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8 남양주 내원암 - (上)

浮萍草 2013. 9. 20. 17:24
    득남, 왕실여인들의 ‘로또’
    “왕자만 낳아라, 세상을 얻을 것이니…” 손 귀해진 조선후기 왕자발원 원당 급증 을 낳으면 여자들은 운다. 니 팔자도 나처럼 이렇게 고되겠구나 싶어서 울고 시어머니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서러워서 또 운다. 요즘에는 딸 낳은 여자가 대접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필자의 친구들 중에 딸 낳았다고 칭찬받은 경우는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없다. 현대사회에서 ‘아들’은 시월드(‘시’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로부터 며느리를 보호하는 방패막 정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 있어서 아들은 한 여자가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다시말해 아들을 낳은 그때부터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왕’의 등식이 성립하던 조선후기 왕실의 상황은 더더욱 그러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손이 매우 귀해졌는데 선조부터 순종까지 14명의 왕들 가운데 왕비의 소생은 효종 현종 숙종 헌종 순종 등 5명에 불과했다. 후궁의 소생 또한 매우 적고 대부분 요절해서 2명 이상의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살던 무지렁이 도령을 데려와 왕으로 삼거나(철종) 왕실과 촌수가 수십촌 떨어진 왕친을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종).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명문집안의 여식들 중에 간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친정집안의 가격(家格)이 후궁의 지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자를 낳은 궁녀가 가장 높은 첩지를 받았다. 출신이 무수리든, 나인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를 배출하기만 하면 그는 단번에 내명부의 정1품 빈(嬪)의 품계를 받았다. 조선후기에는 왕의 승은을 입은 여자들 중에도 후궁이 되지 못하는 여자가 허다했다. 나인 출신이 딸만 낳은 경우에는 첩지를 아예 못 받거나 후궁이 된다고 해도 높은 첩지를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왕자를 낳는 경우에는 왕비나 대비에 버금가는 권력과 경제적 보상이 주어졌다. 이같은 남아선호 현상은 왕실불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조선후기에 들어 왕실원당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변화상 중 하나는 왕자탄생을 발원하기 위한 원당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원당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 왕비나 후궁들의 기도처가 훨씬 더 많이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 구도적(求道的) 성향의 왕실불교가 후기에 이르러 기복적(祈福的)으로 변화되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비가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후궁이 왕자탄생 발원 기도처를 설치하는 것은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할 참람한 행위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실의 손이 워낙 귀해지다 보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왕비는 왕비대로 후궁은 후궁대로 왕자 발원 기도처를 곳곳에 설치했다. 또한 왕자를 배출하지 못한 왕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왕자탄생 기도처에 대한 보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왕비나 후궁이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를 올리던 즈음 왕자가 탄생하기라도 하면 그 기도처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았다. 사찰 인근의 경작지와 산림이 하사됐고, 절 주변에는 금표가 쳐져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금됐으며 지방관아에 바치던 엄청난 세금이 모조리 면제되었다. 게다가 그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라도 하면 그 절은 ‘왕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성역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영조 탄생 기도처인 파계사와 화엄사 그리고 순조 탄생 기도처인 남양주 내원암 고종의 탄생 기도처 화계사이다.
    ☞ 불교신문 Vol 2946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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