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23> ‘청춘과 낭만의 거리’ 대학로

浮萍草 2013. 8. 24. 10:36
    大路 한복판 퍼져 앉아, 밤새∼ 목청껏 노래하며 취하던…
    아일랜드 독립영화 ‘원스’의 여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더블린 길거리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글렌과 그의 상처에 공명하며 가수를 꿈꾸는 여인 마케타. 
    가난하고 앞날이 막막한 두 사람은 통상적인 러브스토리를 미루고 예민한 감성의 음악을 주고받는다. 
    어쩌다 서방권을 여행할 때 흔히 마주치는 장면이 ‘원스’에서 본 것 같은 거리 공연자들이다. 
    어쩌면 그렇게들 잘하는지…. 
    오며가며 길거리 청중들은 또 어쩌면 그리도 유쾌하게 호응해 주는지…. 
    우리에게도 원스의 더블린 거리 못지않은 공간이 있다. 
    요즘처럼 홍대 앞이 번성하기 전 우리네 거리 공연의 메카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었다. 
    1984년 관악산으로 이전한 서울대 문리대 터를 공원으로 손질하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종로쪽 이화동 사거리까지의 긴 거리를 대학로로 
    명명했다. 
    ‘청춘과 낭만의 거리’라고 했다. 
    고풍스럽고 촌스럽기까지 한 표현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1925년 중국인 이진산이 문을 연 대학로의 중국음식점 진아춘(進雅春). 혜화역 인근의 골목 안으로 자리를 옮긴 진아춘 벽에 있는 옛 진아춘 전경사진.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청춘들아 여기 모여 낭만이 하고 좀 놀거라’하는 뜻인지 시에서 주말에 차 없는 거리로 지정했는데 호응이 대단했다. 중고딩, 대딩은 물론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다 몰려와 밤이 깊도록 대로 한복판에 퍼져 앉아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전장(戰場)의 들판에도 꽃은 핀다더니 그 엄혹한 5공 시절 대학로 거리의 ‘낭만’은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했다. 대학로의 출발은 80년대 중반이지만 훨씬 이전부터 그 일대는 문화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동숭동 혜화동 명륜동 이화동을 포괄하면서 서울 문리대와 의대 방송통신대 인근의 성균관대는 물론이고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예총 흥사단 등 문화예술 기관이 운집 했다. 당연히 모여드는 사람들을 먹이고 취하고 놀게 하는 식당 카페 공연장이 번성했다. 올드보이들이 기억하는 약속장소의 명소는 어디일까. 그건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워낙 상징성이 크고 무려 57년째 굳세게 버티고 있으니까. 바로 학림다방이다. 1960년대 학림다방은 종업원이 먼저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찻집으로 유명했다. “뭘 드시겠어요?”하고 재촉하면 텅 빈 주머니로 들어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대학생이 곤란해할 테니까. 오죽 유명하면 1980년 말 학생운동사의 일대 전환점이 된 큰 공안사건의 공식명칭이 ‘학림사건’이었을까. LP로 잔잔하게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학림다방에는 뮌헨 슈바빙 가스등의 추억을 못 잊어 하는 전혜린의 우울이 거사를 모의하던 학생운동가들의 비밀스러운 밀담이 새롭고 기발한 공연을 기획하는 예술가들의 갑론을박이 온몸을 근질거려 하며 혹시 대선배의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찾아온 미래의 예술가 청춘들의 치기가 테이블마다 배어있다. 대학로에서 대표성과 터줏대감 자리를 놓고 학림다방과 겨룰 수 있는 장소가 있다. 1925년에 개점했다 하니 무려 88년의 역사. 연조로는 학림보다 훨씬 우위다. 서울에서 오래된 자장면 맛을 보고 싶다면 명동 중국대사관 앞 ‘개화’ 플라자 호텔 뒤쪽의 몇몇 집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식당의 역할을 넘어서는 장소로 지금도 옛맛 그대로의 자장면 짬뽕 군만두를 내놓는 맛집으로 대학로 진아춘을 먼저 꼽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진아춘을 대학시절 스터디룸 세미나룸으로 기억한다. 