 네가 죽어줘야겠다.”
    일촉즉발. 현종은 병사들의 험난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양국충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양국충은 그 동안의 폭정을 참아온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피 맛을 본 병사들은 현종을 에워싸고 양귀비도 죽이라고 청한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고 고력사가 비단수건으로 양귀비의 목을 졸랐다. 경국지색으로 황제와 나라를 휘저으며 살았던 양귀비의 종말은 이렇게 처참하고 허무하였다. 758년. 난을 수습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종은 양귀비가 죽은 마외역을 지나게 된다. 백거이는 현종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였다. 정세가 수습되어 황제 돌아가는 길,天旋日轉廻龍馭 마외에 오니 발길을 뗄 수가 없구나.到此躊躇不能去 마외 언덕 밑 진흙 속에 묻혔을 사랑,馬嵬坡下泥土中 고운 얼굴은 없고 죽은 자리만 남아있네.不見玉顔空死處 황제와 신하 모두 눈물로 옷깃만 적시는데君臣相顧盡沾衣 동쪽 성문을 향해 말이 스스로 길을 열고 가네.東望都門信馬歸
    양귀비묘

    양귀비묘는 서안 시내에서는 50여㎞가 넘는 곳이다. 마외파(馬嵬坡)에 있는 그녀의 묘는 자그마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분과도 같다. 그런데 봉분이 돌로 만들어졌다. 틈새는 시멘트로 모두 메워놓았다. 묘의 흙을 가져다 바르면 양귀비처럼 미인이 된다는 속설로 여러 번 망가졌기 때문이다. 봉분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의 묘치고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경국지색도 한줌 흙이 되어 이처럼 초라한 무덤으로 남았으니 공수래공수거인 인생사 부귀영화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도 애잔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던지 그들이 남긴 시가 비랑(碑廊)에 아롱져있다. ‘ 아름다움’ 때문에 원 없이 살았으나 그것이 또한 죄였던 여인 이제는 바람만이 그녀를 품는다. 그녀를 품은 바람이 비랑으로 향할 제 내 마음도 한 조각 얹어 보내고 저무는 들녘으로 발길을 돌린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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