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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로(白露) 정경

浮萍草 2013. 9. 9. 21:17
    본격적인 가을 알리는 절기
    “백로 지나 논에 가볼 필요 없다” 긴 변화가 열매로 진면목 드러내 “아침에는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온갖 곡식 여물게 하고… 백설 같은 목화송이 산호 같은 빨간 고추열매를 집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볕이 맑고 밝다.” <농가월령가〉8월령에서는 가을날 농촌정경을 눈에 선하게 그렸다. 일교차가 커져 밤을 새고 난 풀잎마다 하얀(白) 이슬(露)이 맺히니 음력8월을 열면서 맞는 백로(白露)는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는 절기임에 틀림없다. 햇살은 따갑지만 무덥지 않고, 잠자리가 어지럽게 날아도 하늘은 드높다. 들녘마다 황금의 벼가 출렁이고 고추 사과는 빨갛게 익어가니 녹음과 바다를 그렸던 초록과 파랑의 여름 풍경이 조금씩 노랑과 빨강의 가을 색으로 채색되어간다. 과실도 저마다 달게 익어 참외는 중복, 수박은 말복까지 맛있고 처서엔 복숭아가 으뜸이라면 백로엔 포도가 제철이다. 그래서 초가을 어른들의 편지머리는 곧잘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신지…’로 시작되곤 했다. 음력8월은 금(金) 기운이 왕성하다. 만물은 더 이상 성장을 멈추고 단단하게 안으로 응축하여 결실을 맺는 본격적인 수렴의 계절이다. 음력7월에 이미 자연의 운행은 봄.여름의 발산하는 기운에서 수렴하는 기운으로 넘어왔지만 7월의 금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다면 8월은 잘 제련되어 매끄럽게 빛을 내는 금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흙과 물, 볕과 바람(地水火風)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길고 긴 변화의 시간들이 열매로써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이라 하겠다. 나락도 이 무렵에는 여물어야 하기에 “백로가 지나서는 논에 가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라는 말처럼 백로 전에 패지 못한 벼는 쭉정이가 되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로 아침에 팬 벼는 먹고 저녁에 팬 벼는 못 먹는다”,“백로 안에 벼 안 팬 집에는 가지도 말아라”하여 백로의 이삭상태가 가을농사의 성패를 가늠함을 나타 내었다. 그런가하면 “가을 다람쥐 같다”는 말이 있듯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건만 자연의 생명들은 겨울을 잘 나기 위한 신비로운 순환의 이치에 조용하고 재빠르게 움직 인다. 제비는 강남으로 돌아가고 기러기가 날아들며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하니 새들도 저마다 겨울채비로 가을을 맞을 것이다. 인간의 한 생에 비하면 영겁의 세월동안 반복되었을 자연에게 지혜를 배워, 가을을 가을답게 보낼 일이다. 법정스님은 소동파의 시구 ‘공산무인 수류화개(公山無人 水流化開)’를 따서 17년간 주석하던 불일암을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라 부르며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고 하였다. 또 한 독자가 찾아와 수류화개실이 어딘지를 물었을 때“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착하고 성실하게 지내면 그곳이 바로 수류화개실”이라 답했다고 한다. 금 가운데 가장 귀한 금은 ‘지금’이라 했던가. 우리에게 실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순간이며, 내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는 것. 법정스님이 우리에게 물처럼 흐를 것을, 늘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기를 바랐던 것처럼 자칫 백로 전에 패지 못한 쭉정이 벼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르고 다져야 하리라.
    ☞ 불교신문 Vol 2942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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