교내 서클룸의 격론이 끝나면 우르르 진아춘으로 몰려간다. 자장면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곧장 시국 세미나가 벌어지는데 거의 모든 방마다 비슷한 사정의 학생들이 핏대를 올리며 논쟁을 했다. 통금(야간통행금지)이 다 되도록 버티고 있는 학생고객에게 진아춘은 한없이 관대했다. 기억건대 그 주인장 얼굴에는 이번에 또 어떤 학생이 감옥에 끌려가려나 하는 근심이 서려 있었던 것 같다. ‘동양사상연구회’ 줄여서 동사라고 부르는 동아리에 몸담았던 내게 진아춘 자장면 맛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맛 따위를 따져볼 겨를이 없었던 고단한 시절이었다. 아마도 진아춘 주고객으로 인근 서울대 의대생과 대학병원의 인턴 레지던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숨 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일과 속에 후루룩 배를 채우고 뛰어 나가는 수련의들이 맛을 따지고 할 새가 어디 있었을까. 그런데 진아춘 추억을 간직한 그때 그 사람들 모두가 지금 와서 한결같이 증언한다. “아, 그 자장면 정말 맛있었어.” 사람마다 각자의 대학로가 있다. 모두가 자기만의 업소를 추억한다. 수많은 카페, 술집, 공연장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라져 버린 간판을 떠올리면 추억마저 함께 달아나 버리는 듯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혹시 ‘달??때의 춤’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마로니에 공원 옆 5층 건물 꼭대기의 그 레스토랑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소규모 공연도 종종 펼쳐졌다. 물론 나도 그때의 ‘그녀’와 늘 거기를 찾았다. 그녀와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 때 그곳으로의 발걸음이 끝났고 공교롭게 업소도 함께 문을 닫아 버렸다. 더 이상 ‘달이 밝을 때의 춤’은 없는 것이다. 고교를 졸업하고도 줄기차게 이어지던 문예반 동기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샘터사 건물 내 ‘난다랑’이었다. 밝고 세련된 분위기의 찻집이었다. 어느 날 옆 테이블에 앉은 가수 이문세 씨가 고음발성을 두고 동행에게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나고 날마다 하루 종일 그림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던 수염 기른 사내는 지금 어디서 무얼할까. 난다랑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별다방이 성업 중이다. 가장 자주 가고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학림다방 바로 옆에 있던 판가게 ‘바로크’였다. 정릉 콧구멍 판가게를 청산하고 명륜동 육교 아래 시계포 한 구석에 박스 몇 개 놓고‘카네기’라는 상호로 시작한 임형빈 사장인데 대학로 한가운데 배포 좋은 규모로 바로크를 열자 날개를 달았다. 아마 음반깨나 모았다는 사람치고 바로크 문턱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돈 좀 만진 임 사장은 판가게로 만족하지 못하고 근처에 ‘슈만과 클라라’라는 카페를 냈다. 역시 성공했다. 다음에는 재즈 전문카페 ‘올댓재즈’를 냈다. 또 잘 됐다. 그러나 욕심이 화를 불러온 모양이다. 혜화역 앞에 대형 공연장을 냈다가 쫄딱 망했다. 그 뒤끝에 개점한 곳이 국내 최대의 레스토랑식 재즈공연장 ‘천년동안도’이다. 천년이 지나도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지닌 외국에도 제법 알려진 천년동안도는 17년째 무사히 굴러가는 중이다. 자, 이렇게 나는 어떤 가게의 사업변천사를 소상히 안다.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주인장과 고객의 관계를 넘어버린 것이다. 같이 늙어가면서 그 사업의 부침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애달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래된 단골가게의 정겨움이라니! 1천원 내면 하루 종일 고품질 감상이 가능했던 음악감상실‘인켈 오디오월드’의 기억도 새롭다. 대학로를 빛낼 수 있는 비상업적 명소였는데 아쉽게도 그리 오래 버티질 못하고 문을 닫았다. 예술인에게는 20% 디시해 준다는 푯말을 붙인 당시 최고급 식당 ‘오감도’도 어느새 사라졌고 랜드마크 같았던 낙산가든은 명성을 잃었다. 개업도 많지만 문 닫는 소식은 언제나 계속된다. 올 3월 대학로 학전 그린 소극장이 문 닫는다는 뉴스가 크게 나왔다. 김민기 학전 블루와 그린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아 그리고 그 공연이 배출한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등등. 언제부터인가 대학로는 영화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충무로처럼 연극과 뮤지컬의 현장을 뜻하는 상징어가 됐다. 애초에 대학로 기획자는 그곳을 연극과 미술의 본거지로 만들고 싶어한 것 같다. 하지만 대학로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미술품을 구입할 나이대가 아니었다. 제법 많았던 갤러리들이 청담동, 삼청동으로 다 빠져나갔다. 대학로를 지키는 예술장르는 단연 연극이다. 배우 김갑수는 TV, 영화의 스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제 돈으로 대학로 극단을 꾸려간다. 김명곤처럼 장관, 국립극장장으로 출세한 인물도 나오고 윤석화처럼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극장 정미소에 기록하는 배우도 나온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청춘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대학로를 서성인다. TV, 영화에 진출하는 징검다리로 연극무대를 기웃거린단다. 뮤지컬이 대세라고도 하고 에로물이나 개그물 같은 연극 아닌 연극의 범람을 개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대학로다. 세태가 어떻게 변하든 대학로는 한국연극의 본거지다. 유명해진 적도 없고 앞날에 어떤 기약도 보장도 없건만 우직하게 현장을 지키는 연극인들을 대학로에 가면 쉽게 만난다. 극단 ‘초인’의 배우 임해열도 그중 한 사람이다. 대학 연극반 활동이 원죄였다. 1998년 사회생활 출발을 극단에서 했다.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긴 15년 세월을 무대에서 버텼다. 극단 생활 첫 2년간 벌어들인 총수입이 25만 원.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다. 동료들과 상호도 모른 채 그냥 껍데기집 굴찜집 하는 식의 실비집 술자리를 주로 얻어먹으며 전전하고 있지만 그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임해열이 기억하는 90년대 대학로 연극판은 유학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주도하는 유럽풍 실험극이 대세였다. 논버벌(비언어극) 공연도 이때 시작됐다. 제대로 된 러시아 정통 리얼리즘극도 동시에 활성화 되었다. 동숭아트센터, 아르코 극장, 연우무대, 성좌, 바탕골 소극장 정보 소극장 같은 주요 무대만 번성한 것이 아니다. 정말 작은 규모의 소극장들이 모세혈관처럼 대학로 전 지역에 퍼져 나갔다. 2010년 대학로 문화특구 지정으로 작은 공연장은 더 늘어났다. 건물주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공연장 개설을 유도한 것이다. 문화특구 지정이 상업화 바람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많지만 그래도 무대 확산을 고맙게 생각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도 배우 임해열 그리고 또 다른 임해열들이 대학로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현장의 그에게 장차 이곳이 어떻게 될지 물어봤다. 그는 프랑스 아비뇽이나 영국 에든버러를 부러워했다. 술 마시고 밥 먹는 목적의 놀이터 분위기가 아닌 오직 공연의 열기만이 뚜렷이 살아있는 특별한 지역. 유흥 중심지로 홍대 앞과 강남역 정도면 됐다고 본다. 대학로만이라도 격조 있는 예술거리로 안착하길 바라는 마음은 연극인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이 리모델링 공사 중이듯이 우리들의 대학로는 아직도 만들어 가는 과정 중이다.
    Munhwa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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